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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175화 (175/850)

175화

“쾌속선이 도착했다면서요? 본국에서 온 연락은 없었습니까?”

개척촌에서 아이누 섬에 막 도착한 원상의 행수는 곧바로 포로나이 항 선착장 인근의 한 건물로 들어갔다.

시기를 생각하면 슬슬 본국에서 출발한 쾌속선이 도착했을 시기였기에 혹시 본국에서 연락이 왔나 싶어서 현재 쾌속선을 관리하고 운용하는 3함대 사령부가 위치한 건물로 향한 것이다.

마침 3함대 사령부에는 3함대 사령관인 박헌수가 자리하고 있었고 급히 사령부에 들어와 외치는 원상의 행수를 보며 웃으며 그를 반겼다.

“오셨는가? 당연히 있네.”

“아...함대 사령관님. 이곳에 계셨군요.”

원상의 행수는 박헌수를 보고 인사하자 박헌수는 휘적휘적 걸어가며 행수를 향해 손짓했다.

“일단 따라오게. 본국에서 온 명령서 중에는 전하께서 직접 친필로 작성한 편지가 있어서 사령관실에 고이 모셔두었으니.”

“예? 헉! 알겠습니다.”

정성국이 직접 쓴 편지라는 소식에 기겁한 원상의 행수는 급히 박헌수의 뒤를 따르면서도 궁금증을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수많은 명령이 본국에서 내려졌지만, 정성국이 직접 작성한 편지를 받기는 또 처음이었으니 무슨 일인가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박헌수의 사령관실로 들어온 원상의 행수는 잠시 기다렸고 박헌수는 사령관실 한쪽에 마련된 금고를 열고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하나의 편지를 꺼내 원상의 행수에게 넘겨주었다.

행수는 무척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편지를 살펴보았다.

편지의 겉면에는 왕실의 문양인 독수리 문양이 찍혀 밀봉되어 있었고 그 위에 원상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에 행수는 잠시 고민했다.

자신이 이곳에서 이 편지를 개봉해야 할지 아니면 원상의 대방 어르신에게 전달해야 할지 고민한 것이다.

그런 원상의 행수를 본 박헌수가 슬쩍 입을 열었다.

“어차피 그동안 행수가 이곳에서 명령을 확인하지 않았나? 그러니 고민하지 말고 그냥 개봉하게.”

하지만 행수는 잠시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으음...허나 전하께서 처음으로 직접 친필로 작성한 명령서다 보니...대방 어르신께 전달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이에 박헌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 편지가 대방이 직접 개봉해야 할 편지였다면 겉면에 그리 쓰여 있었겠지.”

“그렇긴 하지요. 후우.”

행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정성국이 존재하는 동쪽을 향해 한번 고개를 숙였다.

북미왕국에는 이러한 예법이 결코 없었지만, 처음으로 이러한 편지를 받아 당황한 행수가 무의식중에 예의를 차리기 위해 벌인 행동이었다.

그것을 목격한 박헌수는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원상의 행수는 고개를 든 후 조심스럽게 밀봉을 풀고 안쪽의 편지를 꺼내 읽어보았다.

그리고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으음...개척촌에 넓은 공터를 확보하고...비바람을 피할 천막을 최대한 많이 준비해두라니...”

“어? 잠깐만.”

행수가 중얼거리는 말을 확인한 박헌수가 당황한 표정으로 다시 금고에 다가가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쪽에서 편지를 하나 꺼내 들었다.

“어라...여기 있는 것을 보면 잘못 전해준 것은 아닌 모양인데...하긴 밀봉이 되어있긴 했었지.”

그런 박헌수의 행동의 원상의 행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령관님? 왜 그러십니까?”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박헌수가 손에 들고 있는 편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이곳에도 같은 명령이 내려와서 말이네. 넓은 공터를 확보하고 비바람을 피할 천막을 준비하거나 건물을 지어두라고...”

“그렇습니까?”

“그리고 올해 본국에서 보내주는 식량은 최대한 저장을 하라는 명령도 내려왔고 말일세.”

그러한 박헌수의 말에 행수는 들고 있던 편지를 빠르게 살펴보다가 외쳤다.

“아! 여기에도 그런 내용이 있네요. 음...갑자기 왜 이런 명령을 내리신 걸까요? 그것도 전하께서 직접 이렇게 친필로 작성하신 것을 보면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뜻일 텐데...”

이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 박헌수가 들고 있던 편지를 다시 금고에 조심스럽게 넣은 후 입을 열었다.

