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인급 전선이 빠르게 교전 지역으로 접근하기 시작했을 때 김봉길은 이정운에게 말을 걸었다.
“만약 자네가 이 전선을 지휘한다면 어떻게 하겠나?”
전투를 앞두고 갑작스러운 김봉길의 질문에도 이정운은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선회하면서 저 외곽의 해적선을 공격하겠습니다.”
그런 이정운의 대답에 김봉길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시간을 들여 안전하게 하나씩 처리하겠다는 뜻이지? 전에 자네가 에스파냐의 교역 선단을 요리한 것처럼?”
“그렇습니다.”
이정운의 대답에 김봉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쁘진 않아. 나쁘진 않지만...전에 조선소에서도 이야기했지만 2함대는 북미왕국의 얼굴이 될걸세. 그러니 조금은 강인한 인상을 줄 필요가 있네.”
이정운은 김봉길의 말에 살짝 안색이 굳어 김봉길을 바라보았다.
“설마...이대로 저 지역으로 돌격하실 생각이십니까?”
이에 김봉길은 이정운을 보고 씩 웃었다.
“그렇네.”
“하지만...”
이정운이 말하려는 것을 김봉길이 입을 열어 끊었다.
“뭘 그렇게 걱정하나. 고작 저들이 날려대는 쇳덩이 따위에 이 인급 전선이 침몰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건 아닙니다만...”
이정운 역시 저들의 포탄에 맞는다고 인급 전선이 침몰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전장은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르는 만큼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근거리까지 붙을 이유가 있나 싶어서 말을 흐리자 김봉길이 슬슬 교전 지역과의 거리를 재면서 말했다.
“병사들의 안전은 무척 중요해. 그건 나도 인정하네. 하지만 이곳에서 저들에게 무척 강인한 인상을 심어준다면 저들은 우리를 두려워할 것이고 함부로 덤비지 못할걸세. 그럼 더 많은 병사가 안전해지겠지.”
“...”
김봉길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에 이정운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정운이 어느 정도 수긍했다는 생각이 들자 다시 웃으면서 그를 바라보는 김봉길이었다.
“그리고 지급 전선이면 모를까 튼튼한 인급 전선을 타고 뭘 그렇게 걱정하나. 전선에 흠집이라도 생길까 봐?”
김봉길의 도발과도 같은 말에 이정운은 손을 들었다.
“알겠습니다.”
이에 김봉길은 곧바로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 그럼 바로 슬슬 선수포의 사정거리에 도달하니 발사 준비하도록. 그리고 돌입 후엔 화포장의 재량에 따라 발사하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 * *
‘콰콰콰콰쾅!’
한창 교역품이 담긴 에스파냐의 선박을 공격하던 한 해적선의 갑판이 박살 나며 불길에 휩싸였다.
이에 잉글랜드 출신의 해적이 불타오르는 해적선을 보고 입을 벌렸다.
“와...”
하지만 주변의 다른 해적들의 반응은 달랐다.
“뭐야! 뭐냐고!”
“저기 저...”
“저거 프랑스 해적들 배 아니야?”
“갑판이 아예 날아갔어...”
해적선의 선장 역시 처음엔 당황해서 멍하니 바라봤지만, 해적들의 반응에 정신을 차리고 벌컥 화를 냈다.
“아니 무슨...화약을 어떻게 관리했기에! 이 멍청한 프랑스놈들!”
“어찌합니까? 선장님? 이젠 배의 숫자가 같습니다!”
해적의 말에 선장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참 기세를 올리며 에스파냐 선박을 공격하던 해적들이 엉거주춤하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젠장. 분위기가...이건 글렀다.’
처음 위장으로 에스파냐 선박에 가까이 붙어 습격을 시작한 이후 분위기는 썩 나쁘지 않았다.
교역품이 든 선박에 가까이 접근했고 이를 막으려는 호위함 갑판에 연기가 나는 항아리를 던져 혼란스럽게 만들었으니까.
덕분에 꽤 많은 시간을 벌 수 있었고 교역품을 실은 선박의 선원들을 상당수 처리했고.
이제야 갑판을 정리한 호위함들이 해적을 내쫓기 위해 맹렬하게 공격하며 달라붙었지만, 시간을 끌면서 교역품이 든 선박을 탈취하기만 하면 끝인데 갑자기 상황이 변했다.
‘숫자를 위해서라지만 멍청한 프랑스 해적들을 받는 게 아니었는데...’
다시 한번 속으로 화약 관리를 잘못해 침몰한 프랑스 해적들을 욕하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해적들을 향해 소리쳤다.
“젠장...붉은 깃발을 올려!”
“선장님?”
붉은 깃발은 교역품이 든 선박에 올라타 탈취하라는, 일종의 총공격에 해당했기에 해적들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선장을 바라보았다.
“빨리! 당장 올리라고! 날 믿어라! 개죽음당할 일은 없으니까!”
선장의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붉은 깃발을 올리는 해적들이었다.
분위기가 가라앉고 슬슬 공격이 뜸해지는 시기에 올라온 붉은 깃발에 해적들이 교역품이 든 선박에 달라붙어 배를 탈취하기 위해 덤벼들기 시작했다.
