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하얀 들꽃 역시 초산이었기에 출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한 정성국은 일단 응접실에서 나왔다.
하얀 들꽃이 출산하면 분만실에 들어갈 생각에 평소보다 더 꼼꼼하게 씻고 새롭게 옷을 갈아입은 것이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끝낸 후 하얀 들꽃의 출산이 끝날 때까지 한참을 기다릴 각오를 하고 응접실로 돌아왔을 때 응접실의 분위기가 무척 어수선하다는 것을 인지한 정성국은 자신도 모르게 김 의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믿었던 김 의원조차 몹시 당황한 표정이자 정성국이 몹시 놀라 그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응접실의 안쪽 문이 열리면서 아스라이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
정성국이 아련히 들리는 아기의 울음소리에 흠칫했을 때 응접실 안쪽에서 나온 시녀가 곧장 정성국에게 다가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경하드립니다. 전하. 하얀 들꽃님께서 공주님을 생산하셨습니다.”
“...어? 벌써?”
정성국이 멍하게 시녀를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외부와 통하는 응접실의 문이 벌컥 열렸고 푸른 안개가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전하! 하얀 들꽃이 산통이 시작되었다고! 들었는데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정성국은 푸른 안개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이미 출산을 했다네요?”
“...예?”
정성국의 말에 푸른 안개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정성국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공주님이래요. 공주님.”
* * *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가 걱정했었지만 김 의원이나 함께 들어갔던 여의가 이야기하길 산모와 아기 둘 다 건강하다고 확답을 해주어 정성국과 푸른 안개는 응접실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분만실 상황을 시녀를 통해 제대로 파악하고 나자 정성국과 푸른 안개는 응접실에서 대기하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흘러 정성국이 먼저 조심스럽게 분만실 안으로 들어가 살짝 지친 얼굴을 한 하얀 들꽃과 그 옆에서 그녀를 무척 대견한 듯 바라보고 있는 전아라를 보고 미소지었다.
“고생했어.”
정성국은 말을 하며 가까이 다가가 하얀 들꽃의 손을 꼭 잡아주었고 하얀 들꽃은 정성국을 보고 활짝 웃었다.
“아니에요. 전하.”
그때 시녀들이 분만실로 들어와 하얀 들꽃에게 깨끗하게 씻긴 아기를 조심스럽게 건넸다.
“아...”
포대에 싸여 열심히 울던 아기는 하얀 들꽃의 품 안에서 울음을 멈추었고 이를 보며 정성국은 말했다.
“아기가 어미 품을 알아보네.”
하얀 들꽃은 품 안에서 꼬물거리는 아기를 보고 말문이 막힌 듯 눈물을 글썽이며 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옆에서 흐뭇한 미소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전아라가 정성국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오라버니. 참 신기해요. 안문이도 그랬어요?”
“응. 그랬지.”
그러면서 정성국은 하얀 들꽃의 품에 안긴 아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기가 참 이쁘다. 거기에 어미를 고생시킨 안문이와는 다르게 아주 효녀네. 효녀.”
이에 전아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들꽃에 비하면 전아라는 고생이 심하긴 했었으니.
특히 전아라도 나름 함께 분만실로 들어오면서 각오를 단단히 했는데 너무도 수월하게 출산하는 하얀 들꽃을 보고 당황했을 정도였으니.
“그러게요. 쿡쿡. 참. 아이의 이름은 뭐로 정하실 생각이세요?”
이에 정성국은 잠시 고민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음...안문이야 내가 짓긴 했지만...이 아기의 이름은 장인어른이 짓는 것이 낫지 않을까?”
정성국이나 전아라의 경우는 집안에 어른이 없었기에 정성국이 직접 아이의 이름을 지었지만 하얀 들꽃의 아기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특히 푸른 안개의 자식은 하얀 들꽃 하나뿐이었기에 저 하얀 들꽃 품 안에서 꼬물거리는 아기는 푸른 안개의 유일한 손녀였다.
그런 만큼 푸른 안개가 이름을 짓는 것도 나쁠 것이 없겠다는 생각에 이야기하자 전아라는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아기를 생각하면 그게 나을 수도 있겠네요.”
생각지도 못한 전아라의 디스에 정성국은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그의 작문 실력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은 북미왕국 사람이라면 다들 인정하는 상황이었기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슬쩍 혀만 찼다.
“...쳇.”
