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흑선이 무리 지어 다닌다?”
“그렇습니다. 쇼군 전하.”
막부의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아베 다다아키의 보고를 듣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기존에도 에조 지역을 순찰하던 흑선이 있지 않았나? 혹시 그것을 착각한 것은 아니고?”
원정이 실패로 돌아간 후 어쩔 수 없이 아이누인들과 협상을 했고 그 후 막부는 에조 지역에 손을 뗐다.
그 이후로 그들과의 교류는 전무 했고.
하지만 아예 이 지역에 관심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막부가 에조 지역을 다시 차지하기 위해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아이누인들 뒤에 있는 정체불명의 세력을 파악하기 위해 꾸준히 정보 수집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마쓰마에 항에 정박하며 가끔 에조 지역 남쪽을 순찰하는 흑선의 존재는 이미 알고 있었고 이를 언급한 도쿠가와 이에쓰나였다.
이에 아베 다다아키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쇼군 전하. 기존에도 에조 지역에 흑선이 돌아다니곤 했지요. 하지만 기껏해야 한두 척에 불과했습니다만 이번에 보고된 내용은 10척에 가까운 흑선이 무리 지어 나타난 것을 어부들이 관찰했다는 내용입니다.”
아베 다다아키의 보고에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표정은 살짝 굳었다.
비록 방심했다고는 하나 고작 한 척의 함선에 의해 수많은 배가 침몰하고 피해가 막심했던 것이 떠올랐기에.
그리고 그러한 흑선이 갑자기 늘어났다는 보고에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표정이 좋을 수는 없었다.
“으음...혹시 저들이 우리의 배를 공격한 건가?”
“그것은 아닙니다. 쇼군 전하. 그저 본토와 에조 지역 사이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을 어부들이 목격하고 이를 보고한 것이지요.”
아베 다다아키의 보고에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살짝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흐음...”
그런 반응에 아베 다다아키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 보고를 듣고 히로사키 번에서 에조 지역 인근에 어선들을 보내 정찰한 결과 마쓰마에 항에 정박하고 있는 흑선의 수가 늘었다는 보고입니다.”
기존의 마쓰마에 항에 정박하고 있던 흑선 한 척의 존재도 껄끄러웠는데 이곳에 정박하고 있는 흑선의 수가 늘어났다는 보고에 다시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얼마나?”
“기존에는 흑선 한 척만 대기하고 있었지만, 히로사키 번에서 정찰한 결과 기존의 흑선 2척과 그보다 작은 흑선도 2척이나 더 정박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부들의 보고처럼 십여 척의 흑선이 모두 마쓰마에 항에 정박한 것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한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순간 멈칫했다.
“목격된 것은 10척 정도인데 히로사키 번에는 4척만 머문다고? 그럼 나머지는 어디로 간 거지?”
이에 아베 다다아키는 송구하다는 기색을 보이며 다시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아마 에조 지역 안쪽으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그곳까지는 어선을 보내 정찰할 수도 없으니...”
아베 다다아키의 대답에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조 지역 안쪽에 저들의 본거지가 있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으니 아마 나머지 흑선은 그쪽으로 향한 것이리라.
“으음...결국 에조 지역에 배치된 흑선은 늘어난 것으로 생각된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쇼군 전하. 그래서인지 히로사키 번을 비롯한 에조 지역 근처의 여러 번에서는 이를 불안해하며 만약을 위해 세키부네를 더 건조하고 있다고 합니다.”
히로사키 번을 비롯한 본토 북부의 에조 지역 근처의 번들은 에조 원정 당시 선박을 동원해 병력을 수송하다 흑선의 공격을 받았었기에 누구보다 흑선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고 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나마 지금까지는 마쓰마에 항에 머물며 주변을 순찰하는 흑선은 한 척에 불과해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지만, 수가 늘어났으니 주변 번주들은 내심 불안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러한 사정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는 아베 다다아키였고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이를 듣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뭐 흑선 한 척에 호되게 당했으니 불안해하는 것은 이해하지만...의미가 있나 싶군. 과연 저들이 우리를 공격할까? 난 아닐 거라고 보는데...”
분명 흑선의 전투력은 대단하긴 했다.
하지만 아예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상대하지 못하더라도 적당히 선박들을 붙여 시간만 끌면 그만이었다.
아니면 곳곳에 함대를 분산해서 동시에 에조 지역으로 향하던가.
저들의 수는 워낙 적었으니.
그것은 저들도 잘 알고 있으니 고작 10여 척의 흑선으로 막부에 덤비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한 도쿠가와 이에쓰나였고 그런 쇼군의 판단에 동의하는 아베 다다아키였다.
