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1668년 새해가 시작되어 청장들과의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정성국은 차마 발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새 생후 2달이 된 아기는 눈을 뜨고 전아라의 품에서 꼼지락거리며 정성국과 옆에 있는 하얀 들꽃을 번갈아 바라보며 방긋방긋 웃고 있었으니까.
더불어 조막만 한 손으로 정성국의 손가락을 살짝 쥐고 있었으니 차마 이를 뿌리치고 회의실로 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정성국이었다.
이 모습을 보고 전아라가 쿡쿡거리고 웃으면서 정성국을 재촉했다.
“슬슬 청장 회의에 참석하셔야죠. 오라버니.”
정성국은 아기에게 눈을 떼지 못하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그럼요. 오라버니. 이제 슬슬 나가셔야 해요.”
전아라의 재촉에 정성국은 살짝 울상을 지으며 아기가 잡은 손가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그래야 하는데 말이지...안문이가 이렇게 가지 말라며 내 손가락을 잡아주고 있으니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될까?”
하지만 전아라는 단호하게 쳐내버렸다.
“가지 말라며 잡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손에 무언가 잡히는 게 있으니 잡고 있는 것뿐이랍니다. 확대해석하지 마시고 빨리 일어나시죠?”
“으음...”
정성국이 마지못해 슬쩍 손가락을 빼자 아기는 손바닥이 허전한지 잠시 손을 바동거렸고 이에 다시 정성국이 슬쩍 손가락을 집어넣으려 할 때 하얀 들꽃이 자신의 손가락을 아기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아기는 하얀 들꽃의 손가락을 꼭 쥐었고 하얀 들꽃은 그런 아기의 반응에 귀여워 어쩔 줄 몰라했다.
“아...너무 귀여워요. 형님.”
“안문이도 하얀 들꽃이 좋은가보다. 그렇지?”
아라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모양인지 다시 하얀 들꽃을 보며 방긋 웃는 아기의 모습에 하얀 들꽃은 자지러졌고 소외당한 정성국은 입이 쭉 튀어나왔다.
이를 보고 아라는 피식 웃으며 정성국을 재촉했다.
“안문이는 이렇게 저하고 하얀 들꽃과 함께 시간을 보낼 테니 오라버니는 어서 회의실로 가셔요. 지금 가도 늦을 거 같은데...”
이에 정성국은 아기에 시선을 떼지 못하며 투덜거렸다.
“쳇...알았어. 알았다고.”
정성국은 조심스럽게 아기의 머리카락을 한번 쓰다듬어준 후 자리에서 일어나 아라와 하얀 들꽃을 가볍게 안아준 후 발걸음을 옮겼다.
“끙...다녀올게.”
응접실을 나가는 정성국을 보고 전아라는 아이의 손을 잡고 흔들면서 정성국을 배웅했다.
“다녀오세요. 오라버니.”
“다녀오세요. 전하.”
전아라와 품 안의 아기, 그리고 하얀 들꽃이 자신을 배웅하는 모습을 보고 정성국은 잠시 행복한 미소를 짓다가 응접실을 나오면서 투덜거렸다.
“하아...오늘처럼 회의에 참석하기 싫은 것도 처음이네.”
그렇게 응접실에서 나온 이후 정성국은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발걸음을 놀려 청장들이 기다리고 있던 회의실에 도착해 청장들에게 늦어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회의를 시작했다.
* * *
“허어. 드디어 북미왕국의 인구수가 100만을 넘었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행정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재작년 에스파냐와 전쟁 전의 북미왕국의 인구가 50만이 조금 넘었었다.
헌데 2년 사이에 인구가 2배로 늘어난 셈 아닌가.
물론 인구는 2배 늘어난 반면 실제 북미왕국의 영역은 몇 배로 늘어나 인구밀도는 더 희박해지긴 했지만.
하지만 그것을 떠나 최소한 자신을 북미왕국의 백성이라고 생각하는 인구가 100만이나 되었다는 점에서 무척 감회가 새로운 정성국이었다.
처음 개척촌에서 북미 지역에 도착해 새김포를 건설할 때만 하더라도 고작 1200명의 이주민으로 시작했었으니까.
거기에 부족 연합이라고 불리는 것 때문에 북미왕국이라고 칭했을 뿐이지 실제 인구 규모를 생각해보면 제대로 된 나라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시절도 있었으니.
물론 아직 갈 길이 멀긴 했다.
현재 조선의 인구가 1300만 정도로 짐작되고 굳이 인구가 많은 동아시아 국가가 아니라 북미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한 서양의 나라 중 가장 적은 인구인 잉글랜드마저 560만가량은 되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거기에 북미 지역이 어디 좀 크던가.
그것을 생각하면 1000만을 넘어 최소 1억은 넘겨야 하는 만큼 이 정도에 만족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정성국은 정신을 차렸다.
“보고서는 있나?”
“여기 있습니다. 전하.”
