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김봉길은 새진주에 도착한 이후 잠시 쉬며 오랜 여행의 피로를 푼 뒤 곧바로 조선소로 향했다.
조선소는 꽤 큰 규모였고 들어가자마자 커다란 선박이 보였다.
“오. 저게 이곳 조선소에서 처음으로 건조한 인급 전선인가?”
“그렇습니다. 사령관님.”
김봉길은 2함대 소속의 첫 번째 전선을 보고 중얼거렸다.
“하아...정말 그냥 인급 전선이네.”
김봉길의 어감이 이상해 이정운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맞장구쳤다.
“그렇지요?”
이에 김봉길은 인급 전선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어휴. 저기에 450마력짜리 증기기관을 장착했어야 했는데...”
“아! 하하하.”
그제야 김봉길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가 된 이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쾌속선의 건조 이후 이 450마력 증기기관의 존재를 알고 인급 전선에 장착하길 바라긴 했었기에.
그런 이정운의 귓가에 김봉길이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어휴. 새로운 지급 전선의 건조는 한참 남았으니...당분간은 저게 내 기함이 되겠군.”
이에 이정운은 놀라 눈이 번쩍 떠졌다.
“예? 새로운 지급 전선이요?”
그런 이정운의 반응에 김봉길이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이정운은 2함대의 부사령관이었고 나중에 2함대의 사령관이 될 친구였으니 이 정보를 알아도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기에.
“아? 아. 흐음...뭐 극비까진 아니니까 상관없으려나? 맞다. 새로운 지급 전선을 건조할 계획이지.”
그 말에 이정운은 잔뜩 기대한 눈초리로 김봉길을 바라보면서 내심 더 정보를 풀라는 듯 가까이 붙었다.
“새로운 지급 전선이라니...대체?”
그런 이정운을 보고 쓴웃음을 지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치는 김봉길이었다.
“야. 너무 기대하지 마. 별거 없어. 그냥 인급 전선처럼 지급 전선도 기범선이 아닌 기선으로 만들겠다 이거지. 인급 전선을 조금 확대한 느낌이랄까. 난 차라리 천급 전선을 기범선으로 만들었으면 했는데...쩝.”
김봉길은 새로운 증기기관이 개발된 김에 천급 전선을 기범선으로 만들었으면 했지만, 정성국은 낭비라고 판단했다.
실제로 이정운이 인급 전선 한 척으로 갤리온 3척을 별다른 피해 없이 잡기도 했기에 그보다 윗급인 새로운 지급 전선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김봉길이 그러한 비화를 이야기해주자 이정운은 탄성을 질렀다.
“아!”
그런 반응에 피식 웃은 김봉길이 계속 이야기했다.
“실제 운용해보니 인급 전선의 전투력이 무척 뛰어나잖아? 아무래도 기존의 지급 함선을 당시 상황 때문에 전선으로 개조한 것과는 달리 전투 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설계되기도 했고.”
“그렇긴 하지요.”
인급 전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문에 지급 전선도 인급 전선처럼 새로 설계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전하께서 그러시더라고.”
그 말에 이정운이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생각이 나서 급히 입을 열었다.
“아! 그럼 그 새로운 지급 전선은 450마력 증기기관 2개를 장착하는 겁니까?”
“아니야. 박기동 녀석이 그것보다 더 좋은 증기기관을 개발 중이라면서 믿어달라길래...일단 그걸 장착할 것 같아. 일단 목표는 600마력이라고 하는데...모르지. 다만 목표가 600마력이니 최소한 500마력은 나오지 않겠어?”
심드렁한 표정으로 박기동을 타박하는 김봉길을 보고 이정운은 난처한 표정으로 슬쩍 웃을 뿐이었다.
“아하하.”
발걸음을 옮기자 인급 전선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또 다른 인급 전선이 보렸고 이를 확인한 김봉길이 다시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 저것도 다 건조한 거 아닌가?”
외관으로 봐선 거의 건조가 완료된 것 같았기에 묻는 김봉길을 보고 이정운은 고개를 저었다.
“아! 저건 한 달 후에나 마무리된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살짝 실망했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인급 전선 한 척만으로 버텨야겠구나 싶었던 김봉길은 곧 있으면 다른 한 척이 진수된다는 말에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겨 조선소를 둘러보았다.
“그래도 이 조선소가 생긴 지 얼마 안 되었다고 들었는데 용케 2척씩 건조하는구만.”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생각하는 2함대 규모를 생각하면 한참 부족한 것도 사실이고...”
그렇게 말하며 말을 흐리자 이정운은 다시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혹시 전하께서 따로 언질을 주신 겁니까?”
