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정평국은 정성국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지새웠다.
그동안은 서로가 바빠서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했기에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러다 새벽에 갑자기 분만실 안쪽이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했고 이에 정성국은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녀가 복도에서 응접실로 들어와 김 의원에게 다가가 조용히 무어라 이야기하자 김 의원이 슬쩍 일어났기에 정성국이 그를 바라보자 김 의원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슬슬 출산이 시작되는지라 만약을 대비해 저도 복도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전하.”
“아...그러도록 하게.”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시 불안해하자 정평국이 애써 정성국을 달래주려 애썼다.
그렇게 시간이 꽤 흐른 후 아침이 다가왔을 때 안쪽이 무척 부산스럽더니 작게나마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복도와 연결된 응접실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김 의원이 활짝 웃으며 정성국에게 다가왔다.
“경하드립니다. 전하. 아라님께서 원자님을 생산하셨습니다.”
“아...그럼 아라는?! 아라는 괜찮은 거지?!”
“기진맥진해 계십니다만 건강에는 크게 이상이 없습니다. 전하.”
김 의원의 대답에 정성국은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지 자신도 모르게 휘청거렸고 그런 정성국을 옆에 있던 정평국이 잡아주었다.
“경하드립니다. 형님.”
“그...그래. 고맙다.”
처음엔 아이가 생긴다는 사실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아라 걱정을 우선했던 정성국이었지만 정작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아라와 아이를 빨리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래서 곧장 분만실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김 의원이 이를 막았다.
분만 직후의 감염 문제와 산후조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무엇보다 강조한 것이 정성국이었기에.
“잠시 고정하시옵소서. 전하.”
“아...알겠네.”
이미 위험한 순간은 어느 정도 지났기에 기다리면서 정성국이 싱글벙글대자 정평국이 그런 형을 보며 피식 웃으며 놀려댔다.
그렇게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 아이를 적당히 씻기고 초유를 먹인 후에야 비로소 잠시 정성국이 분만실로 입장할 수 있었다.
분만실에 마련된 커다란 침상에서 완전히 기진맥진해있는 전아라의 모습을 보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정말 고생 많았어. 아라야.”
“아...오라버니? 아니에요.”
정성국을 보고 희미하게 웃는 전아라였고 그런 전아라의 모습에 정성국은 울컥했다.
“많이 힘들었을 테니 일단 푹 쉬어라.”
“알겠어요. 오라버니. 헌데 오라버니. 아이를 함께 보고 싶어요.”
그러자 옆에 있던 산파가 강보에 싸인 아기를 조심스럽게 정성국에게 넘겨주었다.
정성국은 엉거주춤하게 아이를 받아 들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정성국의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아기는 갓 태어나서인지 쭈글쭈글해서 썩 귀엽지는 않았지만, 정성국은 전생에도 갖지 못했던 자신의 아이가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에 자신도 모르게 입이 귓가에 걸린 채로 한참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아. 알았어.”
정성국은 조심스럽게 아라가 누운 침상 옆에 엉덩이를 대고 아라의 옆에 앉았다.
아라는 정성국의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아이를 보다가 중얼거렸다.
“오라버니. 헌데 보세요. 아이가 쭈글쭈글한 게 영 못생겼어요. 어쩌죠?”
그런 아라의 말에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갓 태어나서 그렇지. 조금 시간이 지나면 살이 올라 통통해질 거야. 그러면 귀엽겠지?”
“그럴까요...?”
“그럼. 특히 엄마가 미인이니 이 녀석도 미남일걸?”
정성국의 말에 전아라는 다시 희미하게 웃다가 정성국의 품 안에 있는 아기를 바라보다 문득 생각이 난 듯 물었다.
“헌데 오라버니. 아이의 이름은...?”
“안문이라고 하자. 정안문.”
“안문...좋은 이름이네요. 알겠어요. 오라버니.”
* * *
정성국의 아이가 무사히 태어났다는 사실은 곧장 북미왕국 전역으로 알려졌다.
애초에 전아라가 산통이 시작된 직후부터 청장들은 회의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정성국의 첫 아이인 만큼 당연했다.
