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포로나이 항에 정박해있는 지급 전선의 함장실 안에 있던 정일신 함장은 함장실 문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큰소리로 외쳤다.
“들어오게.”
이에 함장실 문이 열리며 박경수가 함장실 안으로 들어왔고 그런 박경수를 보고 정일신은 미소지으며 그를 반겼다.
“아. 왔나?”
박경수는 정일신을 보고 인사했다.
“부르셨습니까? 함장님? 헌데 밖에 저 전선들은 대체 뭡니까?”
박경수는 항상 외롭게 한 척만 정박하고 있던 지급 전선 주변에 다른 전선 여러 척이 정박해있는 것을 이곳에 오면서 확인하고 살짝 놀란 표정이었다.
박경수가 이곳으로 오면서 보았던 전선들은 어제 오후에 막 이곳에 도착한 북미왕국의 함대였다.
지급 전선 2척과 인급 전선 4척으로 구성된 함대로 이제부턴 3함대 소속의 전선으로 이곳에 배치될 예정이었고.
정일신은 이를 어제 막 이곳에 도착한 전선의 함장들이 그를 찾아와 인사하면서 건넨 군사청에서 보낸 명령서를 읽어보고 알게 되었다.
명령서에는 군사청의 해군을 개편해 1함대와 3함대를 창설하고 정일신을 3함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한다는 이야기와 함께 현재 아이누 부족 연합 소속인 지급 전선 2척과 이번에 보내준 함대를 합쳐 3함대를 구성하라는 명령이 쓰여있었다.
이 명령서를 확인하고 정일신은 무척 기뻐했다.
단순히 자신이 3함대의 사령관이 된 것을 기뻐한 것이 아니라 중구난방이었던 해군을 제대로 개편하고 이를 유지하겠다는 군사청의 뜻이 보였기 때문이다.
기존의 군사청 소속의 해군은 제대로 된 체계가 없었다.
이곳에 배치되어있던 지급 전선 2척은 공식적으로는 아이누 부족 연합 소속이었고 본국의 전선들 역시 해군 훈련대에서 해군 공격대로, 그리고 에스파냐와의 전쟁에 동원되어 원정함대 소속으로 바뀌었다가 에스파냐와의 전쟁이 끝나자 다시 해군함대로 소속이 바뀌었지만 실제로는 이름만 바꾸었을 뿐이지 제대로 된 체계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운용되어왔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군사청에서 제대로 체계를 정해 해군을 육성할 뜻을 밝혔으니 정일신으로서는 기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3함대의 영역을 생각하면 막부때문에라도 꾸준히 규모를 늘릴 것이 뻔히 보였으니 그만큼 아이누인들은 더욱 안전해질 것이고.
박경수의 물음에 어제 일이 생각난 정일신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아아. 본국에서 지원해준 전선들일세.”
“본국에서요? 대체 왜?”
갑작스럽게 본국에서 전선을 지원해주었다는 사실에 놀란 박경수를 보고 정일신은 미소를 지우며 진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번에 아이누 부족 연합이 북미왕국 밑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 사실이 알려지면 막부가 움직일 수도 있다고 본국에선 걱정한 모양일세.”
“아아. 그래서...”
혹시 그가 모르는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이 아닌가 싶어 내심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던 박경수는 정일신의 말에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샤쿠샤인을 붙잡고 제대로 이야기 해볼 걸 그랬네.’
북미왕국으로 떠났던 아이누인들 가운데 유일하게 샤쿠샤인만 홀로 돌아왔다.
이에 정일신도 박경수도 놀라 그를 붙잡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샤쿠샤인은 왠지 모르게 홀가분한 표정으로 별일 없다면서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일단 오니비시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먼저라면서 양해를 구하고 곧장 떠났고.
이에 정일신과 박경수는 어쩔 수 없이 바로 홋카이도로 향하는 배를 타는 샤쿠샤인을 배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일신이 급히 찾는다기에 샤쿠샤인이 돌아왔나 싶었는데 항구에 못 보던 전선들이 여러 척 정박해있었으니 놀랄 수밖에.
“그래. 그리고 이번에 전선들을 통해 군사청의 명령이 담긴 명령서들이 도착했는데...그 중엔 자네 것도 있어서 이렇게 불렀네.”
“그렇습니까?”
본국에서 명령이 내려왔다는 이야기에 무슨 명령이 내려왔나 궁금한 표정을 짓는 박경수였다.
정일신은 뒤쪽 서랍을 열어 명령서를 꺼내 그런 박경수를 보면서 씩 웃으며 명령서를 건네주었다.
“축하하네. 아이누 경비대장으로 승진한 것을.”
“예?”
대체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정일신을 바라보는 박경수였고 정일신은 박경수의 손에 있는 명령서를 가리켰다.
“읽어보게.”
정일신의 재촉에 박경수는 곧바로 명령서를 쭉 읽어보고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자신이 아이누 경비대장으로 승진한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명령서에 담긴 내용이었다.
“으으음...이것 참...아이누 경비대를 조직하고 3년 내에 5천의 병사들을 훈련시키라니...이거 고생길이 훤하군요.”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다.
아이누 부족 연합이 북미왕국에 합류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자신들이 아이누인들을 훈련시켜야 할 것이라는 것은.
하지만 3년 내에 5천의 병사를 훈련시키라니.
이 지역에 뭐 이리 많은 병사를 유지한단 말인가.
그 넓은 북미왕국 본토에 배치된 병사가 2만이 채 안 되는 판국에.
