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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157화 (157/850)

157화

생각보다 진통이 길었기에 정성국은 오랫동안 응접실에서 서성거리며 기다렸다.

저녁이 되자 하얀 들꽃이 전아라와 아이가 걱정되었는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정성국이 서성거리고 있던 응접실에 찾아왔기에 잘 달래서 다시 침실까지 함께 이동하며 대화를 잠시 나누었고.

하얀 들꽃을 침실에 데려다준 후 다시 응접실에 도착해 서성거리기 시작했을 때 뒤편에서 누군가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형님.”

정성국의 뒤를 돌아보자 정평국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 왔냐?”

정성국은 손을 들어 정평국을 반겼지만 정평국은 물끄러미 정성국을 바라만 보았다.

“왜?”

이에 정평국은 피식 웃었다.

“형님이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일 줄은 미처 몰라서 말입니다.”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이 북미 땅을 탐사하러 갔을 때도, 그리고 에스파냐와의 전쟁에 직접 친정을 했을 때도 이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던 정성국이었다.

헌데 곧 아이가 태어난다는 소식에 이렇게 응접실에서 계속 서성거리며 불안을 떨치지 못하는 얼굴을 한 형을 보니 오히려 신기하기도 했고 형도 사람은 사람이구나 싶은 정평국이었다.

정성국은 정평국의 말에 인상을 확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야. 너는 뭐 다를 거 같으냐. 나중에 두고 보자.”

“하하하.”

정평국이 웃자 정성국은 그의 반응에 살짝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평소라면 누군가를 만날 수 있게 일이나 줄여달라고 투덜거렸을 동생이 그저 웃기만 했으니까.

“어쭈? 투덜대지 않는 거 보니까...상대가 있는 모양이다?”

정평국은 그저 빙긋 미소 지었고 이런 동생의 반응에 정성국은 화들짝 놀라 급히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잡았다.

“어라? 야. 진짜 있냐? 드디어 너도 장가가는 거냐? 상대는 누군데?”

이에 정평국은 계속 미소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요새 이상하게 마음 가는 사람은 있습니다만...아직 혼인까지 생각한 것은 아니라서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형님.”

이곳 북미왕국에선 성인들이 꽤 자유롭게 연예를 하고 혼인을 하는 편이었다.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는 조선인들은 주로 유민 출신이었고 원주민들도 꽤 자유분방했었기에 함께 지내면서 서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알고 있는 정성국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정평국의 어깨를 툭툭 친 후 팔을 풀었다.

“끙...그래라. 뭐 내가 괜히 왈가왈부할 생각 없고 네가 누구랑 혼인하든 환영할 테니 결정되면 언제든 이야기하거라. 괜히 정략결혼이니 뭐니 생각하지 말고.”

실제로 정평국 역시 왕실의 일원이었기에 혼사에 개입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소리가 있긴 했다.

정성국과 마찬가지로 정평국 역시 조혼 풍습이 만연한 조선인들이 보기엔 홀아비나 다름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왕실의 번영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정평국을 혼인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정성국은 개인사에 개입할 이유는 없다며 일축했다.

이를 알고 있던 정평국은 형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형님. 하지만 정략결혼도 썩 나쁜 것은 아니잖습니까. 하얀 들꽃님과도 잘 지내시고.”

“그거야...야! 내가 말한 건 그 뜻이 아니잖아! 확!”

정평국이 자신의 말에 꼬투리를 잡자 버럭 소리치는 정성국을 보고 정평국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하하하. 이제 좀 진정이 되셨습니까.”

그제야 정성국은 정평국이 왜 꼬투리를 잡았는지 이해하고 응접실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으면서 동생을 바라보았다.

“끙...내가 그 정도로 불안해 보였냐?”

“무척이나요. 그래서 놀란 겁니다. 형님이 그런 모습을 처음 봐서요.”

이에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했다.

정성국으로서는 아무래도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전생에 비하면 이 시대의 출산은 위험한 편이었으니까.

만약의 사태에 개입할 여지도 적었고.

거기에 간간이 시녀들이 드나들면서 문이 열릴 때마다 아스라이 들리는 전아라의 신음에 자신도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생긴 것이다.

이 때문에 더욱 과도하게 긴장했던 정성국은 정평국과 대화를 나누며 조금이나마 긴장을 풀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난 정성국은 동생을 보고 물었다.