특히 정성국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청장들이었기에 이 아이의 성별이 무엇이든 후계자가 될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기에.
그런 만큼 후계자의 탄생에 대비해 회의실에서 업무를 처리하며 대기하고 있던 청장들이었고 아이가 태어나자 호위대장이 이 소식을 그들에게 알렸다.
이에 청장들은 산모와 아이 모두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드디어 북미왕국의 후계자가 탄생했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동시에 이를 북미왕국 전체에 알리고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는 축제를 열기로 했다.
그리고 축제와는 별개로 관리들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새한성의 백성들은 하나둘 궁궐 앞에 모여 왕실의 새로운 일원이 탄생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고 북미왕국의 왕실이 번영하기를 기원했다.
* * *
“원자님의 탄생을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전하.”
정성국은 환하게 웃는 연구청장을 보고 기쁨을 참지 못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고맙네. 고마워. 이제 아이가 잘 자라기만 하면 되겠지.”
“원자님께선 분명 무탈하게 자라실 겁니다.”
정성국은 연구청장의 덕담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집무실의 의자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암. 그래야지. 그보다 보고할 것이 있다고?”
이에 연구청장은 씩 웃으면서 보고했다.
“그렇습니다. 전하. 드디어 새로운 종이를 개발해내었습니다.”
그러면서 연구청장이 들고 온 회색빛의 종이를 정성국에게 넘겨주었다.
종이 개발을 명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개발될 줄은 몰랐기에 정성국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연구청장이 건네준 종이를 받아들었다.
“아...이게 이번에 발명된 종이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이번에 연구한 종이는 목재를 기계적으로 분쇄해 그대로 사용하는 방식이었을뿐더러 종이를 제조할 때 종이의 표면에 아무런 처리를 하지 않았기에 하얗지도 않아 전생의 신문지와 무척 비슷했다.
이에 정성국은 미소를 지으며 이를 만져보다가 집무실 책상 위에 올려놓고 글을 써 보았다.
종이의 질 자체는 좋지는 않은 편이라 살짝 걱정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쓰는 데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기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연구청장을 바라보았다.
“이거 생각보다 괜찮은데? 대량 생산은 가능하지?”
“물론입니다. 대량 생산이 가능한 공정까지 함께 연구하느라 장인들과 연구원들이 무척 고생했었으니 말입니다.”
연구청장의 말에 정성국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북미왕국은 종이 전체를 조선에서 수입해오고 있었지만 한지의 물량 자체가 많지 않고 가격이 비싸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책의 생산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기껏 원주민들에게 말과 글을 가르쳐놓고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새로운 종이를 개발했고 또 이 종이는 무척 값싸게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으니 이젠 인쇄술만 발달하면 책을 미친 듯이 찍어내어 북미왕국 전체에 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면 책을 통해 지식을 얻을 수 있을 테고 자연스럽게 북미왕국 백성들의 지식수준은 올라갈 테니 북미왕국은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전생에서 구텐베르크를 지난 천 년간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인쇄기를 발명해 인쇄기가 대중에 퍼졌고 그 덕택에 지식의 전파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학문의 발전이 더욱 가속화되어 유럽 역사 자체가 뒤바뀌어 버렸으니.
이러한 흐름을 북미왕국도 조만간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한 정성국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종이의 질이 썩 좋지 않아 한지처럼 문서를 장기 보관하기는 어렵다는 점이지만 이것은 종이 생산 단가가 워낙 값싼 만큼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흐음...종이의 질을 생각하면 공문서야 계속해서 조선에서 수입해오는 한지를 사용해야겠지만...그래도 쓰임새는 꽤 많겠어.”
연구청장도 그 부분은 이견이 없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한지와 이번에 개발한 새로운 종이는 쓰임새가 달랐고 한지의 대체재라기보다는 보완재에 가까웠다.
“그렇습니다. 전하.”
연구청장이 동의하자 정성국은 잠시 이 제지 공방을 세울 장소를 고려해보았지만, 이 제지 공방이 들어설 장소는 산림 자원이 풍부한 새남포에 건설하는 것이 나았다.
