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슬슬 더위가 한창인 8월 말에 정성국은 집무실에서 투로시노를 기다리며 한쪽에 마련된 티테이블에서 원두를 갈고 있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며 투로시노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전하. 부르셨습니까.”
“오. 투로시노! 오랜만일세! 헌데 자네 모습이?”
투로시노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1년 전에 이제 자신은 아이누 부족 연합의 지도자가 아닌 북미왕국의 외무청 관리로 일하게 되었으니 다음엔 다른 관리들처럼 편하게 대해 달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던 정성국이었다.
그렇기에 정성국은 뒤에서 1년 만에 투로시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하던 일을 멈추고 예전처럼 편히 그를 반기려고 몸을 돌렸다가 눈에 들어온 그의 모습에 순간 멈칫했다.
그가 기억하는 투로시노는 아이누인답게 장발에 덥수룩한 콧수염과 풍성한 턱수염에 하관 대부분이 가려져 있었다.
헌데 지금 정성국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북미왕국 사람처럼 단발머리를 한 매끈한 얼굴의 이색적인 미남이 서 있었던 것이다.
집무실에 들어온 사람이 정말 투로시노가 맞긴 한 건지 잠시 고민할 정도였달까.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투로시노는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었다.
“하하하. 저도 이제 북미왕국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북미왕국 사람들처럼 머리를 자르고 콧수염과 턱수염을 밀어버린 거죠.”
그 말에 정성국은 살짝 인상을 굳히며 투로시노의 안색을 살폈다.
아이누인들은 아무래도 조선인과 이곳 원주민들과는 겉모습이 많이 달랐기에 혹시 차별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이미 아이누 부족 연합은 북미왕국에 합류한 상태고 이곳에도 투로시노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누인들도 존재하는 만큼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걱정이 들어 그의 안색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단지 북미왕국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런 거야? 혹시 다른 이유는 없고...?”
그런 정성국의 물음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투로시노는 이내 그가 왜 그런 물음을 던진 것인지 파악하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최소한 정성국과 고위 관리들은 생김새가 조금 다르다고 무조건 배척하려 들던 샤모들과는 확실히 달랐으니 말이다.
물론 그 역시 이곳에서 1년 넘게 살면서 남들과 다른 생김새로 인해 이런저런 고충이 있긴 했다.
북미왕국 사람들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고 콧수염과 턱수염을 밀어버렸지만, 생김새 자체가 조금 다른 만큼 조선인이며 원주민이며 신기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따라다니거나 말을 거는 경우가 꽤 많았으니 말이다.
다행히 이를 사전에 파악한 외무청에서는 아이누인들도 북미왕국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행정청을 통해 널리 알렸고 군사청에 요청해 잠시 그와 행정청의 다른 아이누인들에게도 호위를 붙였기에 별다른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투로시노는 쾌활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이유라...딱히 없는데요? 아. 하나 있습니다. 솔직히 이곳은 고향과 비교하면 너무 더워서 말입니다. 살기 위해서 잘랐습니다.”
그제야 정성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은 얼굴로 맞장구쳤다.
“하하하. 그래.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해. 아이누섬에 비하면 좀 덥기는 하지.”
정성국의 말에 투로시노는 엄살을 떨었다.
“좀이요? 엄청 더운 것 아닙니까? 특히 저희 아이누인들은 조선인이나 원주민들에 비하면 털이 많은 편이라서...더 힘들었습니다. 해서 싹 밀었죠.”
확실히 아이누인들은 마치 서양인들처럼 털이 풍성한 편이었다.
지금 투로시노도 깔끔한 얼굴과는 달리 손등부터는 털이 많은 서양인 마냥 덥수룩했으니 말이다.
“하하하. 그런가? 아. 그럼 행정청에 배속된 다른 아이누인들도...”
이에 투로시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아이누인들 역시 차별이나 시선이 아니라 단순히 덥기도 하고 매일 깨끗이 씻어야 하니 귀찮고 불편해서 하나둘 이발소에 들려 머리를 자르고 수염을 잘랐다.
“예. 제가 머리를 깎자 대부분의 아이누인들도 바로 저처럼 머리를 짧게 잘랐습니다. 더불어 털을 민 녀석들도 꽤 있고요.”
투로시노의 말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그를 티테이블 한쪽의 의자에 권하며 말했다.
