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정성국이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을 때 집무실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호위대장과 그 뒤에 호위대원이 수많은 보고서를 한 아름 가득 품고 정성국에게 다가왔다.
이를 보고 정성국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음? 아. 새남포에 쾌속선이 도착했다더니 설마?”
“그렇습니다. 전하. 아이누 섬에서 올라온 보고서들입니다.”
“휘유. 많군.”
작년에 쾌속선 4척이 건조되어 꾸준하게 운용되며 아이누 섬과 새남포에 연락망을 구축해두었다.
다만 쾌속선이라고 한들 북방항로를 이용하는 것은 마찬가지였고 그 때문에 바다가 얼어붙기 시작하는 겨울에는 아이누 섬과의 연락이 끊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새한성으로 보내야 하는 보고서들이 아이누섬에 겨우내 차곡차곡 쌓여있다가 날씨가 따뜻해지며 얼어붙었던 바닷길이 열리자 처음으로 바다를 횡단한 쾌속선에 의해 전해진 것이다.
“알겠네. 보고서들은 거기에 두고 가고...관리청장을 불러오게.”
“알겠습니다. 전하.”
정성국의 말에 호위대장이 손짓하자 호위대원들이 조심스럽게 집무실 한쪽의 탁자에 보고서들을 내려놓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집무실을 나가자 정성국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 한편에 있던 창가에 서서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벌써 1669년이라니...슬슬 개척촌과 아이누 섬에 연락을 해둬야겠군.”
정성국은 내년에 일어날 경신 대기근을 떠올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경신 대기근은 경신년에 일어난 대기근이 아닌 1670년 경술년과 1671년 신해년 사이에 벌어진 대기근을 두 해의 앞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즉 2년에 걸쳐 기상이변이 발생하며 농사를 망쳤기에 어마어마한 식량난이 발생해 벌어진 참사였다.
그런 만큼 식량만 충분하다면 경신 대기근의 참사를 막거나 혹은 막지는 못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동안 식량 생산과 비축에 그렇게 열을 올렸었다.
더불어 새로운 구황 작물들을 원상을 통해 조선 팔도에 널리 퍼트렸고.
물론 기상이변 때문에 과연 이 구황 작물들이 제대로 역할을 할까 싶기는 했지만, 식량난에 아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는 있었다.
만약 경신 대기근 때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분명 조선 백성들에게 도움이 될 테니.
그리고 원상을 통해 조선 팔도의 거점에 창고를 지어두었다.
그러니 이제 원상에 연락해 창고를 식량으로 가득 채우고 내년까지는 함부로 식량을 반출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면 정성국이 현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다 취한 셈이었다.
물론 조선 팔도에 지어둔 창고를 가득 채운다고 한들 대기근이 닥쳤을 때 이곳의 식량으로 대기근을 버텨낼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조금이나마 상황을 나아지게 할 정도에 불과했다.
만약 북미왕국 내에 존재하는 모든 식량을 조선으로 옮긴다면 경신 대기근을 별다른 타격 없이 이겨낼 수도 있어 보였지만 어쩌겠는가.
배로 옮길 수 있는 적재량은 한계가 존재하는 만큼.
이에 정성국은 창밖의 아름다운 궁궐 안 정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비록 최선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전생보다 피해가 줄어든다면 그것으로 의미는 있는 거겠지. 그리고 이 식량을 제공하고 일부는 북미왕국으로 이주시킨다면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도 있을 테고...만약을 위해 다른 준비도 좀 해둘까? 그래야겠군.”
정성국은 다시 집무실 의자에 앉아 아이누 섬과 개척촌으로 보내는 명령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 * *
“부르셨습니까. 전하.”
“아. 왔군. 앉게.”
정성국은 집무실로 들어온 관리청장을 반기며 집무실 한쪽의 티테이블에 앉혔다.
그리고 미리 내려둔 커피를 따라주자 관리청장은 반색했다.
“오. 전하께서 직접 내리신 커피입니까. 영광입니다.”
관리청장은 커피의 그윽한 향을 맡으며 미소지었다.
정성국의 권유 때문에 어느덧 청장 대부분은 커피를 즐겨 마시는 편이었기에.
그런 관리청장의 반응에 정성국은 슬쩍 웃었다.
“영광은 무슨...전에 찻집에 내리는 커피를 마셔보았는데 맛은 비슷하더만...”
