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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169화 (169/850)

169화

보름달이 환하게 나가사키 인근 해안가를 밝히고 있는 가운데 해안가 인근에 정박하고 있는 선박을 향해 다른 선박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정박했다.

그렇게 두 선박이 나란히 정박하자 선원들이 밧줄과 널빤지를 꺼내 두 선박을 연결했고 곧 한 선박에서 다른 선박으로 사람들이 이동했다.

그리고 잠시 후 한 선박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대체 그게 무슨 뜻이요?!”

원상 소속의 행수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눈앞의 서양인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이에 서양인은 입가에 살짝 야비한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말 그대로요. 도자기의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뜻이지.”

원상 소속의 행수는 네덜란드 상인의 대답과 그의 표정을 확인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하! 그래서?”

이에 네덜란드 상인은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정말 당신들이 계속 이 가격을 고수한다면 우리는 도자기를 매입하지 않겠소.”

네덜란드 상인의 대답에 원상의 행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치의 행동을 보자니 대충 무슨 생각으로 저리 뻗대는지 짐작이 가는구나. 아마 잉글랜드의 상관이 나가사키에서 철수했으니 이 도자기를 살 사람은 자신들뿐이라는 생각에 저러는 거겠지? 이것 참...’

원상의 행수는 반년 전 개척촌에서 생산되었던 도자기 전량을 잉글랜드에 넘긴 후 네덜란드 상인에게 팔 물량을 생산하기 위해 도공들이 잠잘 시간까지 줄여가면서 생산한 이 도자기를 헐값에 넘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도자기야 잘 보관했다가 잉글랜드에 넘기면 그만이었으니.

아니면 북미왕국 본토로 보내 에스파냐에 팔아도 되고.

‘웬만하면 계속 이들과 거래를 유지할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나온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이들과의 거래는 끝내야겠군.’

그렇게 결정을 내린 원상의 행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네덜란드 상인의 말이 끝난 후 선박의 분위기는 무척 험악했다.

아무래도 밀무역이다 보니 얕보였다간 공격당할까 봐 선원들이 잔뜩 긴장한 상황에서 고성이 오가다 보니 분위기가 더욱 험악해졌다.

그렇기에 행수는 괜히 이곳에서 오래 머물러봐야 잘못하다 사고가 날 것 같아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좋소. 당신들의 뜻이 그렇다면야...”

행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온 선원들에게 눈짓하자 선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가져온 도자기 견본품 몇 점을 들고 자신들의 배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처음 행수가 반발하며 자리에서 일어날 때만 하더라도 단지 블러핑으로만 생각했던 네덜란드 상인은 선원들이 견본품을 들고 자신들의 선박으로 돌아가고 행수도 널빤지 위에 오르자 당황해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어? 어어!? 잠깐! 그냥 가는 거요?”

원상의 행수는 개의치 않고 널빤지를 타고 원상의 선박으로 이동한 후 몸을 돌려 무척 당혹스러워하는 네덜란드 상인의 얼굴을 보고 속으로는 꼴좋다고 생각하며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가 잘못되었소? 우리는 도자기의 가격을 내릴 마음이 없고 당신들은 그 가격에 도자기를 매입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거래는 무산되었고 그렇기에 돌아갈 뿐이오만...”

심드렁한 행수의 반응에 이게 아닌데 싶었던 네덜란드의 상인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사이 행수가 선원들에게 손짓했고 선원들이 널빤지를 치우고 밧줄을 풀기 시작하자 다급하게 뱃전 가까이 다가가 소리쳤다.

“만약 이대로 돌아간다면 우리 네덜란드 상인들은 더는 당신들과 거래하지 않을 것이오. 그래도 돌아가시겠소?”

이를 듣고 행수는 콧방귀를 끼며 대놓고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뱃전에 다가와 네덜란드의 상인을 보고 이야기했다.

“당신들이 무슨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이 도자기를 원하는 자들은 많소. 굳이 당신네에게 이 도자기를 팔아야 할 이유는 없다는 말이오. 그나마 그동안 꾸준히 거래해왔기에 애써 도자기 물량 일부를 가져온 건데 그런 소리를 하니 좀 우습구려.”

행수가 자신의 말에 반응하자 기회라 여긴 네덜란드 상인은 애써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 도자기를 원하는 자들이 많다? 내가 그 말에 속아 넘어갈 것 같소? 아. 아마 잉글랜드 놈들을 믿고 그런 소리를 하나 본데...그들은 이미 나가사키에서 철수했고 더는 이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할 거요!”

그 말을 끝으로 몹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네덜란드 상인을 물끄러미 바라본 원상의 행수는 씩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흐음? 잉글랜드? 그들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오.”

“어?”

