182화
배 안의 선장실에서 청나라 복장을 한 가슴까지 내려오는 하얀 수염이 인상적인 노년의 상인이 책상 위에 올려진 모피를 손으로 쓸면서 감탄사를 토해냈다.
“이 대인이 가져오는 이 가죽은 정말 만질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부드럽기 그지없군요. 이런 최상품의 모피라니...”
청나라 상인의 말에 원상의 행수는 기분 좋게 웃었다.
“하하하. 좋은 평가 감사합니다. 역시 우 대인은 품질을 정확히 알아보는군요.”
행수의 말에 청나라 상인은 자부심을 나타냈다.
“상인으로서 물품의 값어치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능력은 필수니까요. 해달 모피라...물량만 많으면 참으로 좋을 텐데...”
그러면서 청나라 상인은 행수를 아쉬움과 탐욕이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행수는 어깨를 으쓱하며 슬쩍 입에 침을 발랐다.
“어쩔 수 없지요. 워낙 희귀한 개체이다 보니...”
실제로는 북미왕국 영역의 바다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해달이었다.
홋카이도에서 쿠릴열도, 카무이 반도, 알류샨 열도, 새남포와 새김포만 외곽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해달이었으니까.
다만 정성국은 돈이 된다고 해달을 마구 잡다가 해달의 개체 수가 급감해 생태계가 파괴할 것을 우려해 어업 연구소에서 제대로 해달의 생태를 연구하기 전까지는 철저하게 사들이는 모피의 양을 제한해 원주민들이 해달을 남획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어업 연구소에서는 아직 양식 사업에 더 집중하고 있었기에 해달의 생태를 연구하는 데는 큰 진전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행수는 대충 둘러댄 것이다.
굳이 북미왕국의 사정을 시시콜콜하게 이야기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청나라 상인은 개체 수가 적은 것을 뭐 어쩌겠느냐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행수를 보고 이 최고급 모피를 더 구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쉽습니다. 이 가죽을 북경의 다른 귀족들도 무척 원하는데 물량이 부족하니...”
이 해달 모피는 이미 북경에서도 꽤 유명했다.
최고급 모피라고 할 수 있는 담비 모피보다도 부드럽고 따뜻해 청나라의 황족과 귀족들이 이 해달 모피를 구하길 원했기에.
다만 인기에 비하면 수량이 워낙 적어 큰돈을 벌 기회를 놓치게 된 것이 안타까워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청나라의 상인을 보고 행수 역시 비슷한 심정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저도 아쉬울 뿐입니다.”
행수도 아쉽긴 했다.
그는 해달이 정말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
더불어 해달들은 인간에 대한 경계심이 별로 없어 사냥하기도 무척 쉬웠고.
하지만 정성국의 엄명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애써 아쉬운 마음을 털어내며 이야기의 주제를 돌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히 청나라 상인의 말에 맞장구쳐봐야 아쉬울 뿐이지 변할 것은 없었으니까.
책상 위의 모피를 잘 접어 치우고 하얀 도자기 접시 위에 미리 준비했던 물건을 꺼내 올려두자 계속해서 모피에 시선을 떼지 못하던 청나라 상인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오. 건해삼이로군요. 이 대인의 물품이라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최상품일 것이고...”
그러면서 눈으로 건해삼을 관찰하다가 품질이 만족스러운지 흐뭇한 미소를 짓는 청나라 상인이었다.
이에 행수 역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화답했다.
“믿어주시니 고맙습니다.”
“이것도 물량은 얼마 안 되지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는 청나라 상인을 보고 행수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1만 근을 가져왔습니다.”
그 말에 청나라 상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건해삼을 바라보던 시선을 올려 행수에게 고정했다.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1만 근이요?”
“그렇습니다. 최근 상황이 좋아져서 더 많은 어민을 동원해 해삼을 채취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생산량이 확 늘었지요.”
이에 청나라 상인은 행수를 바라보다가 파안대소했다.
“으하하하! 역시 이 대인은 귀인이십니다. 이런 귀물을 그렇게 많이 가져올 줄은...”
귀물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가 가져온 해삼의 값어치는 높았다.
그동안은 산동성이나 요동성 같은 북쪽에서 나온 해삼을 최고로 쳤지만, 눈앞의 이 대인이 가져온 해삼은 그보다 더 품질이 좋았다.