잔뜩 기대 섞인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정운을 보고 김봉길은 속으로 능력은 있는데 젊긴 젊구나 싶어서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아. 비슷하지. 그리고 내가 이곳에 괜히 온 것은 아니잖은가.”
“아아. 하긴 그렇지요.”
김봉길은 정성국이 가장 신뢰하는 함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기에 1함대 사령관에 임명되었던 것이고.
그런 김봉길이 갑자기 2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자 처음에는 말이 많이 나왔었다.
김봉길이 전하에게 밉보였다는 소리도 있었고.
하지만 1함대 사령관을 공석으로 남겨두자 그만큼 2함대가 중요해 김봉길에게 맡긴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고 김봉길이 2함대를 조직해 새한성을 떠날 때 정성국이 기차역까지 배웅해 주었기에 이는 정설처럼 굳어졌다.
그것을 떠올린 이정운이 수긍하자 김봉길은 목소리를 줄이며 현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2함대는 북미왕국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네. 에스파냐를 제외한 서양의 나라들은 이곳 새진주에 정박해있는 전선들을 통해 북미왕국의 국력을 짐작할 거란 말이지.”
이정운은 잔뜩 긴장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그 때문에라도 2함대는 엄청나게 규모를 키울 수밖에 없어. 아마 1함대와 3함대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함선을 보유하게 될 거다.”
“허어...”
김봉길의 말에 이정운은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런 이정운을 보며 김봉길이 그의 등을 짝 소리 나게 치며 말했다.
“그런 함대의 부사령관이 너고.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잘 배워. 알았냐?”
이에 잔뜩 기합이 들어간 이정운이 외쳤다.
“알겠습니다! 함대 사령관님!”
* * *
“사령관님!”
김봉길은 갑작스럽게 함장실로 들어온 이정운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빨리 밖으로 나와보십시오!”
“음?”
인급 전선이 건조된 후 시범 운행을 할 겸 바다로 나온 김봉길이었다.
특히 이곳은 안전한 해역이 아니다 보니 무장이 없는 수송선의 경우 안전을 위해 바다에 나오지 않았기에 정확한 해도도 없는 상황이었고.
해서 겸사겸사 탐사도 병행해 천천히 산 아구스틴으로 향하는 중이었는데 이정운의 반응에 어리둥절하며 계단을 올라 상부 구조물로 향하자 그의 귓가에 아스라이 포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에 김봉길은 재빨리 움직여 상부 구조물 밖으로 나가 품 안에서 망원경을 꺼내 눈에 가져다 댔다.
“교전 중인 건가?”
“예. 포성이 들려온 것으로 볼 때 그렇게 추정됩니다.”
이정운의 대답을 들으며 망원경으로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이것 봐라? 한쪽은 에스파냐의 선박이고...다른 쪽은 깃발이 없거나 검은 깃발인 것을 보면 해적이란 뜻인데?”
“예. 그렇게 생각됩니다. 어찌할까요?”
“흐음...”
김봉길은 잠시 망원경으로 자세히 살피면서 생각에 잠겼다.
에스파냐의 선박 3척을 500톤급의 갤리온으로 보이는 선박 5척이 가까이 붙어 포격하고 있었다.
물론 수에서 밀릴 뿐이지 에스파냐의 선박은 더 컸고 튼튼해 보였기에 그냥 내버려 두더라도 결국은 에스파냐의 승리로 돌아가지 않을까 싶긴 했지만 피해가 없지는 않을 것 같았다.
‘굳이 에스파냐 놈들을 도와주고 싶지는 않지만...이런 상황에서는 그냥 지나치기도 애매하네. 별수 없나.’
분명 에스파냐와는 전쟁까지 치렀던 사이였고 특히 북미왕국이 유럽 정세와 북아메리카 상황을 제대로 모른다는 것을 이용해 북미왕국을 속이려 들었기에 북미왕국의 고위 관리들은 에스파냐를 썩 좋아하진 않았다.
다만 그런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 현재 새진주의 건설에 필요한 물자가 에스파냐를 통해 들어오는 만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고 판단한 김봉길이 망원경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뭐 개인적으로는 에스파냐 놈들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해적에 공격받는 만큼 도와주긴 해야겠지. 총원 전투 준비하게.”
“알겠습니다.”
* * *
“저건 뭐야? 저거 설마 갤리인가?”
잉글랜드 출신의 해적이 머스켓을 장전하다 말고 중얼거리자 근처에 있던 해적선의 선장이 버럭 소리 질렀다.
“뭐라는 거야! 정신 안 차려! 조금만 더 밀어붙이고 저 값비싼 교역 물품이 잔뜩 실린 저 배만 탈취하면 되는데 너 뭐하냐!”