“글쎄...나도 잘은 모르겠네. 다만 식량을 최대한 저장해두라는 명령은 조금 당혹스럽긴 했지. 지금도 식량이 넘쳐나고 있고 재작년 쌀은 슬슬 상할까 봐 모두 꺼내 술을 빚는 형편이니까.”

분명 장기보관을 위해 적당히 햇볕에 건조해두긴 했지만 그렇다고 쌀을 몇 년씩이나 보관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재작년에 들여온 쌀 중 남은 쌀은 모두 꺼내 술을 빚는데 사용하는 중이었고.

헌데 식량을 최대한 저장해두라는 명령이 내려오니 조금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박헌수였다.

이에 원상의 행수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그건 원상의 창고에 저장된 식량도 비슷한 상황이라...재작년 쌀은 값싸게 처분 중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나마 이곳 아이누 섬으로 보내진 식량의 경우는 아이누인들이 꽤 많은 양을 소모하기라도 했지 조선에 보내진 식량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그나마 조선의 경우 식량을 화폐로 사용할 수 있는 만큼 창고를 짓거나 땅을 사는 일에 이 식량을 사용하긴 했지만, 그 이후론 딱히 식량이 소모될 일이 없어 꽤 많은 양이 남아있었다.

이 때문에 이번 춘궁기에 이 쌀을 백성들에게 값싸게 풀고 있었는데 이러한 명령이 내려오자 난감한 표정을 짓는 원상의 행수였다.

이에 박헌수는 잠시 편지를 바라보며 고민하다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차피 내버려 두면 썩을 식량은 빨리 치우는 것이 맞고...올해에도 본국에서 식량이 전해질 테니 이 식량을 작년 쌀과 함께 보관하면 되기는 하겠지.”

아무리 정성국이 식량을 최대한 보관하라고 한들 그 식량이 썩어가는데 이를 보관할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행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요.”

“다만 가뜩이나 매년 보내지는 식량을 소모하지 못해 남는 판국에 굳이 전하께서 이렇게 직접 친필 서한으로 명령을 내릴 정도면 무언가가 있긴 있는 모양인데...그게 무엇인지 짐작하기 어렵군.”

박헌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긴 원상의 행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던지 입을 열었다.

“흐음...아마 막부와 소통할 생각이 아닐까요?”

“어?”

“막부와 교류한다고 한들 북미왕국에서 팔만한 것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도자기나 모피를 팔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모피의 경우 북경이나 서양 상인들에게 비싸게 팔면 그만이었고 도자기의 경우는 서양에 넘길 물량을 제작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런 만큼 막부와 교류를 시작한다고 해도 마땅히 교역할만한 품목이 없었는데 식량은 가능해 보였다.

그나마 이곳에서 머물며 막부의 사정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던 박헌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하긴...그 외에 팔만한 것이 넘쳐나는 식량이긴 하지. 다만 그럴 바엔 이곳과 개척촌에만 창고를 건설해 식량을 저장하면 되는 것 아닌가? 굳이 조선 팔도에 식량을 분산해 저장할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

이에 원상의 행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이곳이야 조선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으니 커다란 창고를 다수 건설했지만...개척촌에서야 어디 가능하겠습니까?”

“아...하긴 그것도 그렇군. 다만 그럴 바에는 경상도에 집중적으로 창고를 건설하는 게 더 나았을 텐데...”

박헌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행수는 슬쩍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뭐 전하의 성품이라면 지금처럼 쌀을 춘궁기에 싸게 풀어 조선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게 하는 것도 염두에 두셨겠지요.”

“하긴...그것도 그렇겠지. 쯧. 사창이라도 운용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일세.”

사창은 재앙이나 흉년을 대비해 미리 지역 사람들로부터 곡식을 징수 또는 기증받아 저장해두는 촌락 단위의 구휼제도로 의창과 동일했다.

다만 의창은 관리가 직접 운용하는 만큼 여러 폐단이 발생해 이를 민간에서 운용하는 사창으로 극복하려 했던 것이고.

사창은 의창과는 달리 사민의 공동 저축으로 상부상조하며 연대책임으로 자치적 운영을 하는 것이었기에 사민들에게 큰 혜택을 주었다.

다만 기존의 고리대가 5할의 이자를 받던 것에 비해 사창의 이자는 2할을 원칙으로 삼았기에 고리대를 통해 재미를 보던 부호들이 사창이 설치되는 것을 반대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사창의 원곡이 관리 소홀과 고리 문제가 발생하게 되자 다시 사창 반대론이 불거졌고 결국 사창은 폐지되었고.