“그래. 별일은 없을 테고...아. 그러고 보니 카페. 아니 찻집은 어떻게 되었지?”

“아...그 커피만 제공하는 찻집 말이군요.”

정평국은 화폐제조에 관한 일과 더불어 국영 상단의 일도 일부 관여하고 있었다.

처음엔 원상을 확장해 맡길까 했지만, 가뜩이나 인력난에 시달리는 원상이었을뿐더러 원상의 주요 활동 지역은 아시아였기에 따로 국영 상단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잉글랜드의 상인에게 커피를 선물 받은 후로 청장들을 비롯한 주변 인사에게 커피를 나누어주긴 했지만, 창고에 쌓인 커피는 많았고 이를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정성국은 국영 상단에 명해 카페를 차린 것이다.

국영 상단이 나설 일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어쩌겠는가.

아직 커피는 생소했고 북미왕국에 차를 마시는 문화는 정착하지 않았으니 정성국이 직접 개입하는 수밖에.

더불어 원주민들이 워낙 술을 좋아하는지라 이를 대체할 음료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기에 정성국은 이 커피가 술을 대체하길 바라기도 해 이를 국영 상단에 맡겼다.

“일단 이곳 새한성의 청사들이 인접한 곳에 건물을 하나 개조해서 준비 중입니다. 현재 직원들에게 커피를 제대로 내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으니...곧 찻집을 열 수 있을 겁니다.”

“그래?”

“더불어 형님께서 조언해 주신대로 커피에 곁들일 다과도 개발 중이고...다만 의외로 수요가 좀 있을 듯해서 안정적으로 커피를 수입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어? 그래?”

이에 정성국은 살짝 의아한 기색이었다.

생소한 음료였기에 당분간은 잉글랜드 상인이 선물해 준 커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었기에.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정평국은 슬쩍 웃음 짓고 말했다.

“관리들에겐 이미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형님께서 커피를 무척 좋아하신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호기심에라도 한 번쯤은 마셔보려 하겠지요. 그리고 그 커피라는 음료에 각성효과도 있는지라 일에 치여 사는 관리들과 연구원들은 꽤 좋아할 것 같긴 합니다. 뭐 문제라면 그들이 과연 차를 즐길 시간이 있을까는 둘째치고.”

“아...그건 종이컵...은 당장 만들긴 어렵겠고...음...쉽게 들고 다닐 수 있는 가벼운 잔을 따로 만들면 될 것 같은데.”

전생의 텀블러같이 적당히 얇고 가벼운 금속 잔을 만들고 이곳에 커피를 담아주면 테이크아웃도 가능할 것 같아 이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정성국의 말에 정평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그러면 되겠군요. 다만 이건 연구청의 장인들과 상의해 연구를 좀 해야겠습니다. 더불어 제대로 된 커피 공급처가 생기기 전까지는 이 방식은 보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에 정성국은 그럴 필요가 있느냐는 느낌으로 정평국을 바라보았다.

“커피야 원상을 통해 홋카이도를 방문하는 잉글랜드의 상인에게서 수입하면 되지 않나?”

“그렇긴 합니다만...일단 협상을 해봐야지요. 저들이 폭리를 취할 수도 있는 법이라.”

정평국의 말에 정성국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건 그렇지. 하지만 그래도 커피는 다른 차와는 달리 오래 내버려 두면 오히려 맛이 없어지니 이번에 받은 물량은 1, 2년 내로 다 처리해야 할걸?”

“형님께서 국영 상단에 넘겨주신 물량은 찻집만 운영한다 해도 1년 내로 충분히 소모할 수 있어 보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그럼 다행이고...당분간은 잉글랜드 상인들에게 커피를 수입하고...나중에 하와이에서 커피가 생산되기 시작하면 이 하와이산 커피로 물량을 조금씩 대체할 수 있을 거야.”

정성국의 말에 정평국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생각이 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 근데 이 커피는 이곳 북미왕국에선 자라지 않는 겁니까?”

“아아. 아마 기후가 맞지 않을 거야. 하와이나 멕시코처럼 이곳보다 남쪽에서나 재배가 가능할 거야.”

엄밀하게 따지자면 전생에 커피를 생산하던 섬은 현재 북미왕국과 교류하고 있는 오아후 섬이 아니라 그 밑에 위치한 빅아일랜드 섬이었다.