* * *
오랜 항해 끝에 나가사키에 도착한 제임스는 곧장 데지마 가장 외곽에 존재하는 조촐한 잉글랜드 상관으로 이동했다.
한적한 잉글랜드 상관에 제임스가 들어서자 토마스가 그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오. 이게 누군가! 오랜만일세!”
“오랜만입니다. 토마스.”
토마스는 제임스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반겼지만, 제임스의 얼굴은 썩 좋지 않았다.
이를 눈치챈 토마스는 얼굴에 완연한 미소를 지우고 조심스럽게 제임스에게 물었다.
“음? 무슨 일이라도 있나? 자네 표정이 왜 그래?”
그런 토마스의 말에 제임스는 상관 안을 살펴보았지만, 토마스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기에 토마스에게 다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후우...안 좋은 소식입니다.”
“음?”
제임스의 말에 토마스의 얼굴이 굳어지며 그의 팔을 붙잡고 2층으로 올라간 토마스는 제임스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다.
이에 제임스는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토마스의 재촉에 결국 입을 열었다.
“우리 잉글랜드가 저지대 놈들에게 결국 항복을 했습니다.”
“뭐라고? 자세하게 이야기해보게!”
기겁한 토마스에게 제임스는 자신이 인도에서 취득한 본국의 사정을 이야기해주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을 제임스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집중하던 토마스는 제임스의 말이 끝나자 탄식했다.
“허어...그게 정말인가?”
이에 제임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해서 결국 브레다 지역에서 조약을 맺긴 했는데 이 조약이 문제입니다.”
“어떤 조약인데?”
불리한 상태에서 맺은 조약이라 잉글랜드에 불리한 조약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한 토마스가 어두운 표정으로 제임스에게 물었다.
“여러 내용이 포괄적으로 담겨있습니다만...그건 당장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니 일단 넘어가고. 문제는 아시아 지역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아시아 지역? 무슨 내용인가?”
토마스가 재촉하자 제임스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후우. 그동안 육두구를 구할 수 있었던 룬섬이 다시 네덜란드에 넘어가 네덜란드는 육두구를 독점할 수 있게 되었고 거기에 막부에 대한 네덜란드의 기득권을 인정해 잉글랜드의 선박은 더는 막부의 항구에 정박할 수 없습니다.”
전생과는 달리 북미왕국의 존재로 인해 브레다 조약의 내용이 일부 바뀌었는데 그 바뀐 내용 중 북미왕국과 관계된 내용이 바로 이것이었다.
물론 네덜란드 본국에서는 조약을 맺을 때만 하더라도 이곳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러한 조약을 맺은 것은 아니었다.
이곳 나가사키에 거주하는 네덜란드인들도 최근에야 북미왕국의 존재를 알고 아이누 부족 연합을 지원한 세력이 북미왕국이라고 확신하고 본국에 이러한 내용을 보고하긴 했지만, 이 조약을 내릴 때만 하더라도 네덜란드 본국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몰랐다.
다만 최근 나가사키에서 보내오는 도자기가 네덜란드에서 무척 유행을 끌고 있다는 사실과 동남아의 향신료 경쟁에서 패한 잉글랜드가 인도에 집중하다 다시 은근슬쩍 동남아를 넘어 일본까지 세력을 확장하며 작게나마 나가사키에 상관을 개설했다는 점을 인지하고 승전한 김에 이러한 내용을 원 역사와는 다르게 추가한 것이다.
더불어 정성국이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인에게 은근슬쩍 흘린 내용은 이 조약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정성국이 네덜란드와 잉글랜드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 슬쩍 흘렸던 소식이 본국에 전해졌을 때는 이미 브레다 조약이 끝난 후였기에.
그리고 이 소식이 조약 전에 전해졌어도 정성국의 의도처럼 뉴암스테르담을 포기하지 않는 방향으로 역사가 변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소식이 뒤늦게 네덜란드 본국에 전해지면서 브레다 조약을 통해 잉글랜드를 일본에서 몰아낸 것이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자화자찬한 것을 고려하면 이 소식이 전해졌어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으리라.
아무튼, 이러한 내용을 설명하는 제임스의 말에 토마스는 기겁했다.
“뭐라고? 그럼 이곳 상관은?”
제임스는 뭘 묻느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철수해야 합니다.”
제임스의 말에 토마스는 힘이 빠지는지 의자에 풀썩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허어...그런 조약을 맺어야 할 정도로 본국의 상황이 안 좋았나? 전에는 분명 바다에서 네덜란드 놈들을 이겼다고 하지 않았나...”