이에 관리청장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왕조 국가인 만큼 왕이 직접 내려준 물건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영광스럽긴 했지만, 그것을 떠나 관리청장은 실제로 정성국이 이렇게 간간이 직접 내려주는 커피가 훨씬 맛있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전하께서 직접 내리신 커피는 찻집의 커피와는 달리 뭔가 다른 향과 깊은 맛이 느껴집니다.”
“아부는 그만하게. 이 사람아. 그보다 북미왕국의 창고에 저장되어있는 식량은 얼마나 되는가?”
관리청장의 진지한 말에도 정성국은 혀를 차며 그를 타박하고 질문을 던졌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관리청장은 잠시 커피를 마시면서 머릿속에서 계산해보다가 답을 꺼냈다.
“음...한 200만석 정도 될 겁니다.”
이에 정성국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짐작했던 것보다 비축되어있는 식량이 적었기에 혹시 그가 모르는 사이 식량을 따로 사용했나 싶어 급히 질문을 던졌다.
“어? 생각보다 적은데? 그거 밖에 안 된다고?”
정성국의 말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관리청장은 그제야 자신의 대답에 빠진 부분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덧붙였다.
“예? 아. 쌀만 200만석 정도라는 겁니다. 밀도 그 정도 되고요. 보리나 감자나 이런 건 뭐...아.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북미왕국의 창고에 저장된 식량만 이야기한 겁니다. 전하의 명령으로 인해 재작년부터 아이누 섬과 조선 곳곳으로 보낸 식량은 논외로 했을 때 말입니다. 아이누 섬과 조선에 보내진 쌀만 해도 60만석 정도는 될 겁니다.”
관리청장의 말에 정성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대충 짐작하던 식량의 양과 비슷했기에.
“아...어쩐지. 그럼 식량 여유분은 얼마나 되나?”
분명 창고에 그만한 식량이 존재하긴 했지만 실제로 소모되는 식량의 양도 꽤 많았다.
특히 외무청에서 원주민들을 포섭하는 방법이 바로 이 식량을 넉넉하게 퍼주는 방법이었으니.
그리고 멕시코 원주민들도 돈 대신 이 식량으로 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었고 에스파냐와 물자 교환도 꽤 손해를 보며 진행하고 있었다.
또한, 최근 텍사스 지역에 원주민 대부분이 북미왕국에 합류한 만큼 그들을 지원하는데도 꽤 많은 식량이 소모될 수밖에 없었기에 잠시 머릿속에서 계산하던 관리청장이 입을 열었다.
“음...쌀 100만석 정도와 밀 100만석 정도일까요? 헌데 왜 그러십니까?”
그동안 식량 비축에 열을 올리던 정성국이었지만 이렇게 따로 불러 식량 상황을 꼬치꼬치 확인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관리청장의 반응에 정성국은 손을 내저으며 둘러댔다.
“아. 별일 아닐세. 지금까지야 항상 풍년이었네만...혹시라도 흉년이 들면 저장된 식량으로 버텨야 할 테니 물어본 것뿐일세.”
정성국의 말에 관리청장은 원칙적으로는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의문을 지우지 못했다.
이 북미대륙은 워낙 비옥하고 풍족한 땅이라 과연 흉년이 들까 싶었달까.
거기에 조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북미왕국의 영역은 급격히 늘어나고 있고 곳곳을 개발하고 있으니 어느 한 곳에서 작황이 좋지 못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다만 국가를 운영하는 입장이라면 만약을 대비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 관리청장은 애써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흐음. 그렇긴 하군요. 만약을 대비하는 것도 나쁠 것은 없겠죠.”
그러면서도 약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관리청장을 정성국은 애써 모른 척하고 입을 열었다.
“그렇지. 그럼 창고는 지금 거의 꽉 차 있는 상황이지?”
“그렇습니다. 전하. 새마포 인근에 대규모로 건설된 창고는 다 차 있는 상태고 새한강 유역을 따라 곳곳에 건설된 창고 역시 거의 차 있는 상태입니다.”
관리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이 슬쩍 입을 열었다.
“음...그럼 창고를 더 증설했으면 하는데 어떤가?”
이에 관리청장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창고를 더 증설할 예정이긴 합니다.”
“아? 그래?”