그렇기에 처음 이를 확인했을 때는 무척 놀라기도 했었고.
다만 이 건해삼 역시 해달 모피처럼 양은 많지 않았기에 큰돈이 되는 거래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직접 이 대인을 추켜세워주고 이렇게 밀무역을 직접 진행하는 것은 이 대인이 가져오는 물품은 최상품인 탓에 이를 이용해 인맥을 늘리거나 이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헌데 갑자기 기존의 생산량에 10배에 달하는 물량을 가져올 줄은 몰랐기에 기뻐 어쩔 줄을 모르자 눈앞의 상인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장담했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어민을 동원할 생각이라 어쩌면 해삼의 물량을 더 늘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허어...”
청나라 상인은 자신감을 보이는 행수를 보고 내심 놀랐다.
정말 저자의 말처럼 해삼의 물량이 더 늘어난다면 충분히 최고급 해삼 시장을 장악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그리고 그렇게 되면 막대한 돈을 벌 수 있었고.
이에 입이 귓가에 걸리기 시작한 청나라 상인의 귀에 이 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습니까. 1만 근을 다 사시겠습니까?”
그제야 정신을 차린 청나라 상인은 당연하다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물론입니다! 이 큰 거래를 마다할 수는 없지요. 이 대인이 가져온 건해삼 전량을 사겠습니다. 가격은 기존처럼 건해삼 한 근에 은 열 냥으로 거래하도록 하지요.”
“그럽시다.”
행수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청나라 상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바로 은을 가져오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나가려는 청나라 상인을 붙잡는 행수였다.
“아. 우 대인. 그것 말인데...혹시 철광석과 석탄을 구할 수 없겠습니까?”
대뜸 철광석을 언급하는 행수를 보고 청나라 상인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살짝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흐음...해삼을 판 돈을 전부 사용하실 생각이시오?”
“그렇습니다.”
행수의 대답에 청나라 상인은 잠시 머릿속에서 계산해보다가 입을 열었다.
“으음...그럼 그 양이 만만치 않을 터인데...어찌 운송하려 하시오? 아무리 이 대인의 배가 크다고는 하나...”
“필요하다면 다른 배를 더 동원하면 그만이지요.”
“으음...”
행수의 말에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던 청나라 상인은 이내 결정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내 솔직히 말하리다. 이 대인. 그건 쉽지 않소이다.”
“그렇습니까?”
“이 대인도 알겠지만 동녕국 때문에 해금령이 떨어지고 상단이 망할 것 같아 아는 인맥을 동원해 그나마 안전하게 밀무역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건 이 대인이 동녕국 사람도 아니고 거래하는 품목이 북쪽에서 나는 최고급 모피와 해삼이기에 가능했던 거요.”
동녕국은 정씨왕국, 동녕왕국으로 불린 정성공이 대만으로 건너가 대만을 점유하고 있던 네덜란드를 몰아내고 건국한 나라였다.
건국 목적 자체가 반청복명이었기에 청나라는 동녕국을 경계했고 이 때문에 동녕국을 견제하기 위해 해금령을 내리기도 했고.
다만 실제로는 이렇게 알음알음 밀무역을 진행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를 언급하는 청나라 상인의 말에 행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대인이 계속 나와 거래하면서 나오는 자금으로 철을 원한다면...당연히 어느 정도는 알려질 수밖에 없소. 그렇다면 이를 무마하기 위해 더 많은 상납금을 바쳐야 하는지라...생각보다 비싼 값에 철을 살 수밖에 없소.”
석탄은 크게 상관없었지만, 철의 경우는 중요한 물자였기에 밀무역을 진행하기 쉽지 않다면서 일단 은으로 대금을 가져가고 다른 곳에서 철을 구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이야기하는 청나라 상인을 보고 오히려 행수는 그의 말에 미소를 머금었다.
아예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들을 줄 알았는데 청나라 상인의 말은 돈만 준다면 가능할 것 같았기에.
이에 행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호구 잡히는 것 같아 썩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당장 북미왕국에 철로를 깔아야 하는 만큼 당분간은 어쩔 수 없군.’
“돈이 많이 들어갈 뿐이지 가능은 하단 소리군요.”
“허허. 이 대인. 내 말을 듣기는 한 거요?”