험악한 기색을 한 선장이 가까이 다가오자 기겁한 해적은 잽싸게 손을 내저으며 한 곳을 가리켰다.
“아니. 선장님! 저기 보십시오! 저기 새롭게 배가 나타나 다가옵니다!”
해적선의 선장은 자신도 모르게 그 해적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비볐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돛이 없는 한 척의 배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기에 중얼거렸다.
“아니 뭔 지중해도 아니고 카리브해에서 갤리라니...저걸 대체 어떻게 끌고 온 거야?”
선장의 말에 처음 선박을 발견한 해적이 고개를 흔들었다.
“갤리로 대서양을 횡단했다고요? 그런 미친놈이 있겠습니까? 이곳에서 만든 거겠죠.”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문제는 이곳에서 저런 선박을 건조할 세력이라면 에스파냐 외엔 없다는 점이다.
물론 에스파냐 놈들이 범선이 아닌 갤리를 건조했다는 것이 조금 의문스러웠지만, 지금은 그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이에 해적선의 선장은 갑판 위에서 소리쳤다.
“으음...그럼 에스파냐 놈들이란 소린데? 젠장! 일단 저 배는 무시하고 호위함에 포격을 퍼부어! 그리고 갑판장!”
“예! 선장님!”
한창 갑판 위의 해적들을 지휘해 머스켓을 장전하던 갑판장이 다가왔다.
“저들이 다가오면 상대할 준비를 하게!”
“알겠습니다! 선장님!”
* * *
“젠장! 감히 에스파냐의 깃발을 사용하다니! 더러운 해적 놈들!”
에스파냐의 함장은 이를 갈며 해적들을 욕했다.
이렇게 근거리 교전이 벌어진 것은 다 저들이 에스파냐의 깃발을 달고 마치 상선처럼 진형을 이루고 천천히 다가왔기 때문이다.
다른 국가의 상선이었다면 꽤 경계했겠지만, 에스파냐의 깃발을 달았기에 자국의 상선이라고 생각해 조금 마음을 놓았었고.
거기에 바람도 저들을 도와주었다.
덕분에 저들은 순식간에 돛을 활짝 펴고 함대에 달라붙어 공격을 시작했고 이러한 난전이 벌어진 것이다.
‘쾅!’
해적선에서 포탄이 날아와 현측에 박히며 충격이 전해지자 갑판 위의 병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잔뜩 움츠러들었다.
이를 보고 에스파냐의 함장이 소리쳤다.
“움츠러들지 마! 빨리 머스킷을 장전하고 해적 놈들에게 쏴라!”
그런 함장의 지휘 덕분에 다시 갑판 위의 병사들은 머스켓을 장전해 가까이 보이는 해적선의 갑판 위를 조준하고 머스켓을 발사했다.
‘타타타타탕!’
그리고 뒤따라 현측의 포문에서 다시 포탄이 쏟아져나왔고.
‘퍼퍼퍼퍼펑!’
포연 덕분에 시야가 가려졌지만, 에스파냐의 함장은 크게 웃었다.
“크하하! 좋았어! 이렇게 계속 발사해! 해적 놈들을 물리치라고!”
그리고 포연이 어느 정도 가시자 망루에 자리 잡고 있던 병사가 소리쳤다.
“함장님! 저 뒤쪽에서 한 선박이 다가옵니다!”
병사의 외침에 에스파냐의 함장이 표정을 확 구겼다.
해적의 증원으로 생각한 탓이다.
“젠장! 설마 저들의 증원인가? 한 척뿐인가? 다른 배는 없고?”
“예! 한 척이고! 그리고! 돛이 없는 배입니다!”
병사의 대답에 함장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뭐? 돛이 없다니 그게 무슨...어? 설마?!”
처음에야 그게 무슨 소린가 했지만 생각해보니 북미왕국의 배 중에는 돛이 없는 선박이 존재했다.
실제 저들의 포로로 잡혔던 에스파냐인들은 마법으로 움직이는 배라고 부르는.
갑자기 왜 이곳에 북미왕국의 배가 나타났나 싶었지만 당장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현재 에스파냐와 북미왕국 사이는 나쁘지 않았고 그들이 멕시코만에 새로운 항구를 만드는데 에스파냐가 물자를 운송해주고 있었다.
거기에 산 아구스틴도 에스파냐의 병사들이 북미왕국을 대신해 지켜주고 있었고.
그런 만큼 정말 북미왕국의 배라면 자신들을 도와 해적들을 공격할 거로 생각한 에스파냐의 함장은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북미왕국의 배다! 지원군이다! 지원군이 왔다! 그러니 조금만 더 버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