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한창 봄기운이 맥동하는 4월의 어느 날, 정성국은 집무실을 찾아온 푸른 안개를 보고 반겼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장인어른.”
“그렇습니다. 전하.”
하얀 들꽃이 회임한 이후 새한성에만 머무르던 푸른 안개는 에스파냐와의 교역문제 때문에 잠시 새진도에 다녀와야 했다.
웬만하면 하얀 들꽃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이를 막고 싶었던 정성국이었지만 아직 뒷방늙은이로 남고 싶지는 않다는 푸른 안개의 말과 잠깐 다녀오는 정도라면 괜찮다는 하얀 들꽃의 말에 결국 허락했다.
다만 안전을 위해 호위대원을 왕창 붙이는 것도 모자라 아예 인급 전선 한 척까지 배정해버렸고.
이에 낭비라며 고개를 흔들던 푸른 안개였지만 입가의 미소를 감출 수는 없었다.
그만큼 사위가 자신을 걱정한다는 의미였고 이는 그만큼 정성국이 하얀 들꽃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였으니.
아무튼, 그렇게 새진도로 향한 푸른 안개였고 하얀 들꽃의 출산이 임박했기 때문인지 재빠르게 협상을 끝내고 돌아온 푸른 안개였다.
그런 푸른 안개를 보고 정성국이 물었다.
“새진도는 어떻던가요?”
이에 푸른 안개는 뭐 다를 것이 있냐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뭐 여전했습니다. 새진도를 개방한 이후 꽤 많은 에스파냐의 상선들이 오가면서 필요한 물품을 가져오고 있고요. 아. 이건 올해 교역 품목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정성국은 푸른 안개가 건네준 보고서를 슬쩍 훑어보고 미소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흐음...점점 수입되는 구아노의 양이 많아지는군요?”
에스파냐는 구아노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당분간은 철과 구리 등으로 도자기값을 치르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구아노의 비중이 무척 올라가 있었다.
더불어 고무의 비중도.
이에 푸른 안개는 로하스에게 들었던 에스파냐의 사정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렇습니다. 전하. 다른 품목들은 에스파냐인들도 사용하는 물품들이지만 구아노와 고무는 그렇지 않다 보니...의도적으로 이 양을 늘려 다른 물품들의 양을 조금이나마 줄이는 듯싶습니다. 다만 실제 북미왕국에 들어오는 철과 구리의 양 자체는 큰 변화는 없습니다. 저들이 원하는 도자기의 양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
그러면서 최근 히스파니올라섬에 고무나무를 대대적으로 육성하는 농장을 건설했고 페루 부왕령에서도 원주민들을 동원해 구아노를 열심히 캐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었다.
이에 정성국은 씩 웃었다.
에스파냐가 그렇게 해준다면 북미왕국 입장에선 나쁠 것은 없었다.
물론 당분간은 철과 구리가 더 필요하긴 했지만, 고무나 구아노의 경우는 아예 북미 지역엔 없는 물품들이니 이 물품들의 비중이 올라간다는 것이 북미왕국에 있어서 나쁠 것이 없었다.
‘뭐 철도야 천천히 생산해 깔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푸른 안개의 말에 보고서를 자세히 살펴보고 감탄했다.
“와. 이렇게 많은 도자기를 원하다니. 이 정도 물량이면 에스파냐에서 소화하긴 어렵지 않나?”
이에 오히려 푸른 안개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로하스의 말에 따르면 이 물량도 에스파냐 내에서 소비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더군요.”
“허어...그래요?”
“예. 북미왕국의 도자기가 에스파냐 본국에 알려지면서 무척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에스파냐의 귀족들이 이 북미왕국의 도자기를 구하느라 난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인지 이번 물량도 에스파냐 내에서 소모될 거라고 로하스가 그러더군요.”
2년간 북미왕국에서 생산한 고급 도자기의 대부분 물량을 가져가 놓고 에스파냐 왕실과 귀족들이 사용하느라 에스파냐 외부로 팔린 도자기가 없을 정도라니.
정성국이 슬쩍 질린 표정을 하자 푸른 안개는 로하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 때문인지 지금에 와서는 북미왕국과 교역을 성사시킨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을 본국에서도 치켜세울 정도라고 합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정성국이 에스파냐 내부 사정에 대해 흥미를 보이자 푸른 안개는 로하스를 통해 파악한 내용을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아카풀코 조약 이후 이 조약이 에스파냐 본국에 알려지면서 이 조약을 승인한 안토니오 부왕의 처리를 놓고 이런저런 말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올라온 보고서에 따르면 북미왕국이 워낙 강국이라 계속해서 전쟁을 벌였다가는 누에바 에스파냐의 경제가 파탄 날 것은 뻔했기에 최소한의 손실로 막기 위해 북아메리카의 권리를 넘겼다고 했고 다른 관리와 귀족들의 보고서도 비슷했기에 일단 처리를 미루었고.