이번 전쟁에서 잉글랜드는 운이 없었다.
초반에는 로스토프트 해전으로 네덜란드 해군을 무찌르며 기세를 올렸지만, 프랑스가 네덜란드의 편을 들어 참전했고 런던에서는 흑사병이 돌았고, 대화재가 일어나 런던이 불타올랐다.
그리고 마지막 메드웨이 해전에서 네덜란드의 해군에게 밀렸고.
제임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품에서 조그마한 술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시면서 이를 이야기해주었다.
“본국 내부에서 여러 안 좋은 일이 발생했고 작년 6월 저지대 놈들의 해군에 크게 패해 템스강 하류가 봉쇄될 정도였답니다.”
템스강은 잉글랜드의 수도인 런던과 연결된 무척 중요한 강이었고 이 템스강 하류까지 네덜란드의 해군이 접근했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상황이 좋지 못했다는 이야기였기에 토마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그 정도로 본국의 상황이 어려울 줄은 몰랐군.”
“그러게 말입니다.”
토마스의 푸념에 제임스가 맞장구치자 토마스는 정신을 차린 듯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끙...어차피 룬섬의 육두구 무역이야 나하곤 크게 상관은 없는데...이곳 나가사키에서 철수해야 한다니...그럼 북미왕국과의 도자기 무역은...”
토마스는 제임스를 바라보았고 제임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영향이 갈 것 같습니다. 그동안은 이곳에서 보급을 받고 마쓰마에 항으로 이동했는데 중간 보급항이 사라진 셈이니까요. 뭐 중간 보급이야 마카오에 들러 보급을 해도 되긴 합니다만...문제는 그런 조약이 맺어진 이상 이제부턴 배 한 척으로 홋카이도까지 항해하는 것은 무척 위험하다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고작 한 척으로 뭘 하겠느냐는 생각에 그냥 두고 보고 있던 네덜란드 상인들이었다.
하지만 최근 도자기 문제로 분위기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조약을 맺고 네덜란드의 일본 무역 기득권을 인정해버렸으니 이후에 한 척으로 돌아다녔다간 네덜란드놈들이 가만있지 않으리라.
“빌어먹을 저지대 놈들!”
이에 다시 분노를 나타내는 토마스였다.
자신의 공이 사라질 판이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조약은 맺어진 후였으니 토마스가 뭐라고 한들 바뀔 일은 없었다.
이에 한숨만 푹푹 쉬다가 제임스의 손에 들린 술병을 낚아채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제임스의 안색 역시 좋지는 않았다.
그 역시 북미왕국과의 교역이 중단된다면 손해를 보는 셈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인도에서 이곳까지 항해하면서 해결책을 생각했고 이를 조심스럽게 토마스에게 이야기했다.
“해서 말인데 이 북쪽에도 나라가 존재하지 않습니까? 조선...이라고 했던가요? 혹시 그곳을 이용할 수는 없겠습니까?”
제임스의 말에 살짝 솔깃한 토마스였지만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려울 걸세. 나도 조선에 대해 모르지는 않는데...그들은 굉장히 폐쇄적이라고 들었네. 거기에 예전 일본 정부와 전쟁을 벌였다는 기록도 있으니 군사력이 만만할 것 같지도 않고.”
동남아에서는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온갖 행패를 부리고 식민지 건설에 여념이 없었던 서양인들이 동아시아로 올라와서는 비교적 얌전히 교역만 하는 이유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군사력 때문이었다.
지금 시기에 서양 국가들은 동아시아의 군사력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점잖은 척하며 교역에 열을 올린 것이다.
명, 청이야 이 시기 서양 세력이 감히 덤비긴 어려웠고 일본 역시 비슷했다.
그리고 토마스는 조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최소한 이전 정부 시절 조선이 일본과 전쟁을 치렀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기에 고작 배 한두 척의 힘으로 조선을 굴복시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에 제임스는 이곳까지 오면서 해결책으로 생각했던 방도가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에 힘이 빠진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휴우...그렇습니까...허면 일단 마쓰마에 항에 들러 북미왕국과 이야기를 나눠봐야겠군요.”
제임스의 말에 토마스도 상황을 실감한 듯 술병에 들어있는 술을 모조리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나며 투덜거렸다.
“끙...그럼 난 철수 준비나 해야겠군.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