다시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이를 확인한 선장은 누런 이가 보이게 씩 웃으면서 소리쳤다.
“자! 됐다! 지금이 기회다! 돛을 활짝 펴라! 단숨에 빠져나간다!”
처음 붉은 깃발을 올릴 때만 해도 어두운 표정이던 해적들은 선장의 말에 다들 안색이 밝아졌다.
선장이 왜 붉은 깃발을 올렸는지 이해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러면서 재빨리 돛을 펴고 난전 상황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들과 교전하던 호위함은 처음에 조금 당황했지만, 교역품이 든 선박이 위험해 보였기에 도망치는 해적선을 무시하고 선수를 틀어 탈취당하기 직전인 선박으로 향했다.
붉은 깃발이 오르자 이판사판으로 에스파냐의 선박을 탈취하려 들었던 다른 해적들은 그 광경을 목격하고 당황했고.
하지만 선장은 뒤에서 들려오는 욕설은 무시하며 가까이 근접하는 갤리를 보고 해적들을 독려했다.
“좋았어! 거의 빠져나왔다! 갤리와 충돌하지 않게 조심하고! 이제 한 번의 포격만 견디면 된다! 포격에 대비해! 갤리니 만큼 대포가 많지도 않을 거다!”
선장의 말에 다들 충격에 대비하는 해적들이었고.
‘퍼퍼펑!’
갤리와 지나치며 포성이 들려왔지만, 선장은 킬킬거리며 소리쳤다.
“자! 봐라! 대포도 몇 발 쏘지 못...”
‘콰콰콰콰쾅!’
“끄아아악!”
갑판의 절반 가까이가 폭음과 함께 터져나갔다.
동시에 갑판의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해적들의 몸에 박혀 참담한 광경이 연출되었고.
선미의 갑판에서 이를 지켜보던 선장은 덜덜 몸을 떨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이...이게...이게 무슨...”
* * *
북미왕국의 인급 전선이 도망치던 해적선을 박살 낸 이후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됐다.
도망치는 해적선을 보고 당황하고 사기가 떨어진 해적들은 그 해적선의 갑판이 폭발하는 순간 처음 해적선이 폭발한 것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도망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해적선을 인급 전선이 다시 포격을 통해 한 척을 침몰시켰고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던 2척은 쫓지 않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두 척 모두 침몰시킬 수도 있었지만, 김봉길은 오히려 속도를 줄여 저들이 도망치는 것을 방관했다.
저들이 도망쳐 해적들에게 소문이 퍼져야 함부로 북미왕국의 함선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라면서.
그렇게 상황이 정리되고 인급 전선이 바다 한가운데 정박해있는 에스파냐의 선단에 다가가자 에스파냐의 선단에서 조그마한 보트가 내려졌고 몇몇이 보트를 타고 인급 전선에 승선했다.
“도움에 무척 감사하오.”
책임자로 보이는 에스파냐인이 인급 전선에 올라타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이에 외무청의 관리가 웃으며 응대했다.
“일단 에스파냐와 북미왕국은 우호국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해적을 상대하는 일인 만큼 돕는 것은 당연하지요.”
“오. 에스파냐어를 무척 유창하게 하시는군요.”
말이 통하자 반색하는 에스파냐인을 보고 그저 미소짓는 외무청 관리였다.
이에 에스파냐인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귀하가 이 함의 함장이십니까?”
“아닙니다. 저는 북미왕국 외교청 소속의 관리이고...이 함의 함장님은 저기 계신 저분이십니다.”
그러면서 상부 구조물 입구에서 멀뚱히 이쪽을 바라보는 김봉길을 가리켰다.
“아. 그럼 직접 감사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만...”
“그러시지요. 다만 저분은 에스파냐어를 하지 못하는 만큼 통역을 도와드리지요.”
“아. 알겠습니다.”
외무청의 관리가 에스파냐인과 함께 다가오자 김봉길이 외무청 관리에게 투덜거렸다.
“음? 뭐야? 왜 데리고 온건데? 적당히 대응해서 돌려보내라니까?”
이에 외무청 관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도와 주웠다고 감사 인사를 직접 하고 싶답니다.”
“그래도 염치는 있네.”
외무청 관리를 통해 자신들을 도와준 함장에게 감사 인사를 한 에스파냐인은 조심스럽게 외무청의 관리에게 무어라 이야기했다.
이에 외무청 관리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김봉길을 바라보았다.
“음...이 배를 구경해보고 싶다는데 어쩝니까?”
이에 김봉길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게 목적이었나? 뭘 어째. 당연히 불가.”
“역시 좀 그렇죠?”
“그래. 상부 구조물에 선수포와 선미포가 있어서 아예 이 안쪽으로 들여보내면 안 된다고. 그러니 적당히 둘러대. 바빠서 빨리 가야 한다고 말이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외무청 관리가 에스파냐인에게 무어라 이야기하자 에스파냐인은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포로 문제는 어쩔까요?”
