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조용한 곰이 갑자기 정성국의 집무실을 찾아오자 정성국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음? 무슨 일 있나?”
이에 조용한 곰은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음...이번에 행정청에서 일하던 아이누인들이 모두 귀환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아. 내가 그런 명령을 내렸지. 헌데 왜?”
“그 때문에 한 아이누인이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다면서 접견을 신청했습니다. 해서...”
조용한 곰이 말을 흐리자 정성국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 할 말이 있다라...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니 일단 불러오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정성국이 흔쾌히 승낙하자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은 조용한 곰이 급히 집무실을 나갔다.
아무래도 접견을 신청한 아이누인과 함께 온 듯싶었다.
잠시 후 집무실의 문이 다시 열리며 조용한 곰과 함께 한 아이누인이 들어왔다.
의외라면 조용한 곰 뒤에서 조심스럽게 집무실로 들어오는 아이누인이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다는 점이다.
정성국은 이 아이누인 여성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음? 아이누인 여성인데도 문신이 없네? 꽤 조숙해 보이는데 아직 어린 건가? 호오...이렇게 깨끗한 얼굴을 보니 약간 이국적이긴 해도 꽤 예쁘네. 저런 얼굴에 그런 문신을 하다니 참...그렇다고 저들의 풍습인데 강제로 막을 수도 없고.’
문화마다 선호하는 여성상이 달랐고 특이하게도 아이누인들은 입술 주변이 시꺼메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인지 아이누인 여성들은 성인이 되면 얼굴에 문신을 했고.
아이누인들에게서 내려오는 전설 때문에 이러한 풍습이 생겼는데 문제라면 이 문신을 하면 마치 전생의 조커의 모습과 무척 흡사했기에 꽤 기괴하고 무서웠다.
그 때문에 처음 아이누인 여성의 모습을 본 정성국과 선원들은 몹시 놀라기도 했었고 말이다.
그렇게 정성국이 잠시 생각에 잠겼을 때 가까이 다가온 아이누인 여성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하. 아이시노라고 합니다.”
아이누인 여성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린 정성국은 왠지 익숙한 이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음...?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정성국의 중얼거림에 아이시노 옆에 서 있던 조용한 곰이 슬쩍 아이시노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아이시노는 샤쿠샤인님의 딸입니다. 그리고 행정청에서도 가장 좋은 평가를 받곤 했지요. 아마 그래서 익숙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조용한 곰의 설명에 정성국은 손뼉을 쳤다.
“아? 아아! 그렇구나! 어쩐지 들어봤다 했더니...가끔 보고서에 언급되었던 그 친구로군.”
부족장들의 자제들로 이루어진 이 아이누인 무리에서 가장 두각을 보인 사람이 바로 정성국의 눈앞의 아이시노였다.
그렇기에 정성국도 보고서를 통해, 그리고 가끔 행정청장에게 그녀의 이름을 종종 들었고.
‘이거 아이누인들의 경우 이름만으로 남성인지 여성인지를 알 수가 없으니...쩝. 그보다 행정청장이 가끔 샤쿠샤인의 자식이 뛰어나다고 언급하길래 아들인 줄 알았더니 딸이었네. 헌데 샤쿠샤인의 아들도 함께 왔다고 들었는데?’
정성국이 아이시노를 보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아이시노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소녀의 이름을 기억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이에 아이시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성국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접견을 신청한 이유를 물었다.
“그래. 할 말이 있다면서?”
“이번에 모든 아이누인들이 아이누 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지금껏 이곳에서 행정 일을 배웠으니 이제 너희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고향을 발전시키는 데 일조했으면 해서 말이다.”
정성국의 말에 아이시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분명 저희의 고향을 발전시키는데 이곳에서 배운 것이 무척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곳에 남아서도 고향을 발전시켜나가는 것을 뒤에서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하.”
“음? 그 소리는...이곳에 남고 싶다는 이야기냐?”
아이시노의 말에 정성국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고 아이시노는 다시금 슬쩍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전하.”
이에 정성국은 살짝 생각에 잠겼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흐음...뭐 아이누인들 역시 북미왕국의 백성인 만큼 딱히 차별할 마음은 없다. 그러니 원한다면 딱히 막을 생각은 없다만...이곳에 남고 싶어 하는 아이누인들이 많으냐?”
굳이 이곳에 남고 싶다는데 이를 강제하고 싶진 않아 허락하면서도 그 수가 많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묻는 정성국을 보고 아이시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남는 것은 오직 저 하나뿐입니다.”
