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이곳이...산 아구스틴이로군.”
“그렇습니다. 사령관님.”
처음 산 아구스틴이 보일 때만 해도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사실에 표정이 좋았던 김봉길과 이정운은 점차 항구에 가까워질수록 안색이 흐려졌다.
김봉길은 산 아구스틴을 제대로 살펴보기 위해 눈에 가져다 댔던 망원경을 떼면서 무척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제대로 된 마을이라고 할 수 있나? 거의 폐허에 가까운데?”
“그러게 말입니다. 마을이 아니라 마을 터네요.”
산 아구스틴은 에스파냐가 건설한 플로리다 지역의 거점으로 선착장과 마을, 그리고 이곳을 방어하는 요새가 존재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보이는 것은 조금 달랐다.
분명 선착장과 나무로 만든 요새는 존재했지만, 그 근처에 마을이 있었던 것이 분명한 자리에는 인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다 쓰러져가는 건물들의 잔해만 남아있었다.
이를 확인한 김봉길은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으음...마을이 폐허가 된 거야 이곳을 우리에게 넘겨주기로 결정되었으니 마을에 사는 주민들을 누에바 에스파냐로 이동시켰기에 관리가 되지 않아서 폐허가 되었다...로 이해한다고 쳐도 저 나무로 만든 요새도 꽤 엉망이로군.”
폐허가 된 마을처럼 나무로 건설된 요새 역시 썩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곳곳에 구멍이 나 있거나 부러진 부분도 보였고.
그를 확인한 이정운은 살짝 긴장하며 김봉길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사령관님. 부서진 곳도 꽤 보이고...최근에 공격이라도 받았던 걸까요?”
하지만 김봉길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고...아니면 이곳을 우리에게 넘겨줘야 하니 유지 보수를 소홀히 하거나 아예 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이에 이정운은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슬쩍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러겠습니까?”
“모르는 일이지.”
김봉길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이정운이 웃음을 멈추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을 때 김봉길이 요새 위의 에스파냐 병사들을 보면서 말했다.
“근데 반응이...아무래도 우리를 알아보는 것 같지?”
요새 위에서 선착장에 접근하는 인급 전선을 보고 두 손을 흔드는 에스파냐 병사들의 표정엔 반가움이 가득했기에 이정운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네요. 삼태극 기를 알아보는 걸까요?”
“글세...아무튼 혹시 오인해서 공격할까 봐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군. 일단 저곳에 정박하도록 하지. 그리고 외무청 관리에게 병사들을 몇 붙여서 현지 상황을 좀 파악해보라고 하게. 마을이 왜 저렇게 폐허에 가까운지, 그리고 요새가 왜 저렇게 엉망인지 말일세.”
“알겠습니다.”
김봉길의 명령에 고개를 끄덕이며 선실에 있는 외무청 관리에게 향하려는 이정운에게 김봉길이 덧붙였다.
“아. 그리고 갑판 위에 있는 저 포로들 싹 데려다가 제대로 씻기고. 갑판 청소도 다시 해야겠군. 쩝.”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 * *
나무로 만든 요새 위에서 에스파냐의 병사들이 선착장으로 다가서는 북미왕국의 배를 보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드디어 저들이 왔군.”
큰 키의 에스파냐 병사가 싱글벙글하며 북미왕국의 배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을 때 작은 키의 에스파냐 병사가 북미왕국의 배를 보며 흥미를 나타냈다.
“북미왕국의 배가 특이하다더니...정말이네요. 돛도 없고 노도 없다니...보급선의 선원들이 거짓말하는 줄 알았는데 말이죠.”
하지만 큰 키의 에스파냐 병사는 북미왕국의 배엔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난 그것보다 저들이 도착했으니 드디어 이곳에서 떠난다는 것이 너무 기쁘다. 이곳은 완전 감옥이나 다름없으니. 빨리 베라크루즈로 가고 싶다고!”
이에 작은 키의 에스파냐 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긴...작년부턴 거의 감옥이나 다름없긴 했죠. 거기에 보급도 시원찮고.”
그때 뒤쪽에서 다른 에스파냐 병사가 끼어들었다.
“뭐 덕분에 해적 놈들도 딱히 이곳을 털어봐야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조용했잖아? 난 썩 나쁘진 않았다고.”