하지만 북미왕국에서 도자기가 에스파냐로 유입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고 한다.
북미왕국의 도자기 수준은 아시아의 도자기 수준과 비등했기에 에스파냐 본국에서는 북미왕국을 인디오들이 뭉쳐 만든 나라가 아닌 제대로 된 문명국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더불어 북미왕국에서 도자기를 가져오는 이상 아시아에서는 도자기를 살 이유가 없었기에 최근 아시아 무역에선 아카풀코에서 가져간 귀금속으로 비단과 차를 왕창 사들일 수 있었고 이 때문에 최근에는 평소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대한 이득을 무역을 통해 얻게 되자 에스파냐 왕실과 귀족들은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북미왕국과 재빠르게 협상해 교역의 물꼬를 튼 안토니오 부왕의 평가는 자연스럽게 올라갔다고 한다.
이러한 에스파냐의 사정을 듣고 정성국은 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한때 명나라조차 군사만 적당히 동원한다면 충분히 점령할 수 있다고 주장하던 패기 넘치는 에스파냐인들이 고작 인구 100만을 간신히 넘는 북미왕국을 문명국이라고 판단하고 제대로 국가 취급을 해준다는 것이 신기했던 것이다.
물론 명나라의 경우야 한창 신대륙을 점령하고 필리핀도 꽤 손쉽게 점령해 기세등등한 시절에 명나라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한 필리핀 총독의 객기 어린 주장에 불과하긴 했지만.
그리고 에스파냐에서는 아직 북미왕국의 실체를 모르기에 그러한 것이리라고 생각한 정성국은 피식 웃었다.
동시에 저들의 착각 덕분에 편해졌으니 에스파냐인들과 자주 만나는 새진도에 거주하거나 방문하는 북미왕국의 관리들과 병사들에게 다시 한번 철저한 보안을 주문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정성국은 푸른 안개를 보며 물었다.
“이 외에 별다른 소식은 없었습니까? 유럽 사정에 대한 소식 말입니다.”
정성국이 전생의 역사의 흐름을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미 북미왕국의 존재로 인해 전생의 역사와는 달라질 공산이 컸다.
물론 아직 북미왕국이 다른 나라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또 모르는 일이었다.
이미 북미왕국은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고 나비 효과라는 말처럼 북미왕국의 존재로 인해 어떤 식으로 역사가 바뀔지는 몰랐기에 정성국은 원상과 외무청을 통해 정보 수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를 모르지 않던 푸른 안개 역시 새진도에 방문해 에스파냐의 관리들을 만날 때마다 이런저런 대화를 통해 유럽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애를 썼고.
그리고 로하스를 통해 들었던 소식을 떠올리고 웃으면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조금 흥미로운 소식을 로하스를 통해 들었습니다.”
“그래요? 어떤 소식입니까?”
정성국이 유럽의 소식에 무척 흥미를 보이자 내심 의아하면서도 별다른 내색 없이 입을 여는 푸른 안개였다.
“이게 작년에 있었던 일이긴 한데 로하스도 최근에 알게 되었다며 지나가듯 이야기해주었던 내용입니다. 전 미처 파악하지 못했었는데 잉글랜드는 네덜란드란 나라와 전쟁 중이었나 봅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잉글랜드가 결국 네덜란드에 패했다고 로하스가 웃으면서 이야기하더군요.”
“역시!”
정성국은 푸른 안개의 말에 주먹을 불끈 쥐면서 탄성을 내질렀다.
정성국이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 바로 이 2차 영란전쟁에 대한 소식이었다.
정성국이 기억하기로는 전생에서는 작년 7월에 이미 브레다 조약을 맺어 2차 영란전쟁이 네덜란드의 승리로 돌아갔는데 북미왕국의 존재 때문에 이것이 바뀔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더불어 이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 원상을 통해 약간의 수작을 부리기도 했고.
이 때문에 작년 가을부터 에스파냐인들과 접촉하는 외무청 관리들에게 유럽의 정세를 파악하라고 명령했었지만 별다른 소식이 없어 의아하게 여기는 중이었다.
헌데 말을 들어보니 단순히 소식의 전달 자체가 좀 늦었던 것 같았다.
이에 정성국은 푸른 안개를 보며 이 내용에 대해 자세한 사항을 캐묻기 시작하자 푸른 안개는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음...전하께서 이 내용을 그렇게 신경 쓸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요. 제가 로하스에게 들은 것이라곤 작년 7월 브레다라는 지역에서 조약을 맺고 공식적으로 두 나라 간의 전쟁을 끝냈다는 것 정도입니다.”
푸른 안개의 말에 정성국은 살짝 안색을 찌푸렸다.
“그래요? 다른 말은 없었고요?”
“예. 그렇습니다. 전하. 아. 조약을 맺었다는 말에 흥미가 생겨 이 조약에 대해 자세하게 묻긴 했었는데 로하스도 자세한 사항은 잘 모른다면서 얼버무리더군요.”
“흐음...”