“음?”
아이시노는 살짝 당황해 자신을 바라보는 정성국의 두 눈을 마주 보고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으며 선언하듯 이야기했다.
“제가 이곳에 남아 아이누인들을 위해 이 한 몸을 다 바칠 생각입니다.”
“어...?”
정성국은 아이시노의 말에 살짝 당황해 그 옆에 있는 조용한 곰을 바라보았지만, 그 역시 무척 당황스러운 눈치라 다시 시선을 돌려 아이시노를 바라보았다.
이에 아이시노는 정성국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오히려 더욱 미소를 환하게 지었고.
‘어째...어감도 그렇고 분위기도 그렇고 내가 생각하는 게 맞나? 아니겠지? 문신 없는 거 보면 아직 애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한 정성국이 슬쩍 헛기침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크흠...북미왕국을 위해 분골쇄신하겠다는 마음은 참으로 고맙긴 한데...이곳에 남아봐야 지금처럼 행정청에서 일하는 것이 다일 텐데 아이누인들에게 정말 도움이 될까? 차라리 다른 아이누인들처럼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떤가? 그리고 아직 어린 것 같은데 샤쿠샤인도 걱정할 테고.”
정성국의 말에도 아이시노는 슬쩍 자신감을 드러냈다.
“오히려 이곳에서 일해야 더 높은 자리까지 오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보면 언젠가 전하의 곁에서 전하를 보필하며 아이누인들을 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버님껜 헤어질 때 이미 말씀드렸고 아버님께서도 허락하셨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이에 조용한 곰은 슬쩍 웃었지만, 정성국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음. 알겠네. 그럼 북미왕국을 위해 노력해주게.”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인지 순순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조심스럽게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아이시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성국과 조용한 곰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집무실을 나가고 문이 닫히자 조용한 곰이 슬쩍 입을 열었다.
“꽤 당돌하고 자신만만한 여성이로군요.”
“끙...”
정성국이 곤란한 표정을 짓자 조용한 곰이 짓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이거 왕실의 번창을 경하드려야 합니까?”
이에 정성국은 손사래를 쳤다.
“어휴. 그런 소리 말게. 얼굴을 보아하니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소녀일 텐데.”
“흐음...?”
* * *
“전하. 제가 가면 안 되겠습니까?”
정성국은 아침부터 집무실로 찾아와 하소연하는 김봉길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어허...1함대 사령관이 이곳을 지켜야지 대체 어딜 간다는 건가?”
“끙...”
6월이 되고 슬슬 무더워지기 시작할 무렵 새진주에서 인급 전선이 거의 건조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작년 가을에 이곳에서 조선 장인들이 출발한 것을 생각하면 무척 늦게 건조된 셈이지만 일꾼들의 숙련도 문제로 인해 바로 인급 전선의 건조에 들어가기보단 일단은 일반 선박을 건조하며 주변 원주민을 일꾼으로 고용해 훈련했기에 건조 자체가 조금 늦어졌다.
아무튼, 이러한 보고가 올라온 후 정성국은 즉시 군사청장을 불러 2함대를 창설할 뜻을 밝혔고 군사청장 역시 동의하며 김봉길에게 이를 알려 1함대 소속의 함장과 병사 일부를 차출하겠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다음 날 김봉길이 아침부터 찾아왔길래 정성국은 김봉길이 자신의 부하들을 빼가는 것이 아쉬워서 그러나보다 했는데 도리어 자신이 2함대로 가고 싶다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정성국은 시무룩한 얼굴의 김봉길을 보면서 혀를 차다가 의아한 생각이 들어 물었다.
“쯧쯧...자네도 1함대 사령관이 되었을 때 무척 좋아하지 않았나? 헌데 대체 왜 갑자기 2함대 사령관 자리를 원하는 건가?”
정성국이 묻자 김봉길은 뒷머리를 잠시 긁적이며 정성국의 눈치를 살피다가 정성국의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솔직히 말씀드리면 1함대에서는 전투할 일은 더는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김봉길을 바라보았다.
“해전을 치르고 싶은 건가?? 아니면 공을 세우고 싶은 건가?”
“하하하. 뭐 둘 다죠. 거기에 심심하기도 하고.”
“흐음...”
분명 김봉길의 생각도 틀리지 않았기에 정성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김봉길의 말처럼 1함대가 담당하는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은 무척 낮았다.