인급 전선의 공격 이후 에스파냐 선박에 올라탄 해적들을 버리고 죽어라 도망쳤던 해적선이었다.
이 때문에 에스파냐 선박에 올라타 병사들과 교전하던 해적들은 결국 항복했고.
이들은 포로가 되었기에 외무청 관리가 이를 언급하자 김봉길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포로? 왜? 저들이 포로를 내어주겠다던가?”
이에 외무청 관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다만 도와주었고 해적들을 내쫓은 건 이쪽의 공이 크니 요구할 수는 있어 보입니다만...”
외무청 관리의 말에 김봉길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됐어. 여기까지 왔는데 포로 때문에 다시 새진주로 돌아가기도 애매하고 데려가 봐야 어따 써먹겠어.”
이에 외무청 관리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탄광에 처박아둬야죠. 어차피 저들은 해적을 무조건 사형시키는지라 이들에게 넘기면 다 죽을 텐데 차라리 우리가 데려가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아...그건 좀 끌리긴 하는데...한번 이야기나 해봐. 그렇다고 무리하지는 말고.”
“알겠습니다.”
* * *
북미왕국의 선박이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에스파냐의 함장 옆에 있던 부함장이 중얼거렸다.
“이거 말로만 들었는데...정말 무시무시하군요.”
“그러게 말일세. 누에바 에스파냐의 서해안이 순식간에 불타올랐다더니...”
그동안 북미왕국의 해군에 대해 질리도록 듣긴 했었다.
갑자기 전쟁이 벌어졌고 누에바 에스파냐의 서해안이 초토화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결국 협상을 통해 전쟁이 종료되었다고 들었으니 별별 이야기가 다 나온 것이다.
다만 초기에는 기습으로 인해 북미왕국이 이득을 봤을 뿐이라고 애써 북미왕국의 해군을 폄하했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북미왕국에 잡혀있던 포로들이 풀리면서 그들을 통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북미왕국 해군의 평가는 올라갔다.
하지만 북미왕국 해군을 직접 보지 못했던 베라크루즈에 주둔한 에스파냐 병사들은 과장이 심한 것 아니냐며 혀를 찼었고.
이는 호위함의 함장과 부함장도 마찬가지였다.
헌데 실제 보니 오히려 귀를 막고 있었던 것은 자신들이라는 생각이 들어 복잡한 표정을 짓는 함장의 귓가에 부함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헌데 저건 대체 어떻게 움직이는 거랍니까? 가까이서 자세히 살펴봤지만, 노가 나올 구멍도 없던데요. 정말 마법으로 움직이는 겁니까?”
북미왕국의 포로로 잡혀있던 병사들이 한결같이 이야기한 것이 바로 저 돛도, 노도 없이 마법으로 움직이는 배였다.
이를 우스갯소리로만 여겼지만, 실제 보니 신기하기 짝이 없어 무척 궁금해하는 부함장을 보고 함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나야 모르지. 그것 때문에 감사의 인사를 한다는 구실로 배 안에 들어가 보려 했는데 실패했으니.”
함장의 말에 부함장은 무척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어느덧 손가락만 해진 북미왕국의 함선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깝군요. 헌데 속도가 엄청 빠르네요. 벌써 저기까지 이동하다니.”
“그러게 말일세. 쩝.”
함장 역시 점점 점이 되어 가는 북미왕국의 함선을 보고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헌데 포로를 몽땅 넘겨도 되는 겁니까?”
이에 함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차피 저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꽤 낭패를 봤을 테니까. 그리고 어차피 수장해버릴 놈들이고. 그럴 바에는 그냥 저들에게 넘기는 게 낫지.”
“저들은 해적을 어디다 쓰려고 데려간답니까? 설마...”
함장은 부함장을 보고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북미왕국은 인신 공양을 하지 않지. 그건 포로로 잡혔던 에스파냐인들도 한결같이 이야기했었고.”
“아. 참. 그들이 있었죠.”
“포로로 잡혀있던 에스파냐인들처럼 탄광에서 평생 노역을 해야 할 거라고 하더군. 그래서 그냥 몽땅 넘겨준걸세. 다만...”
함장이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부함장이 의아한 듯 그를 쳐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해적 놈들이 가혹한 노역을 받는다면 썩 나쁠 것은 없잖습니까?”
“포로들의 말론 저들이 시키는 노역이 꽤 편했다는 소리가 있어서 말일세. 식량도 풍부한지 하얀 밀 빵을 세끼 배불리 먹을 수 있게 제공하고...”
부함장은 함장의 말에 입을 쫙 벌렸다.
노역을 하는 자들에게 하얀 밀 빵을 제공하다니.
“헐...그게 정말입니까?”
“몰랐나? 그 때문에 누에바 에스파냐로 돌아온 에스파냐인들 중 꽤 많은 사람이 다시 북미왕국으로 돌아갔네. 그곳에선 먹고사는 게 전혀 걱정 없다면서.”
그러면서 씁쓸한 미소를 짓는 함장이었고 그런 함장의 말에 부함장은 어느덧 점으로 보이는 북미왕국의 함선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맙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