“소신 역시 그리 생각하옵니다. 쇼군 전하. 아무리 흑선의 전투력이 대단하다고는 하나 고작 10척 남짓으로 본토를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아베 다다아키의 판단 역시 자신의 판단과 같다는 사실에 만족하면서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주제를 돌렸다.
중요한 것은 흑선을 운용하는 아이누 부족 연합 뒤에 존재하는 정체불명의 세력이었으니까.
“그것보다...아이누 부족 연합 뒤에 있는 저들의 정체는 아직 파악이 안 되었나?”
이에 아베 다다아키는 조심스러운 얼굴로 잠시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런 아베 다다아키의 반응에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재촉했고 결국 아베 다다아키는 무척 조심스럽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쇼군 전하. 소신이 이야기하는 것은 확인된 사실이 아닙니다. 이를 고려해주십시오.”
“알겠네. 알겠으니 일단 이야기해보게. 추측이라도 좋으니.”
“알겠습니다. 쇼군 전하. 정확한 것은 아직 확인하고 있습니다만...화란(和蘭:네덜란드) 상인들의 말로는 아마 북미왕국이 아닐까 싶답니다.”
드디어 아이누 부족 연합 뒤에 버티고 있는 정체불명의 서양 세력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처음 듣는 이름에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미심쩍은 얼굴로 아베 다다아키를 쳐다보았다.
“북미...왕국? 처음 듣는 이름인데?”
그러한 쇼군의 의문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아베 다다아키였다.
“서양 세력에도 최근 알려진 나라라고 합니다.”
그 대답에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당황했다.
그가 알기로 구라파(歐羅巴:유럽)에는 여러 나라가 존재한다고 알고 있었고 북미왕국은 그중에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응? 그 북미왕국은 구라파에 있는 나라가 아닌 건가?”
“구라파 지역의 나라가 아니라 아미리가(亞米利加:아메리카)에 위치한 나라라고 합니다.”
아베 다다아키의 대답에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더욱 당황했다.
“잠깐. 아미리가? 그곳은 서반아(西班牙:에스파냐)의 땅이 아닌가?”
막부도 동쪽의 거대한 바다를 건너면 아메리카 대륙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에도 막부가 기독교를 금지하기 전까지는 에스파냐와도 교류가 있었고.
특히 1612년에는 유럽에 사절을 파견하기도 했었다.
이때는 에스파냐와 교류하던 시기였기에 에스파냐인들의 도움을 받아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에스파냐에 도착해 당시 에스파냐의 왕이던 필리페 3세를 알현하기도 했었으니.
하지만 에도 막부에서 정식으로 기독교를 금지하면서 에스파냐와는 자연스럽게 교류가 끊어졌지만, 당시의 기록은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도 알고 있었고 이 땅을 에스파냐의 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헌데 이곳에 또 다른 나라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그런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반응에 아베 다다아키는 손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슬쩍 닦은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미리가는 무척 넓은 곳이라 서반아를 비롯한 서양 세력도 그 존재를 몰랐던 모양입니다.”
“허어...”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그 대답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그런 쇼군의 반응에 아베 다다아키는 다음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그런 아베 다다아키의 반응에 무언가가 더 있구나 싶어서 그를 재촉했고 아베 다다아키는 결국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북미왕국이란 존재가 서양 세력에 알려진 것도 아미리가에서 북미왕국이 서반아와 전쟁을 벌여 승전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잠깐만. 서반아가 패했다고?”
이에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무척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록 종교문제로 인해 서반아와 교류가 끊어지긴 했지만 서반아는 서양의 강대국 중에 하나로 알고 있던 막부였다.
그런 서반아가 북미왕국에 패했다는 소리는 북미왕국 역시 서반아에 버금가는 강대국이라는 의미였고 이 강대국이 바다 건너 에조 지역까지 진출했다는 의미였으니.
아베 다다아키는 이왕 말을 한 김에 그가 화란 상인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모조리 할 생각이었는지 계속해서 입을 놀렸다.
“그렇다고 합니다. 아미리가 서쪽에 있던 서반아의 군선들이 침몰하고 해안가가 불타올랐다고 합니다. 서반아는 이를 버티지 못해 결국 북미왕국에 협상을 제의했다고 구라파에 알려졌다면서 화란 상인들이 전해주더군요.”