이미 북미왕국의 해군에 호되게 당한 에스파냐가 다시 북미왕국을 공격할 일도 없었고.
에스파냐를 제외하면 1함대가 담당하는 지역인 북미 서해안을 공격하려면 태평양을 넘거나 남미를 돌아와야 하는데 그게 어디 쉽겠는가.
그런 만큼 1함대는 실전과는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현재는 순찰하는 일이 전부였다.
그 때문에 1함대가 비록 북미왕국의 수도를 방어하는 근위 함대나 다름이 없음에도 당분간은 여러 지원에서도 밀릴 수밖에 없었고.
아이누 섬에 자리한 3함대의 경우는 바로 밑에 막부가 존재하는 만큼 만약을 대비해 전선을 늘려야 했고, 이번에 새진주에 창설될 2함대의 경우도 훗날을 생각하면 당분간은 집중적인 지원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1함대의 지원은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상황을 다 짐작하면서도 그동안은 별다른 불만 없이 1함대를 조직하고 제대로 된 체계를 만든 김봉길이 편한 일을 마다하고 당분간 고생할 것이 분명한 2함대를 맡겠다며 찾아왔으니 정성국은 오히려 고마운 마음이 들어 김봉길을 바라보면서 흐뭇하게 웃다가 결정을 내렸다.
비록 1함대가 근위 함대의 성격을 띠고 있는 만큼 사령관의 인선이 무척이나 중요했고 이 때문에 1함대의 사령관에 믿을 수 있는 김봉길을 임명하긴 했지만, 김봉길의 능력을 생각하면 이렇게 후방에 두는 것이 조금 아까운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2함대의 경우 멕시코만에서 대서양까지 담당해야 하는 만큼 서양의 해적들과 싸울 확률도 높았고 당분간은 전선의 숫자가 부족한 만큼 사령관의 역량이 무엇보다 중요했기에 사령관의 인선에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으니.
김봉길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이에 정성국은 김봉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딱 3년 주겠네.”
정성국의 선언에 김봉길이 반색했다.
자신이 1함대 사령관이 된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김봉길이었다.
1함대는 근위 함대의 역할을 하는 만큼 정성국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인물이 사령관을 맡아야 했다.
그렇기에 기꺼이 1함대를 맡았지만, 후방이라 근해에서 순찰만 하다 보니 심심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때 군사청장에게 2함대 창설 소식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2함대가 담당하는 지역을 고려해보면 무엇보다 사령관이 중요한데 함대 사령관을 맡을 인사가 마땅히 없어 보인다는 것을 떠올리고 혹시나 해서 찾아왔던 것인데 정성국이 이를 승낙했으니.
“오! 감사합니다! 전하!”
그런 김봉길을 보고 여전하구나 싶어 피식 웃은 정성국은 집무실 책상 위에 있던 서류 하나를 김봉길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자네를 2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할 테니 새진주에 가서 2함대를 잘 조직하고...이 친구를 잘 가르쳐두게. 자네만 공을 세우지 말고 이 친구에게도 적당히 기회를 나눠주라고.”
김봉길은 정성국이 던져준 서류를 살펴보았다.
서류에는 에스파냐 공격을 결의하는데 직접적인 원인이 된 에스파냐 교역 선단을 인급 전선 한 척으로 별다른 피해 없이 승리했던 이정운 함장의 공적과 평가, 근무 기록 등이 적혀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정운 함장이라...이 친구 괜찮죠. 능력도 있고. 공적도 있고. 거기에 에스파냐 원정 당시 소규모 함대를 지휘해본 경험도 있으니. 헌데 이 친구를 2함대의 사령관으로 생각하셨던 겁니까?”
이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 친구가 2함대 사령관이 되었겠지. 뭐 자네 덕분에 2함대 부사령관이 된 셈이고. 다만 잘 되었네. 다른 선장들에 비해 어린 편이다 보니 바로 함대 사령관을 맡기기엔 조금 부담스러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자네가 가교역할을 해주면 될 듯하네.”
현재 함장들은 다들 비슷한 수준이다 보니 그나마 실전을 제대로 경험해보고 함대 지휘 경험도 있는 이정운을 2함대 사령관으로 낙점했지만 2함대가 담당하는 지역의 중요성을 생각해보면 불안한 것도 사실이라 계속 고민 중이었다.
허나 김봉길이라면 충분히 믿을 수 있었기에 이를 언급하자 김봉길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 맡겨주십시오. 저도 적당히 재미를 보고 이 친구도 잘 키워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