이러한 사창을 박헌수가 언급하자 원상의 행수는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어이쿠. 그랬다간 고리대로 재미를 보는 지방의 힘 있는 양반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아무리 원상이 서인들과 친하다 한들 그건 어렵습니다.”

박헌수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나도 알지. 그냥 아쉬워서 한 이야기일세.”

그러한 박헌수의 말에 원상의 행수 역시 내심 씁쓸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주제를 돌렸다.

괜히 여기서 이야기를 더 진행해봐야 분위기만 가라앉을 테니 말이다.

“헌데 막부와의 교류라...혹시 투로시노님께는 무언가 언질이라도 주셨던 걸까요?”

행수의 주제 변경이 적절했는지 씁쓸해하던 박헌수는 그 말에 바로 생각에 잠기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흐음...투로시노에겐 별다른 말을 듣지 못했는데...나중에 확인해봐야겠군.”

“투로시노님은 지금 이곳에 안 계십니까?”

이에 박헌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 넘쳐나는 식량을 가득 실은 배와 함께 주변 섬들을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지.”

“하하하. 그렇군요. 그럼 성과가 좀 있습니까?”

“물론이네. 그동안은 이곳까지 조그마한 배를 타고 와서 거래를 진행해야 했지만, 북미왕국에 합류한다면 정기적으로 북미왕국의 상선이 섬을 들른다는 말과 더욱 싸게 식량을 살 수 있다는 말에 여러 원주민 부족이 북미왕국에 합류했네. 덕분에 벌써 홋카이도 동쪽의 가까운 섬 몇 곳과 아이누 섬의 북쪽 지역 일부도 이젠 북미왕국이 장악했다고 봐도 될 테고.”

홋카이도를 기준으로 북쪽 지역을 에조라 칭했고 이 에조 지역 전체를 아이누 부족 연합의 영역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아이누 부족 연합이 북미왕국에 합류한 이상 에조 지역 전체가 북미왕국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실질적으로 북미왕국이 장악한 땅은 아이누 섬 남쪽 일부와 홋카이도뿐이었다.

그렇기에 작년에 이곳에 외무청 관리들과 함께 도착한 투로시노는 열심히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원주민들을 설득하기 시작했고.

이들과 거래하기 시작하면서 사정이 나아지게 된 원주민들은 큰 반발 없이 하나둘 북미왕국으로 합류하기 시작했다.

“하하하. 대단하군요. 투로시노님 덕분에 점점 북미왕국의 영역이 넓어지는군요.”

이에 박헌수가 빙긋 웃었다.

“그게 다 전하의 홍복 아니겠나.”

* * *

“부르셨습니까. 전하.”

“아. 왔는가.”

정성국은 집무실을 방문한 행정청장을 반기며 잠시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눴다.

그리고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 커피잔을 내려놓고 행정청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이누인들의 교육은 어떻게 되어가나?”

예전 아이누 부족 연합이 북미왕국에 합류하면서 샤쿠샤인과 투로시노와 함께 북미왕국을 방문했던 부족장들의 자제들은 이곳에 남아 행정청에 배속되어 단기 교육을 받은 후 곳곳에 배치되어 실무를 익히고 있었다.

그리고 2년이 흘렀고 더는 아이누 섬을 비롯한 서쪽 지역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기에 이를 묻는 정성국이었다.

“뭐...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가르치고 나니 어느 정도 제구실은 하더군요. 헌데 그들의 왜...”

행정청장의 답변에 만족한 정성국은 웃으며 대답했다.

“왜긴? 슬슬 돌려보내야지. 언제까지 아이누인들이 사는 지역을 저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슬슬 이주 선단들이 도착할 시기이니 그들을 돌려보낼 준비를 하도록 하게.”

정성국의 말에 행정청장은 살짝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제야 좀 쓸만해 졌는데...쩝. 상황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알겠습니다. 전하.”

“아직도 행정청의 인력이 많이 부족한 건가?”

“관리의 수가 늘어나는 것보다 북미왕국의 영역이 확장되는 것이 더 빠르니 말입니다. 그리고 슬슬 새진주를 통해 플로리다 지역으로 진출해야 하니...”

그러면서 열심히 하소연하는 행정청장의 말을 듣던 정성국은 혀를 차며 안타까워하면서도 방법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쩝...그렇긴 하지. 하지만 어쩌겠나. 꽤 오랫동안 고생해야겠지.”

이에 행정청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음...전하? 보통 이럴 때는 당분간만 고생하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행정청장을 보고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 인력난이 단기간에 해소될 문제는 아니잖나.”

“끙...그건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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