행수의 말에 네덜란드 상인은 무척 당황했다.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인들은 근래에 유럽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이 도자기의 물량 부족을 잉글랜드 때문이라고 생각한 탓이다.

특히나 나가사키에 잉글랜드의 선박이 드나들 때 물량이 무척 줄어들고 가격은 올랐으며 당시에 저 행수가 슬쩍 흘린 말도 있었기에.

다만 확신은 아니었기에 막부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네덜란드 상인들이 근해에서 잉글랜드의 선박을 검문하거나 공격할 수는 없었기에 그냥 넘어갔었다.

헌데 최근 북미왕국의 존재가 유럽에 알려지며 본국을 통해 뒤늦게 이들도 북미왕국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아이누 부족 연합 뒤에 북미왕국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감한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인들은 자신들이 밀무역을 통해 유럽에 알린 도자기가 바로 북미왕국의 도자기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더불어 2차 영란전쟁의 승리로 유리한 조약을 맺었기에 이젠 잉글랜드 상관을 나가사키에서 내쫓았으니 당연히 이들과 거래할 상대는 자신들밖에 없다는 생각에 예전처럼 헐값에 사들이기 위해 뻗댄 것인데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대의 반응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네덜란드 상인을 보고 행수는 피식 웃었다.

‘뭐...저들의 추측이 크게 틀리진 않지만, 굳이 그것을 인정해 불리함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행수는 무척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네덜란드 상인을 보며 작별을 고했다.

“그럼 더는 볼 일이 없겠구려. 잘 지내시오.”

“잠...잠깐만!”

저들의 단호한 반응을 볼 때 만약 이대로 저들을 보냈다간 더는 북미왕국의 도자기를 얻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 네덜란드의 상인은 육중한 몸을 날려 원상의 선박에 올라탔다.

그런 네덜란드 상인의 행동에 원상의 선원들은 놀라 갑오 소총을 들어 상인에게 겨눴고 이에 네덜란드 선박의 선원들도 무기를 들어 올리며 서로를 겨눴다.

이런 선원들의 분위기에 움찔한 원상의 행수는 급히 소리쳤다.

“그만! 쏘지 마라!”

행수의 외침에 네덜란드 상인도 상황을 파악하고 당황해서 자신의 선원들에게 손짓했다.

“일단 무기를 내리게!”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된 후 행수는 네덜란드 상인을 보고 으르렁대듯 말했다.

“이게 뭐하자는 거요! 이렇게 경우가 없는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행수의 말에 네덜란드 상인은 본인이 잘못한 것이 있었기에 바로 사과했다.

잘못하다간 정말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던 상황이었으니.

지금도 조금 가라앉긴 했지만, 분위기가 험악한 것은 사실이었고.

“음...미안하오. 너무 급해서 그만...”

그런 네덜란드 상인의 사과에 원상의 행수는 인상을 풀고 손을 내저으며 길게 이야기할 이유가 없다는 듯 바로 물었다.

“됐고. 대체 왜 이 배에 올라탄 거요. 서로 간에 할 말은 없다고 생각되오만?”

이에 네덜란드 상인은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 조금은 터놓고 이야기해봅시다.”

하지만 행수는 뚱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무엇을?”

“당신들 북미왕국의 상인들이 맞지요?”

이에 행수는 슬쩍 입에 침을 바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우린 청의 상인들이요.”

“어?!”

행수의 대답에 네덜란드 상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행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입술에 침을 바르며 말했다.

“다만 운이 좋게도 북미왕국이 처음으로 아이누 부족 연합의 영역에 진출했을 때 그들과 접촉할 수 있었고 덕분에 저들의 주요 상품인 도자기를 독점적으로 얻을 수 있었소. 다만 청나라에서 팔긴 어려워 보였고 당신들 같은 서양인들은 좋아할 만한 형태의 도자기였기에 거래할 대상을 찾다 당신들을 선택했을 뿐이고.”

행수의 대답에 네덜란드 상인은 이거다 싶어 손뼉을 치며 득달같이 입을 놀려댔다.

“그렇지! 당신도 방금 말한 것처럼 이 도자기는 서양 상인들이나 사들일 텐데 이 근방의 서양 상인들은 오직 우리 네덜란드의 상인뿐이오. 그러니 그냥 우리에게 도자기를 넘기시오. 대신 가격은 조금 더 쳐주겠소.”

이에 행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말하지 않았소. 우리는 그냥 중개 상인일 뿐이오. 애당초 최근 가격이 오른 것은 우리의 장난이 아니라 북미왕국에서 도자기 가격을 올렸다는 뜻이오. 헌데 당신들이 원하는 가격에 팔라면 우리가 막대한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데 대체 왜 그래야 하오?”

“끙...”

행수의 말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는 네덜란드의 상인이었다.