“그래? 그런 부분까진 미처 보고받지 못해 몰랐었어. 아.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 차라도 한잔 마시겠나?”
이에 투로시노는 무척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오. 전하께서 직접 내리신다는 바로 그 커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거 영광이군요.”
“음? 자네도 아나?”
“북미왕국의 관리치고 전하께서 커피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직접 내리신 커피는 저 찻집에서 파는 커피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맛있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투로시노의 너스레에 정성국은 폭소했다.
같은 원두에 같은 장비를 쓰는데 커피 맛이 달라 봐야 얼마나 다르겠는가.
거기에 찻집의 종업원들도 정성국이 말해준 방법에 따라 커피를 내릴 텐데.
“푸하하. 설마 그럴까. 그건 단지 소문이네. 아니면 청장들의 아부던가.”
그러면서도 즐거운 표정으로 분쇄하던 원두를 마저 갈고 커피를 내리면서 투로시노의 근황을 묻다가 커피를 다 내리자 투로시노 앞에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자. 여기 있네.”
“감사합니다. 전하.”
정성국이 직접 내린 커피를 영광이라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음미하는 투로시노였다.
그런 투로시노를 보고 피식 웃으며 자신이 직접 내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정성국은 그를 보며 물었다.
“어때? 찻집에서 마시는 커피와 별반 다를 것 없지?”
하지만 투로시노는 정말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맛과 향은 전하께서 타 주신 이 커피가 조금 나은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정성국은 다시 한번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쯧쯧. 이 친구 이곳에서 일을 배우라고 했더니 아부만 늘었구만.”
“하하하.”
그렇게 오랜만에 투로시노와 만나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적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대충 마무리한 정성국은 다 마신 커피잔을 내려놓고 자세를 바로 하며 투로시노를 바라보았다.
“그래. 외무청에서 경험은 많이 쌓았나?”
그런 정성국의 행동에 투로시노 역시 커피잔을 내려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전하.”
그동안 투로시노는 외무청에서 집중 교육을 받았다.
다른 관리와 함께 주변 원주민 부족을 방문하기도 했고 다른 관리가 주변 원주민 추장이나 대추장을 설득해 결국 북미왕국에 합류하는 모습도 바로 곁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아. 그리고 최근엔 푸른 안개님과 대화를 나누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아. 그런가?”
정나리가 태어난 후론 푸른 안개는 새한성을 떠날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저 간간이 궁궐에 들러 손녀딸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모든 업무에 손을 뗀 것은 아니었고 외무청의 여러 일을 돕는 중에 투로시노를 만나 여러 이야기를 해준 것이다.
푸른 안개 역시 외무청의 고위 관리였기에 북미왕국의 외교 방향을 알 수 있었고 동아시아에도 북미왕국의 존재감을 알릴 겸 언젠가는 사절을 보낼 예정이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절은 이곳 외무청의 고위 관리가 직접 나서거나 아니면 투로시노가 사절로 동아시아 각국에 방문할 확률이 높았다.
다만 투로시노의 겉모습 자체가 아시아인과는 조금 차이가 나는 만큼 오히려 정성국이라면 투로시노를 사절로 쓸 가능성이 더 커 보였다.
그런 만큼 투로시노의 역할이 무척 중요했기에 바쁜 와중에도 직접 그를 만나 자신이 에스파냐와 협상을 진행하며 느꼈던 것들을 투로시노에게 이야기해준 것이다.
“예. 특히 나라 간의 협상과 서양 세력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지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정성국은 그 말을 듣고 장인인 푸른 안개가 무슨 생각으로 투로시노를 불러 이야기를 해준 것인지 짐작하고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이렇게 자네를 부른 것은 슬슬 돌아갈 때가 되어서 불렀네. 곧 마지막 이주 선단이 도착할 테니 그 이주 선단 편으로 귀환해 북미왕국의 외무청 관리로서 아이누 섬에서 일하게 될 텐데...현 상황에서 당분간은 자네가 그 지역의 외무청 관리 중 가장 높은 직위의 관리일걸세.”
정성국의 말에 투로시노는 살짝 얼굴이 굳었다.
분명 이곳에서 많이 배우긴 했지만, 고작해야 1년에 불과했다.