남는 식량을 저장할 창고를 지을 바엔 차라리 술을 빚어 파는 것이 낫다고 이야기하던 관리청장이 순순히 동의하자 무척 의외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정성국이었다.
이에 관리청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예. 이번에 새한성에서 새나주까지 철도가 개통되었고 행정청에서 철도 곳곳에 건설된 조그마한 정차역을 중심으로 마을을 건설할 예정이지 않습니까.”
“아. 그렇지.”
새한성에서 새나주까지는 430km가 넘는 꽤 먼 거리였기에 당연히 중간중간에 조그마한 정차역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새김포와 새한성을 잇는 새한강 주변을 집중적으로 개발했던 북미왕국은 이제 철도를 따라 곳곳에 세워진 정차역을 거점으로 개발하기로 올해 초 신년회의에서 결정했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정성국이었다.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관리청장이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예. 그리고 이에 맞추어 기존의 새한강 유역을 중점적으로 개간해나가던 개발청에서도 이젠 철도를 따라 내륙을 개간하겠다고 하니 그곳이 개간되면 나오는 식량을 저장할 창고가 필요할 것 같아 철도를 따라 중점적으로 창고를 증설할 예정이었습니다.”
“아...그렇군. 헌데 그곳을 개간하고 거기에서 식량이 나오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
정성국의 짐작은 타당했다.
북미왕국이 비록 철도를 따라 캘리포니아 중앙 평원을 개발하기로 했지만, 이는 그동안 새한성 유역을 개발하던 개척단 인력을 옮기는 정도에 불과했으니 아무래도 단기간에 이 땅을 개간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탓이다.
하지만 관리청장은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제대로 개간하려면야 시간이야 걸리겠지만...아마 올해 가을에는 철도를 따라 새로 개간되는 지역에서도 꽤 많은 식량이 수확될 거라고 봅니다.”
“어?”
의외의 대답에 정성국이 놀라자 관리청장은 그가 생각하지 못한 사실을 지적했다.
“그 연구청에서 만든 트랙터라는 기물이 생각보다도 더 대단하더군요. 최근에 더 많은 트랙터가 생산되어 이 지역을 개간하는데 사용될 거라고 들었으니 아마 단기간에 꽤 넓은 지역을 개간할 수 있을 겁니다.”
이에 정성국은 탄성을 질렀다.
분명 연구청에서 올라온 트랙터 생산에 대한 결재를 한 기억이 있었기에.
다만 그는 이 트랙터를 관리청장처럼 높이 평가하기보다는 그냥 쓸 만은 한가보다 싶었고 가격대비 효율이 썩 좋지는 않지만, 더 많은 트랙터를 양산해 실제 운용하면서 빠르게 트랙터의 개선점을 파악했으면 하는 마음에 결재했을 뿐이었기에 관리청장의 반응에 살짝 놀라면서 되물었다.
“아! 그게 그렇게 쓸만한가?”
이에 관리청장이 물어 무엇하느냐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힘이 좋아서 커다란 쟁기로 단번에 논밭을 개간하는 것은 기존에 마소를 이용하는 방식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물론 트랙터 역시 단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이 트랙터 덕분에 단기간에 많은 논밭을 개간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호오...”
정성국은 예전에 시범운행을 하던 트랙터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다른 것은 몰라도 커다란 쟁기를 끌며 논밭을 개간하는 것만큼은 쓸만했었으니까.
‘뭐 트랙터의 생산 비용을 생각하면 좀 애매하긴 한데...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나쁠 것은 없지.’
그렇게 생각하는 정성국의 귓가에 관리청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연구청에서 곧 수확도 트랙터를 이용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아마 그렇게 되면 더 많은 트랙터를 양산해 농부들을 도울 수 있을 테고 그러면 농부들이 더 넓은 면적을 경작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북미왕국의 식량 생산량은 더욱 많아지겠지요.”
지금은 아무래도 개인이 경작할 수 있는 면적에는 한계가 존재했다.
하지만 트랙터가 발전하면서 가장 손이 많이 가는 밭을 개간하는 일과 수확을 기계를 사용해 처리한다면 농부들이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은 넓어질 것이다.
어차피 땅이야 남아도는 북미왕국이었기에 농부 개개인의 경작면적 증가는 직접적인 생산량 증가로 이어질 것이 분명했고.
이를 언급하는 관리청장의 말에 정성국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랬으면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