이곳의 코나 지방은 커피 재배의 이상적인 기후, 해발고도, 화산재 토양, 일조 조건을 두루 갖추어 뛰어난 커피를 생산했고 그 외의 섬에서 나는 커피는 좋은 취급을 받지는 못했다.

이를 대충 알고 있던 정성국이었지만 그렇다고 기호품인 커피를 위해 하와이 제도 중 가장 큰 섬인 빅아일랜드 섬을 무력으로 점령할 생각은 없었다.

거기에 북미왕국의 지원을 받아 오하우 섬을 완벽하게 장악한 북미왕국과 교류하던 원주민 부족도 오하우 섬을 장악한 것으로 만족하고 다른 섬을 침공할 생각은 없어 보였기에 그저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하우 섬에서 커피가 재배되고 그것으로 북미왕국과 교역을 하며 발전하는 것을 다른 섬의 원주민들이 알게 된다면 그들도 오하우 섬의 원주민을 따라 커피를 재배하면서 북미왕국과 교역을 하려고 할 테니 그때 자연스럽게 다른 섬의 원주민과 교류할 생각이었다.

“아쉽군요.”

정성국의 대답에 정평국은 아쉽다며 투덜거렸다.

정평국이 보기에 이 커피는 꾸준히 소비될 것처럼 보였기에 이것이 북미왕국에서 자라지 않아 결국 수입해야 한다는 점을 아쉬워한 것이다.

하지만 정성국은 오히려 그 때문에 하와이 섬의 원주민들과 계속 교류할 수 있을 테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가뜩이나 사람이 부족한데 커피 재배에 인력을 투입하라고? 아서라.”

정평국 역시 북미왕국의 현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입맛을 다셨다.

“쩝...그건 또 그렇긴 합니다만...훗날을 고려해야죠. 훗날을.”

그런 정평국의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훗날이라...과연 북미왕국에 인구가 넘치는 날이 오려나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정성국은 머릿속으로 커피를 재배할만한 땅을 고려해보기 시작했다.

‘하와이처럼 고급 커피가 생산되는 섬이 바로 자메이카였지? 지금 이곳이 잉글랜드의 영토이긴 할 텐데...뭐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이곳을 얻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북미지역에서 가깝고 전생에서 고급 커피로 유명했던 섬이 바로 서인도 제도의 자메이카였다.

물론 고작 커피를 재배할 땅을 얻기 위해 이미 잉글랜드가 점령한 자메이카를 노린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북미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려면 결국 북미 동해안에 식민지를 건설한 잉글랜드와 프랑스와는 어떻게 해서든 결판을 내야 했다.

특히 아직 자국민을 이주시키는데 큰 관심이 없는 프랑스와는 달리 잉글랜드의 경우는 꽤 많은 자국인을 북미 동해안 지역에 이주시켜 식민지를 건설 중이었으니 가능한 한 빨리 이를 해결하지 않으면 훗날 골치 아파질 공산이 컸다.

문제는 내륙을 통해서 이동하며 원주민과 교류해 이들을 북미왕국에 합류시키는 방식으로 북미왕국의 영역을 넓히기엔 북미지역이 너무 광활해 프랑스나 잉글랜드의 식민지까지 도달하기에는 한세월이 걸릴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차지하고 있는 영역을 얻는 일이 더욱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는 정성국이었다.

특히 프랑스면 모를까 잉글랜드는 이주민을 꾸준히 보내 결국 북미 동해안에 건설된 식민지를 자국인들로 채워버리는 만큼.

그 때문에 새진주가 건설되고 3함대가 창설되면 잉글랜드와 프랑스와 직접 접촉해 더 많은 서양인이 북미지역에 정착하기 전에 협상해서 어떻게든 북미지역 전체를 북미왕국의 땅으로 만들 생각이기는 했다.

다만 과연 평화적인 협상을 통해 가능할까 싶기는 했고 이 때문에 여러 가지 방법을 고려하고 있었던 정성국이었다.

그중에는 유럽의 정세를 파악해 기회를 봐서 잉글랜드와 전쟁을 벌이는 것도 있었고.

그런 상황이 펼쳐진다면 기회를 봐서 서인도 제도의 잉글랜드가 장악한 몇몇 섬도 함께 공격해 가져오는 것도 나쁠 것은 없겠다 싶은 정성국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길래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십니까?”

“아. 별거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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