푸른 안개의 대답에 정성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성국이 이 조약을 신경 쓰는 것은 이 조약의 내용 중에 뉴암스테르담에 관한 내용도 있었기 때문이다.
2차 영란전쟁의 시발점에 가까웠던 이 뉴암스테르담의 소유권을 잉글랜드가 갖는 대신 육두구가 나는 동남아의 섬인 룬섬을 비롯해 남미의 수리남 등을 얻게 된다.
나중에야 이 뉴암스테르담이 뉴욕 맨해튼 지역이라 위상 자체가 달라져 후대에 네덜란드가 전쟁에서 이겨놓고도 결국 협상을 잘못해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하지만 이건 어쩔 수가 없는 것이 지금 기준으로만 보면 인디언들과 모피를 거래하는 북쪽의 조그마한 거점에 불과한 뉴암스테르담과 육두구가 재배되는 룬섬의 경제적인 가치는 감히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기에 네덜란드는 이번 영란전쟁의 승리를 통해 승전국으로서 챙길 것은 다 챙긴 셈이고.
그리고 나중에 다시 3차 영란전쟁에서 잉글랜드는 다시 네덜란드에 패해 뉴욕을 네덜란드에 돌려주지만, 네덜란드는 뉴욕을 뉴오렌지로 개명해 잠깐 소유한 후 잉글랜드와 협상해 뉴욕을 다시 돌려주는 대가로 수리남의 식민지를 확정해버린 것을 보면 뉴욕의 가치는 높지 않았다.
다만 정성국이 북미왕국의 존재를 알렸기에, 그리고 원상을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흘렸기에 혹시 역사가 바뀌어 이 조약 내용이 바뀌지 않을까 싶었는데 자세한 사항을 모른다니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 곧 하얀 들꽃의 출산이 있는 만큼 푸른 안개를 보낼 수는 없고 다른 외무청 관리를 통해 이 조약 내용을 상세히 파악하라는 명령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하던 정성국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생각해보면 에스파냐 놈들은 우리가 유럽의 정세에 밝다는 사실을 모르니 일부러 숨겼을 수도 있겠네. 그러면 제대로 내용을 파악하긴 쉽지 않겠는데?’
아카풀코 조약 이후 북미왕국과 에스파냐는 교역을 진행하며 괜찮은 사이가 되었지만 외무청 관리들은 절대로 에스파냐를 믿지 못하고 내심 경계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아카풀코 조약 이후에도 에스파냐인들은 북미왕국의 관리에게 현재 북미 지역의 상황을 제대로 이야기해주지 않고 있었다.
다만 유일하게 로하스가 푸른 안개를 통해 에스파냐가 북미왕국에 북아메리카 지역의 권리를 넘긴 이후 다른 서양 나라들이 이 지역을 탐내 무단으로 점유하고 있다는 식으로 슬쩍 언급했을 뿐이지.
그러니 정성국에 의해 어느 정도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외무청 관리들은 에스파냐인들을 무척 뻔뻔하고 거짓말만 일삼는 못 믿을 족속으로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더불어 새진주가 건설되고 플로리다 지역에 진출한 이후에 과연 에스파냐가 뭐라고 둘러댈지 궁금해하는 외무청 관리들도 있었고.
이 일을 빌미로 나중에 에스파냐를 압박해 이득을 취하겠다고 벼르는 외무청 관리들도 꽤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아카풀코 조약을 통해 넘긴 북아메리카의 권리는 에스파냐를 제외하면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권리라 북미왕국은 사기를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아무튼, 현재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과연 에스파냐인들이 이 브레다 조약을 제대로 이야기해줄까 싶은 정성국이었다.
‘북미왕국의 존재로 인해 네덜란드가 뉴암스테르담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그래야 북미 동해안 지역에서 잉글랜드가 독주하지 못할 테고.’
네덜란드는 지금 시점에선 강력한 해상 강국이었다.
물론 훗날 4차 영란전쟁에서 패한 이후에는 강국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지만 지금 시기만 하더라도 강력한 해군을 자랑하며 잉글랜드의 해군을 박살 내는 중이었으니 이러한 네덜란드가 잉글랜드를 꾸준히 견제해 준다면 북미왕국 입장에서는 나쁠 것이 없었다.
더불어 그런 상황이라면 도중에 끼어들어 중간에서 이득을 취하기도 쉽고.
하지만 에스파냐의 상황을 볼 때 이들이 순순히 이야기해줄 것 같지는 않으니 시간이 걸리겠지만 원상을 통해 네덜란드의 상인들에게 이를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정성국은 푸른 안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아무튼, 장인어른. 이번에도 새진도까지 가서 직접 협상을 진행하느라 고생하셨으니 당분간은 이곳 새한성에서 지내세요. 슬슬 하얀 들꽃의 출산일도 다가오니 말입니다. 손자는 보셔야 할 것 아닙니까.”
이런 정성국의 말에 푸른 안개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 물론입니다. 전하. 당연히 그래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