자신들은 이 밀무역에 나서는 상인들이 북미왕국의 상인이라고 생각했고 잉글랜드가 일본에서 물러난 김에 북미왕국을 압박해 도자기를 예전처럼 싸게 가져오려 했는데 이들이 중개 상인에 불과하다면 헛짓거리에 불과했다.

저들이 상인이라면 손해를 보고 팔 이유가 없었으니까.

향신료의 독점을 위해 전쟁을 불사하고 향신료의 가격을 올리기 위해 섬 전체를 불태우기도 했었던 네덜란드의 상인들이었기에 행수의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네덜란드 상인의 귀에 계속 행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바엔 이 물량은 그냥 마카오로 가져가 그곳의 서양 상인들에게 넘기고 당분간은 북미왕국의 중개 무역에는 손을 떼면 그만이지. 어차피 북미왕국의 상품 중 도자기를 제외하면 딱히 돈 되는 물품도 없었으니.”

“어?”

정말 중개 무역에 손을 뗀다면 자신이 직접 북미왕국과 교역해 조금이나마 이득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머리를 굴리는 네덜란드 상인을 보고 행수는 피식 웃으면서 슬쩍 말을 던졌다.

“도자기를 조금이나마 싸게 사고 싶다고? 그럼 당신들이 직접 북미왕국으로 가서 도자기를 구하시오. 아무래도 그러면 조금 더 싸게 구할 수 있겠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네덜란드 상인은 혹시나 해 행수에게 물었다.

“혹시 저들의 본토의 항구를 방문한 적 있소?”

“당연히 없소. 당신들처럼 본토가 꽤 먼 곳에 있다는 말에 관심을 끊었으니.”

“으음...”

행수의 대답에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는 네덜란드 상인이었고 이에 행수는 슬쩍 다시 조언하듯 말을 흘렸다.

“뭐 저들의 본토 위치를 모른다면 아이누 부족 연합을 통해 저들과 접촉해보시구려.”

“흐음...고맙소. 분명 이번 거래에서 우리가 무례했던 부분이 없지 않은데 이렇게 조언을 해주다니 말이오. 해서 말인데...어차피 이번 거래는 당신들이 고수하는 그 가격대로 도자기의 가격을 치르리다. 괜히 이 물량을 싣고 마카오로 갈 필요는 없지 않겠소.”

정중히 사과하는 척하면서 도자기를 원하는 네덜란드 상인을 보고 속으로는 혀를 찬 원상의 행수는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어차피 당신들과의 거래는 이것으로 마지막일 것 같으니...”

“고맙소.”

그렇게 다시 두 선박을 밧줄로 고정하고 널빤지를 통해 도자기가 든 상자와 금은이 들어있는 상자를 열심히 옮기는 선원들을 바라보는 가운데 네덜란드의 상인이 행수에게 슬쩍 궁금증을 나타냈다.

“헌데 말이오. 혹시 북미왕국에 대해 아는 것이 있다면 조금 말해주었으면 하오만...”

이에 행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여상히 말했다.

“흐음...글세? 직접 북미왕국을 방문한 적은 없어서 딱히 말할 거리는 없는데...아. 그러고 보니 생각보다 해군이 강력한 듯싶었소.”

“으음...그렇소?”

“이곳은 저들 본토에서 꽤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군함으로 보이는 커다란 선박들이 다수 아이누 부족 연합의 섬들을 오가는 것을 볼 때 그렇게밖에 생각이 되지 않는구려. 그리고 막부의 해군이 약한 편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을 상대로 실전에서 강력함을 보여주기도 했고.”

“으음...”

행수의 말에 네덜란드의 상인은 꽤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상인의 얼굴을 보며 행수는 속으로 킬킬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지금까지 북미왕국과는 관련 없는 중개 상인이라고 거짓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북미왕국 사람이 자신들을 강하다고 이야기해봐야 단순한 허세라고 생각하겠지만 제삼자가 북미왕국이 강한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면 조금은 진지하게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에스파냐에 퍼진 북미왕국의 소문을 파악한 정성국과 외무청이 당분간은 이러한 소문을 유지할 생각에 서양인들과 접촉하는 외무청 관리들과 원상에게 북미왕국의 실체를 알리기보단 부풀려서 알리라고 명령을 내렸고 원상의 행수는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려 계속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때 원상의 행수 곁에 한 선장이 다가와 보고했다.

“행수님. 다 옮겼습니다.”

“대금은 확인했나?”

“물론입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원상의 행수는 고개를 돌려 네덜란드의 상인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만 헤어집시다. 잘 지내시구려.”

행수의 말에 북미왕국을 생각하느라 심각한 표정을 짓던 네덜란드의 상인은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배로 이동하며 말했다.

“아. 그동안 고마웠소. 잘 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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