헌데 왠지 모르게 정성국은 자신을 책임자급으로 생각하는 분위기에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에 그가 알기로 아직 아이누 섬을 비롯한 예전 아이누 부족 연합 지역에는 행정청 관리와 개발청 관리 몇이 들어가 있을 뿐이지 외무청 관리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음...설마 저 혼자 아이누섬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아. 그건 아닐세. 당연히 몇몇 외무청 소속 관리들을 자네 보좌로 붙여줄걸세. 그렇지만 다들 자네 아랫사람이지. 자네가 가장 고위 관리라는 소릴세.”
“그거야...”
정성국의 말에 투로시노는 조금 안도했다.
당연히 경험 많고 능력 있는 관리들을 붙여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마치 그가 아이누인 부대를 이끌던 사령관 시절처럼.
이에 정성국은 투로시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했기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네가 전에 맡았던 허울뿐인 사령관직하고는 상황이 달라. 자네는 옛 아이누 부족 연합 영역에 유일한 외무청의 고위급 관리인 만큼 중요한 상황에선 자네가 직접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뜻일세. 물론 이쪽에서 붙여준 외무청의 관리들이 자네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긴 하겠지만 단지 그들은 보좌관일 뿐이라는 점을 명심하게. 알겠나?”
예전처럼 단순히 이름만 올려두고 실질적인 모든 일은 박경수가 처리하던 시절과는 달리 자신이 직접 박경수처럼 모든 일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나온 투로시노였다.
“으음...”
더불어 엄청 부담스럽다는 표정과 함께.
정성국은 그런 투로시노를 보며 그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말을 덧붙였다.
“아. 그렇다고 너무 부담스러워할 것 없네. 어차피 평소에 자네는 주로 주변 섬을 돌아다니면서 이곳에서 배운 것처럼 다른 아이누인들과 우호적으로 교류하면서 결국 북미왕국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자네의 임무일세.”
정성국의 말에 투로시노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투로시노 역시 이곳에서 1년간 보고 배운 것이 바로 그것이었기에 그 정도라면 자신 있었다.
“그 정도라면야 그동안 이곳에서 배운 것도 있고 저를 도와줄 친구들도 있을 테니 별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투로시노의 대답에 정성국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부분은 자네가 잘 해낼 것이라고 믿네. 다만 언제까지 북미왕국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존재감을 감출 수는 없는 노릇이야. 그러니 막부도 그렇지만 조선이나 청과도 교류하긴 해야겠지. 그때가 되면 자네의 역할이 중요해지네.”
“으음...”
정성국이 덧붙인 말에 다시 투로시노가 신음을 흘리자 정성국은 일부러 가벼운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뭐 그렇다고 너무 부담 갖지는 말게. 이쪽에서 직접 다른 나라와 협상을 하게 된다면 그 전에 명령서를 통해 중요한 협상 목표나 내용 등은 자네에게 전달될 테니. 아니면 이쪽에서 직접 그들과 협상할 다른 외무청의 고위 관리들을 보낼 수도 있고. 그러니 미리 걱정하진 말게.”
“아...알겠습니다.”
“문제는 다른 나라의 사절이 찾아오는 건데...그건 외무청 관리들의 도움을 받아 자네가 적당히 대응하도록 하게. 그리고 자네가 판단하기 어렵다면 답변을 하지 말고 쾌속선을 통해 연락을 취하고.”
“아...”
자신이 고위 관리였기에 모든 결정을 다 내려야 한다는 중압감이 있었는데 정성국의 말에 부담을 조금 덜어낼 수 있었던 투로시노였다.
“그리고 정일신 3함대 사령관이나 박경수 아이누 경비대장과도 친한 편이지 않은가? 그러니 그들과 상의하는 것도 나쁠 것은 없네. 그들 역시 북미왕국의 대외 정책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테니 조언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거야.”
“아...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제야 얼굴이 확 펴진 투로시노였기에 정성국은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면 자네가 행정청이 아닌 외무청의 관리가 된 것은 결국 세상을 둘러보고 싶기 때문 아니었나? 그런 기회가 온 것이니 오히려 좋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에 투로시노는 과장되게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분명 그렇긴 한데...북미왕국을 대표해 다른 나라에 방문한다면 맘 놓고 구경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웬만하면 그런 상황에선 다른 고위 관리를 보내 주시지요.”
“하하하. 뭐 인력이 남는다면 그러겠네.”
정성국은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1년간 북미왕국에서 지내며 상황을 파악한 투로시노는 맘 편히 다른 나라를 구경하기는 글렀음을 직감하고 탄식을 토했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