이에 큰 키의 에스파냐 병사는 진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럼 내 다음 근무지가 베라크루즈가 아닌 외딴 섬이 되면 바꿔줄거지?"
“미쳤냐? 큭큭큭.”
* * *
김봉길은 몇몇 병사들과 함께 요새 근처의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그을린 흔적과 함께 무너진 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거 엉망인데...전혀 관리하지 않았군. 쩝.”
그때 뒤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사령관님. 여기 계셨군요.”
김봉길과는 달리 병사들의 호위를 받고 요새로 향했던 외무청 관리가 다가오자 김봉길은 그를 보고 급히 묻기 시작했다.
“아. 그래. 대체 이곳이 왜 이 꼴이 된 건지 알아냈나?”
이에 외무청 관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작년에 해적이 쳐들어왔답니다.”
“해적이?”
“그렇습니다.”
외무청 관리의 말에 안색이 굳어진 김봉길을 보고 외무청 관리가 자세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아카풀코 조약으로 인해 이곳이 북미왕국에 넘어간 이후 이를 이곳에 정착한 에스파냐인들에게 알렸다고 한다.
이에 에스파냐인들은 하나둘 이곳을 떠나기 시작했고.
더불어 이곳을 정기적으로 들르던 보급 선단이 점차 규모가 축소되고 뜸해지자 더 많은 에스파냐인이 떠났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작년 봄에 해적이 이 산 아구스틴을 공격했고 남아있던 에스파냐인은 마을을 버리고 저 나무 요새로 들어와 에스파냐 병사들과 함께 해적과 맞서 싸웠지만 버티는 것이 다였다고 한다.
그 사이 마을은 해적들에게 철저하게 약탈당했고.
이를 듣고 김봉길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해적도 문제긴 하지만...묘하게 상황이 겹쳤다고 보는 게 맞겠는데?”
“그렇습니다. 주민들 절반 이상이 떠난 상태에서 해적이 공격했고...마을이 완전히 폐허가 되자 살아남은 주민들마저 아무런 미련 없이 이곳을 떠났기에 이렇게 되었다더군요.”
상황은 충분히 머릿속에서 그려졌기에 김봉길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려 허름한 요새를 바라보았다.
“그럼 요새는?”
이에 외무청 관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도 물자도 부족해 복구할 역량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만...”
“개소리군. 결국, 조금 있으면 이곳을 우리에게 넘겨줘야 하니 굳이 복구하지 않았다는 소리네?”
김봉길이 투덜거리자 외무청 관리도 비슷한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도 이들의 짐작이 맞았다.
에스파냐로서는 이미 플로리다 지역을 북미왕국에 넘겼기에 굳이 이곳에 자원과 돈을 더 투자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원 역사에서는 이 해적들의 습격으로 인해 마을 사람 대부분이 사망하고 마을이 잿더미로 변했으며 나무로 만든 요새마저 반파되자 이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23년에 걸쳐 건설되고 250년 넘게 이름을 바꾸어 가며 군사적 요충지로 사용된 산 마르코스 요새는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거참...그래도 그렇지. 저런 요새에서 지내기 불안하지도 않나? 작년부터 저 꼴이었다니 기가 차네.”
김봉길은 가까이에서 확인할수록 곳곳이 망가진 요새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저렇게 엉망이어서인지 그 이후로는 해적들의 습격은 없었답니다. 뭐 저들도 딱히 이곳을 공격해봐야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요.”
외무청 관리의 말에 김봉길은 오히려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외무청 관리의 말은 이 요새에 북미왕국의 깃발이 휘날리는 순간 다시 해적들이 덤벼들 거란 뜻이었으니까.
“하아...이것 참...그럼 우리가 이곳을 접수하고 나면 다시 해적 놈들이 노릴 수도 있겠다는 거군? 젠장...그럼 천상 이곳 요새를 제대로 보강하고 요새에 화포를 설치하기 전에는 인급 전선으로 이곳을 방어해야 한다는 이야긴데...”
그런 김봉길의 판단에 외무청 관리 역시 동의했다.