정성국은 행정청이 건네준 보고서를 훑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북미왕국의 인구는 100만을 넘어 110만에 근접해 있었는데 이는 정성국의 짐작대로 에스파냐와의 전쟁 이후 북미왕국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북미왕국으로 합류한 원주민들 때문에 폭발적으로 인구가 증가했다.
거기에 예전 아파치 족 일부가 북미왕국의 영역을 침범한 것을 탐사대를 동원해 철저하게 보복했고 이 일로 북미왕국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조그마한 소부족들은 북미왕국이 공격할까 두려워 북미왕국에 합류하는 경우가 많아 꾸준히 인구가 증가하는 상황이었다.
더불어 현재 새진주까지의 경로에 멕시코 원주민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길을 정비하고 병영과 마을을 건설하면서 주변 원주민을 끌어들일 생각이었으니 당분간은 가파르게 인구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또한, 새남포에 제지 공방을 세우는 것을 계기로 이곳의 원주민들도 본격적으로 북미왕국에 끌어들일 계획이라 웅크린 늑대가 직접 외무청 관리들을 이끌고 새남포로 향했으니.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아이누 부족 연합이 통째로 북미왕국에 합류해서 인구가 다시 확 늘었고...이것 참...덕분에 조선인들의 비율이 무척 줄었어.’
현재 조선인 출신 이주민은 6만 정도였다.
이주 초기에는 배가 부족해 많은 조선인을 이주시킬 방법이 없었고 지금에 와서는 배는 여유로운 편이었지만 조선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 매년 1만 정도의 유민들만 꾸준히 북미왕국으로 이주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북미왕국에서 조선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무척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조선인 출신 이주민도, 아이누인도, 이곳 원주민들도 다 같은 북미왕국의 백성이긴 했지만, 정성국은 조선인 출신이었고 전생의 기억도 있는 만큼 아무래도 조선인들에게 조금이나마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조선 정부의 눈치를 봐야 하는 만큼 당분간은 어쩔 수 없지만, 곧 경신 대기근이 닥칠 테니 이를 계기로 조선과 교류를 하면서 공식적으로 이주할 수 있게 협상을 하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그냥 혼란을 틈타 최대한 많은 유민을 빼돌리는 것이 나을까.’
단순히 경신 대기근만 생각한다면 혼란을 틈타 최대한 많은 조선인을 북미왕국으로 빼돌리는 것도 나쁠 것은 없었다.
어차피 경신 대기근이 시작되면 식량이 부족한지라 조선 정부에서는 원상이 유민들을 대거 빼돌린다는 사실을 알아도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갈 것이 뻔했으니까.
전생에서도 이 시기 유민들이 대거 간도로 넘어갔지만, 조정에서는 모르는 척 그냥 넘어갔으니.
그것을 생각하면 경신 대기근의 혼란을 틈타 최대한 많은 조선인을 북미왕국으로 이주시키는 것도 나쁠 것은 없었다.
전생에서 경신 대기근 당시 죽은 조선인이 100만에 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정성국이 이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기에 원상을 이용해 조선 팔도에 감자와 고구마를 비롯한 각종 구황작물을 퍼트리기도 했고 원상이 조선 팔도에 보유하고 있는 창고에 식량도 어느 정도 비축해두라고 명령하긴 했지만, 이것으로 경신 대기근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경신 대기근 당시 이상기후가 빈번해 대표적인 구황작물인 도토리를 비롯한 각종 구황작물도 제대로 자라지 못해 무용지물이었다는 기록이 존재하니.
그런 만큼 경신 대기근이 시작되면 조선 팔도가 혼란에 빠질 테고 이 기회를 틈타 작정하고 조선인들을 이주시킨다면 꽤 많은 조선인을 이주시킬 수는 있어 보였다.
지금도 꾸준히 선박을 건조하고 있고 다행스럽게도 최근 아이누 부족 연합의 영역이 북미왕국의 영역이 되어버려 가까운 곳에 거점이 생긴 셈이었으니.
일단 모든 배를 동원해 조선인들을 아이누 섬에 이주시킨 후 천천히 북미왕국 본토로 옮기면 그만 아닌가.
그러니 정성국이 결단만 내린다면 단기간에 수십만의 조선인을 북미왕국으로 이주시킬 수도 있어 보였다.
물론 이렇게 되면 훗날 원상의 입지가 좁아질 우려가 있었고 그 이후에는 조선인들을 쉽사리 북미왕국으로 이주시킨 어려울 것이 뻔했다.
더불어 조정에서 북미왕국과 원상을 무척 경계할 테고.
다만 그 정도라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조선의 대기근이 이게 끝이 아니라는 점에서 조금 걸리는 정성국이었다.
‘조선의 3대 대기근 중 끝판왕인 을병 대기근이 남아있으니...’
숙종 때 발생하는 을병 대기근은 조선의 3대 대기근 중 가장 마지막에 발생했고 피해도 가장 컸다.