일본에 거주하는 네덜란드 상인들은 아이누인들 뒤에 있는 존재가 북미왕국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잉글랜드와는 달리 네덜란드는 막부의 눈치를 살피느라 함부로 아이누 부족 연합의 영역에 배를 보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존에 이곳 극동 지역까지 배를 보낼 수 있는 서양 세력은 무척이나 한정적이었다.
더불어 왜의 북동쪽에 위치한 아이누 부족 연합에 총포를 지원하고 함선까지 지원할 수 있는 세력은 자신들을 제외하면 거의 없었고.
그렇다 보니 데지마에 거주하는 네덜란드인들은 아이누 부족 연합 뒤에 있는 세력의 정체를 무척이나 궁금해하긴 했다.
그리고 최근 본국에서 전해온 소식을 통해 북미왕국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이들은 아이누 부족 연합 뒤에 존재하는 세력이 북미왕국이라고 확신했다.
기존의 항로가 아닌 태평양을 건너왔기에 자신들이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라며 혀를 차고 곧바로 자신들과 연결된 관리들에게 이를 전했으며 이것이 아베 다다아키에게도 전해진 것이다.
이를 보고받고 북미왕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려 다시 네덜란드의 상인들을 만났지만 애초에 자신들의 본국에도 최근 존재가 알려진 북미왕국에 대한 정보가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는가.
별다른 소득이 없었기에 보고를 고민하다가 결국 이번에 쇼군에게 보고한 아베 다다아키였다.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아베 다다아키의 말이 모두 끝나자 꽤 충격을 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비록 정체불명의 세력이 껄끄럽기는 했지만, 결심만 한다면 다시 에조 지역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서양 세력의 힘이 강성하다곤 해도 본국과의 거리가 워낙 멀어 제대로 된 힘을 투사할 수 없다는 사실은 막부도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그러지 않은 것은 딱히 얻을 수 있는 이득보다는 손해가 커 보였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성향 자체가 큰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기에 에조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냥 아이누 부족 연합을 독립시키고 손을 뗀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 북미왕국은 다른 서양 세력보다는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다는 점이 내심 걸리는 도쿠가와 이에쓰나였다.
‘비록 이곳과 아미리가 사이에 커다란 바다가 존재한다고는 하나 이 북미왕국도 대해를 건너 에조 지역에 진출했고 다른 서양의 나라들보다 가까운 곳에 위치했으니 에조 지역을 되찾으려면 정말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겠구나. 근데 그럴 가치가 있나?’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며 에조 지역을 되찾을 필요가 있나 싶어 아베 다다아키의 생각을 물었고 그 역시 고개를 저었다.
“그런 피해를 감수하면서 에조 지역을 되찾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쇼군 전하. 하지만...이 사실을 이용할 방도는 있다고 봅니다.”
“이 사실을 이용한다고?”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아베 다다아키를 바라보자 그는 슬쩍 웃음을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쇼군 전하. 아이누 부족 연합 뒤에 존재하는 북미왕국이 강대국이란 것을 슬쩍 알린다면 더는 에조 지역을 되찾자는 소리를 하는 번주들이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흐음...오히려 서부의 번주들은 북미왕국의 존재를 알게 되면 다시 에조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을까?”
막부에서 에조 원정을 실패한 이후 반 막부 성향이 강한 몇몇 번주들이 뒤에서 이런저런 소리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막부의 눈치 때문에 대놓고 이런 소리를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북미왕국의 존재가 알려지고 북미왕국이 강대한 국가라는 것이 알려진다면 오히려 더욱 이를 부추기지 않을까 싶어 회의적인 표정을 짓자 아베 다다아키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닐 것이옵니다. 북미왕국은 무척 강국이라 에조 지역을 되찾으려면 분로쿠의 역(文禄の役:임진왜란) 때처럼 막대한 군세를 동원해야 한다는 사실을 흘린다면...그들도 더는 에조 지역을 입에 올리진 않을 겁니다.”
아베 다다아키는 차라리 이 사실을 이용해 막대한 군세를 동원하고 반 막부 성향이 강한 몇몇 번을 선봉으로 내세워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싶었지만, 쇼군의 성향상 이를 허락할 리 없었기에 차선으로 생각한 방책을 이야기 한 것이다.
“아...그건 괜찮군.”
이에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슬쩍 미소를 지었고 이를 확인한 아베 다다아키는 고개를 숙이며 되물었다.
“그럼 소문을 흘릴까요?”
“그렇게 하게. 그리고...단지 흑선의 수가 조금 늘었다고 우리가 반응하는 것도 체면이 상한다고 보네. 그러니 그냥 모른 척하게. 저들이 남하하지 않는 한은 일단 두고 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쇼군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