더불어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새남포 인근의 원주민들을 북미왕국으로 끌어들일 기회였고.
새남포가 건설된 이후로 새남포 인근 원주민들이 꾸준히 새남포로 유입되며 계속 커지고 있었다.
특히 제재소와 조선소가 들어서면서 많은 일자리가 생기고 새남포 인근의 원주민들이 이 일자리를 얻어 일하면서 충분한 식량을 받는 것을 확인한 주변 원주민 부족들은 북미왕국으로 합류 의사를 밝히면서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주기를 원했다.
그런 만큼 새남포에 제지 공방을 세운다면 새남포를 거점으로 더 많은 원주민 부족들을 자연스럽게 북미왕국에 합류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정성국이었다.
“그럼 일단 종이의 원료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새남포에 제지 공방을 크게 세우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전하.”
“그리고...인쇄기의 개발은 어떻게 되어가나?”
대량 생산이 가능한 새로운 종이의 개발을 연구청에 맡기면서 당연히 인쇄기의 개발 역시 함께 연구하게 명령했었다.
이미 금속활자를 이용해 인쇄하는 방식이 존재했지만, 이는 사람 손이 많이 필요했고 인쇄량의 한계도 명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종이가 개발되었으니 인쇄기가 필요했기에 정성국이 이를 묻자 연구청장은 살짝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하께서 말씀해주신 수작업 방식의 인쇄기는 개발이 완료되었습니다만 증기기관을 사용하는 방식은 현재 연구 중입니다.”
이에 정성국은 놀라 되물었다.
“그래? 수작업 방식의 인쇄기는 개발이 끝났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연구청장이 확답하자 정성국은 무척 기뻐했다.
연구청장이 이야기한 수작업 방식의 인쇄기는 바로 구텐베르크가 약 200년 전 개발한 구텐베르크 인쇄기였기 때문이다.
정성국은 기억나는 전생의 인쇄기 발달 과정을 쭉 적어 연구청의 인쇄기를 연구하는 연구원들에게 보냈는데 오히려 이 때문에 연구원과 장인들은 증기기관을 사용하는 인쇄기를 정성국이 원하는 인쇄기로 생각하고 수작업 방식의 인쇄기는 개발했어도 보고조차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연구원들이나 장인들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북미왕국의 공방 대부분은 증기기관의 동력을 이용해 물품들을 대량생산하는 만큼 당연히 인쇄기도 증기기관의 동력을 이용해 대량으로 인쇄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깨닫고 정성국은 이들의 착각에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증기기관을 사용하는 인쇄기가 수작업 방식의 인쇄기에 비해 훨씬 많은 양의 인쇄가 가능하긴 했고 이 때문에 장인들에게 보낸 보고서에도 이를 언급한 것이기는 하나 수작업 방식의 인쇄기만 하더라도 기존의 방식보다는 일손도 덜 수 있고 더 많은 인쇄가 가능하니까.
그리고 만약 인쇄기의 개발이 지지부진하다면 에스파냐를 통해 유럽의 인쇄기를 사와 이를 분석해 복제하는 것도 고려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점에 만족스럽기도 했고.
“그것만 해도 당장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테니 그게 어디인가. 거기에 종이 개발 시기와 맞물렸으니 다행이로군. 일단 증기기관 방식의 인쇄기는 계속해서 연구하도록 하도록 하고...이미 개발된 수작업 방식의 인쇄기를 대량 생산하도록 하게. 아. 이 종이를 사용해서 제대로 인쇄가 되는지 일단 확인부터 하도록 하고.”
이에 연구청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정성국을 보고 물었다.
“알겠습니다. 전하. 헌데 무엇을 인쇄해야 합니까?”
연구청장의 물음에 정성국은 이 기회에 신문을 만들어볼까 싶었지만, 당장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교육청장과 상의해서 교과서부터 인쇄하도록 하게.”
아쉽게도 한지의 가격과 수량 때문에 학생들 전체에게 교과서를 지급해주지는 못하는 상황이었다.
최근 교육 체계를 정비했음에도 학생들이 보고 배울 교과서가 부족하다는 점이 걸렸던 정성국이었기에 이를 먼저 언급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