조선의 첫 번째 대기근인 계갑 대기근 당시 70만 가까이가 굶어 죽고 두 번째 대기근인 경신 대기근 당시 100만 가까이가 굶어 죽은 것으로 추정하지만, 마지막 대기근인 을병 대기근 당시에는 4년간 지속적인 대기근으로 인해 공식적으로 140만의 조선인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 말은 실제 피해는 더 엄청나다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조선의 인구는 호적에 들어있는 인구만 계산한 것이라 실제 인구와는 차이가 컸다.
현재 조선의 인구는 공식적으로는 500만이 채 되지 않았지만, 실제 조선의 인구는 천만을 가볍게 넘는 것이 현실 아닌가.
거기에 호적에 들지 않은 태반이 여자나 아이, 유민이었으니 대기근으로 인해 이들의 피해가 더욱 클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학계 추정처럼 실제로는 400만에 가까운 인구가 사라졌다는 것도 과장은 아닐 것으로 생각하는 정성국이었다.
그런 만큼 훗날을 고려해서라도 조선과의 연을 아예 끊을 수도 없는 법이었다.
‘아무리 내가 이곳으로 이주했어도 조선 팔도에 인세의 지옥이 펼쳐지는 꼴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으니 간간이 개입하려면 기회를 봐서 공식적으로 조선과도 교류의 물꼬를 트는 것이 맞긴 한데...으...아쉽다. 조선인을 한 50만만 대거 이주시키면 숨통이 트일 것 같은데.’
원주민이 북미왕국에 합류하며 북미왕국의 인구가 증가하면 인구가 조금 증가하는 대신 영역이 넓어져 인구밀도는 더 희박해지는 상황이다 보니 조선 이주민이 무척 탐나는 정성국이었지만 어쩌겠는가.
훗날까지 고려해 북미왕국과 조선 둘 모두에 이득이 되는 방향을 선택하는 수밖에.
이에 마음속으로 아쉬움을 감추며 보고서를 내려놓은 정성국은 자신을 바라보는 청장들에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건 외무청의 공이 크다고 봐야겠지?”
분명 북미왕국의 식량 상황이 풍족해졌고 위생에 신경 쓰는 만큼 자연적인 인구 증가도 꽤 괜찮은 편이긴 했지만 이런 급격한 인구의 증가는 원주민 부족에 드나들면서 그들을 설득시켜 결국 북미왕국에 합류하게 만든 외무청의 공이 크긴 했다.
이는 다른 청장들도 인정하는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조용한 곰을 향해 박수를 보냈다.
““하하하.””
이에 항상 진중하던 조용한 곰은 쑥스러운 듯 슬쩍 미소지으며 고개를 숙였고 그런 조용한 곰을 웃으면서 바라보던 정성국은 시선을 돌려 회의실 안에 다른 청장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하지만 별다른 사고가 벌어지지 않는 건 행정청을 비롯한 모든 관리 전체가 노력한 덕분이겠지. 그동안 참으로 고생했고 또 북미왕국의 발전을 위해 애써줘서 고맙네.”
그러면서 정성국이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자 청장들은 기겁하며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아니옵니다. 전하.””
정성국은 그런 청장들을 보고 미소짓다가 자리에 다시 앉아 청장들을 다시 앉히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직 북미왕국은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자네들도 잘 알고 있으리라 보네. 100만이 아니라 1000만, 그리고 최소한 1억에 도달할 때까지는 쉬지 않고 달려야 할 거야.”
정성국 역시 과연 자신이 죽기 전에 북미왕국의 인구수가 1억을 넘길 수 있을까 싶긴 했지만, 목표야 크게 잡아 나쁠 것이 없었기에 이를 언급하자 청장들의 안색에 핏기가 기시기 시작했다.
“허어...”
그런 청장들을 보며 정성국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이곳은 조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한 지역 아닌가. 그러니 1억도 솔직히 부족한 감은 없지 않지.”
현재 청나라의 인구가 1억 5천에 가깝고 태평성대와 에스파냐를 통해 알려진 감자 옥수수 땅콩 등의 신대륙 작물로 말미암아 청나라 말기에는 더욱 인구가 증가해 4억이 넘어가는 것을 생각해보면 북미 지역의 인구 1억도 그렇게 많은 편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거기에 전생의 미국의 인구가 3억에 가깝고 캐나다의 인구도 3천에 가까운 것을 생각해보면.
그렇기에 정성국은 최소한으로 1억을 잡고 이야기했지만, 조선 출신 관리들은 기겁했고 조용한 곰은 상상도 되지 않는지 멍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그런 청장들을 바라보며 정성국은 슬쩍 웃었다.
“그러니 그 전까지는 꽤 고생해야 할 거야. 마음 단단히 먹도록 하게. 북미왕국의 발전을 위해서 말일세.”
정성국의 말 속에 깃든 단호한 어조에 청장들은 한숨을 쉬며 포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전하.””
그런 청장들의 반응에 정성국은 씩 웃었다.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회의를 시작해 보자고.”
그렇게 의욕을 불태우는 정성국에게 잡힌 청장들은 새벽이 되어서야 회의실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