행수의 말에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청나라 상인이었지만 행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장 아이누 부족 연합에서 철을 원하니 비싼 가격이라도 사야지요. 나야 그들을 대리해서 움직이는 상인이니 어쩌겠소.”
“하지만...”
“그게 아니면 아이누 부족 연합을 설득해 청 조정의 책봉을 받아 조공 체계에 편입해 정식으로 공무역을 진행해야 하는데...그러면 우 대인과는 더는 거래하기 어렵습니다. 더불어 썩 좋은 대우를 받을 것 같지도 않고 말입니다. 그럼 우리 모두 불행해지겠지요.”
지금처럼 계속 거래를 유지하려면 자신들이 원하는 철과 석탄을 구해달라는 이야기였고 위험한 만큼 어느 정도 광물의 가격을 올려도 용인하겠다는 행수의 말에 청나라 상인은 하얀 수염을 계속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가 결국 손을 들었다.
“이것 참...후우. 알겠소. 허면 일단 모피값만 계산하고 건해삼의 값은 일단 내가 맡고 있겠소. 그리고 이를 가지고 철광석과 석탄을 구해보리다.”
“부탁드립니다. 우 대인.”
청나라 상인은 선장실을 나가기 직전에 몸을 돌려 행수를 강렬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대신 이 건해삼의 물량을 계속 늘릴 거라고 믿겠소.”
“물론입니다. 믿어주시지요.”
* * *
김봉길은 땡볕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는 이정운에게 다가갔다.
“후우...여긴 정말 엄청나게 덥군. 조선에 비하면 새김포도 꽤 덥다고 생각했는데 여긴 그보다 더한 것 같은데?”
“확실히 그렇지요. 후우. 헌데 사령관님은 왜 나오셨습니까?”
이정운은 흘러내리는 땀을 목에 두른 수건으로 닦으면서 김봉길을 바라보았다.
이에 김봉길은 히죽 웃으며 한창 사람이 북적이는 공터를 바라보았다.
“바깥이 이리 시끄러운데 당연히 나와봐야지. 드디어 새한성에서 병력과 물자가 도착했나 보군.”
“그렇습니다. 여기 보고서입니다.”
이정운이 넘겨준 보고서를 슬쩍 훑어본 김봉길이 생각외로 많은 물자를 보고 탄식했다.
“허어...경비대 3500명에 화포 32문과 각종 물자까지...이 더운 여름에 저 많은 물자와 함께 이동하느라 무척 고생했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이정운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무척 안쓰러운 눈길로 이번에 새진주에 도착한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새나주에서 이곳 새진주까지 마차를 타고 이동했었지만, 마차라고 썩 편하진 않았다.
헌데 저들은 거기에 더위와도 싸워야 했었으니 오죽 힘들었을까 싶었다.
이에 김봉길은 마차 주위에서 지친 기색이 역력한 병사들을 보고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저렇게 두지 말고 바로 숙소와 막사를 배정해서 저들을 편히 쉬게 하게. 저들이 가져온 물자들은 이곳의 병사들과 일꾼들을 모두 동원해 옮기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김봉길은 계속 흐르는 땀을 참지 못하고 다시 사령관실로 도망치려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덧붙였다.
“아. 일부는 창고에, 일부는 배에 실어두도록 하게. 저들이 왔으니 슬슬 산 아구스틴으로 가야겠지. 그리고 에스파냐에 이야기한 날짜도 다가오는 만큼 말이야.”
김봉길의 말에 움찔한 이정운은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령관님. 하지만 당장 움직이는 건 조금...”
김봉길은 이정운의 반응에 낄낄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아. 걱정하지 말게. 바로 움직일 생각 없네. 저렇게 지친 친구들을 배에 태웠다가 뱃멀미라도 하는 날엔 송장 치울 것 같아 두렵군.”
“하하하.”
김봉길이 농담처럼 이야기하긴 했지만 분명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아무래도 경비대원들은 주로 원주민 출신들인 만큼 이곳에 오기 위해 배를 타봤던 조선인들과는 달리 뱃멀미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일단 충분히 쉬게 해 체력을 회복시킬 생각이었고.
이에 김봉길이 입을 열었다.
“당분간은 최대한 보양식을 먹이도록 하게. 닭도 팍팍 잡고.”
김봉길의 명령에 이정운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당분간 병사들이 포식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