베라크루즈에서 새진주로 물자를 운송해주는 선박의 선장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양인들이 북미왕국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렇기야 하지요. 특히 서양인들에게 우리 북미왕국은 값비싼 도자기를 생산하는 나라로 알려져 있으니까 해적들이 이를 노리고 덤벼들 수도 있을 겁니다. 다만 이곳에 오면서 사령관님께서 해적들에게 북미왕국의 무력을 보여주었으니 저번에 도망친 해적들이 주변에 잘 소문내준다면 함부로 덤비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저번 에스파냐의 선박을 공격한 해적들 일부를 그냥 놓아준 김봉길의 선택을 대단하다고 추켜올리는 외무청의 관리였다.
이에 김봉길은 슬쩍 흐뭇해하면서도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정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에스파냐에 의해 북미왕국의 해군이 대단하다고 알려지고 이번에 인급 전선에 호되게 당한 해적들이 떠들어댄다 할지라도 다른 해적들이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원래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체감하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이 백날 떠들어봐야 이를 제대로 실감하긴 어려운 법이니까.
거기에 일확천금을 노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드는 해적들이라면 더 하리라 판단한 김봉길이 입을 열었다.
“뭐...그걸 노리고 해적 일부를 도망치게 방관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해적들이 북미왕국을 두려워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네. 몇 번 더 박살을 내줘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겠지.”
김봉길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 외무청 관리였다.
“그렇기야 하지요.”
김봉길은 발걸음을 선착장으로 옮겼다.
처음 새진주에서 출발할 때만 하더라도 이곳에서 좀 머무르며 여러 정보를 수집할 생각이었으나 이곳 상황이 썩 좋지 않고 포로까지 있는 만큼 바로 새진주로 귀환하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에 외무청 관리와 함께 이동 중에 북미왕국 병사들의 감독하에 열심히 몸을 씻고 다시 인급 전선으로 올라타는 포로들을 멀리서 바라보고 투덜거렸다.
“어휴. 제대로 된 해도도 얻었겠다 바로 이곳으로 물자와 경비대 일부를 수송할 생각이었는데...이거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군.”
그 말에 외무청 관리가 끼어들었다.
“아. 그럼 저들에겐 언제쯤 다시 올 거라고 이야기할까요? 떠나기 전에 미리 이야기해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만.”
이에 김봉길은 머릿속으로 대충 계산해보고 입을 열었다.
“음...조선소에서 건조하고 있던 또 다른 인급 전선이 완성되면 함께 움직여야겠네. 그래야 이곳을 방어하기 위해 한 척 남겨둘 수 있을 테니. 그러니...넉넉잡고 한 달 후쯤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고 이야기하면 될 것 같군. 아. 근데 저들은 어쩐다던가?”
아카풀코 조약에 의하면 산 아구스틴에 주둔할 북미왕국의 병사가 도착하면 에스파냐의 병사들은 물러나기로 되어있었다.
다만 이 산 아구스틴의 선착장엔 에스파냐의 배가 없었기에 이를 묻자 외무청 관리가 머리를 긁적였다.
“새진주에 에스파냐의 선박들이 자주 들른다는 것을 아는지 대신 연락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저들은 이곳을 하루빨리 떠나고 싶어하는 눈치라...돌아가서 에스파냐 선박을 통해 누에바 에스파냐에 연락을 해두면 배를 보내겠지요.”
외무청 관리의 말에 김봉길이 몸을 돌려 나무로 지어진 요새를 바라보며 살짝 곤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에스파냐가 바로 배를 보내지 않는다면 저 요새를 사용하지 못하는 건가?”
그 말을 듣고 외무청 관리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음...어차피 아카풀코 조약에 의하면 이 땅은 북미왕국의 영토인 만큼 저 요새 역시 북미왕국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퇴거를 요청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저들 역시 하루빨리 이곳에서 떠나고 싶어하는 만큼 자신들을 태우러 올 배가 도착할 때까지 며칠 정도는 천막생활도 감수할 것 같고요. 제가 가서 미리 이야기해두겠습니다.”
이에 김봉길이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갑오 소총이야 몰라도 저 요새에 설치할 화포의 외형을 저들에게 보이고 싶진 않으니 미리 이야기해두도록 하게.”
북미왕국의 무기에 무척이나 관심이 많은 에스파냐였다.
그런 이들에게 후장식 화포의 외형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기에 이를 언급하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외무청 관리였다.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그러게. 출발 준비를 하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