그런 생각을 하며 박경수가 속으로 투덜거릴 때 정일신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아무래도 그렇지? 자네 당분간은 고생 좀 할걸세.”
박경수는 그런 정일신을 보고 살짝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어째 함장님은 여유만만해 보이는데...해군은 따로 편제가 바뀌거나 하진 않았나 봅니다?”
정일신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 그건 아닐세. 이번에 본국에서 온 전선들은 모두 이곳에 배치되었고...3함대가 창설되었네.”
“3함대요?”
“그래. 아이누 경비대가 기존의 경비대와 독립된 영역을 담당하는 것처럼 이번에 창설된 3함대는 이곳 포로나이를 모항으로 이곳에서 카무이 반도까지 순찰하면서 항로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이 주 임무라고 하네. 다만 실제 임무는 혹시 모를 막부의 공격을 해상에서 막아내는 것이고.”
정일신의 설명에 박경수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뭐 이번에 본국에서 보내준 전선들을 생각해보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박경수가 말을 흐리자 정일신 역시 쓴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왜인들은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교활한 편이었지.
저번 아이누 원정의 경우는 당연히 아이누인들에게 제대로 된 선박이 없다는 생각에 한 번에 병력을 운송하려다 지급 전선 한 척에 호되게 당했을 뿐.
만약 다시 저들이 홋카이도를 공격하려 든다면 이미 배치된 지급 전선을 고려해 덤벼들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북미왕국의 전선들이 강력한 전투력을 자랑하고 있다고는 하나 수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었다.
거기에 일본 본토와 홋카이도 간의 거리도 가까운 편이었고.
막부가 희생을 감수하고 수로 밀어붙인다면 이번에 본토에서 지원해준 전선을 모두 동원하더라도 완벽하게 막기는 어렵다고 생각하는 둘이었다.
“아아. 저들도 지급 전선의 위력을 모르지 않으니 저번처럼 순순히 당해주진 않을 테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야 최선을 다해 막아내겠지만...수에는 장사 없으니 상륙을 허락할 수도 있을 테고. 그러니 이젠 북미왕국의 영토가 된 홋카이도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빠르게 자네가 아이누 경비대를 육성해야 하네.”
“끙...”
결국, 군사청의 명령대로 최대한 이른 시일 안에 병사를 육성해야 한다는 결론에 한숨을 내쉬는 박경수였다.
그런 박경수를 보고 정일신은 미소지으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어조로 말했다.
“뭐 이건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것뿐일세. 막부에서 다시 홋카이도를 공격하기로 했을 때의 일이란 말이지.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내가 보기엔 과연 막부가 다시 홋카이도를 토벌하려 들지는 조금 의문이라...”
그런 정일신의 말에 동감하면서도 조금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박경수가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상식적으로는 그렇긴 한데...뭐 왜놈들은 워낙 호전적이라...”
이에 정일신 함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뭐 그렇지만...어차피 당장은 왜인들과 제대로 교류도 하지 않고 있고 이곳이 북미왕국의 영역이라고 떠들 것도 아니니 당장 저들이 덤벼들진 않을걸세. 상황을 파악하려 들겠지. 그러니 시간은 충분하다고 보네.”
정일신의 말에도 박경수는 툴툴거렸다.
결국, 죽어라 고생해서 아이누 경비대를 이른 시일 내에 훈련시켜야 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으니까.
“끙...그보다 3함대의 총 책임자는 누굽니까?”
이에 정일신은 슬쩍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3함대의 총 책임자는 3함대 사령관으로 불리게 되며...군사청에서는 황송하게도 그 자리를 내게 맡겼네.”
그런 정일신의 반응에 박경수는 웃으며 축하해주었다.
“이야. 하긴 생각해보면 3함대의 사령관으로 함장님 외에는 딱히 사람이 없긴 하죠. 승진을 축하드립니다.”
“크흠. 고맙네.”
여전히 민망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정일신을 보고 피식 웃은 박경수가 그래도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근데 왜 그리 여유로운 겁니까? 함장님도 3함대 사령관으로 승진하셨으니 3함대를 창설하려면 일이 꽤 많을 텐데요?”
그제야 정일신 함장은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우고 박경수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포로나이에 3함대 사령부를 건설하고 사령부를 조직하려면 고생은 하겠지만...솔직히 일은 그리 많지는 않네. 편제도 다 짜여 있고. 그러니 이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거지. 하하하.”
“쳇...”
정일신의 대답에 박경수가 투덜거리자 정일신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둘 다 승진한 셈이니 술이라도 한잔하고 싶긴 한데...당장 명령을 수행해야 해서 말일세. 그러니 다녀와서 마시도록 하세.”
이에 박경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정일신을 바라보았다.
“예? 어디 가십니까?”
정일신을 들고 있던 명령서를 흔들면서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군사청의 명령일세. 3함대에 소속된 전선들을 이끌고 홋카이도 남쪽을 크게 돌아 순찰하라더군.”
이에 박경수는 크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푸하하하. 살살하시죠. 너무 겁줬다가 덤벼들까 무섭습니다.”
* * *
어선을 타고 바다로 나온 왜인들이 물고기를 낚기 위해 열심히 그물을 던지고 있을 때 한 젊은 사내가 그물을 던지던 동작을 멈추고 멀뚱히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젊은 사내의 행동에 옆에서 열심히 그물을 던지고 있던 다른 중년 사내가 그를 보고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이봐! 일은 안 하고 뭐 하는 거야?”
하지만 멀뚱히 서 있던 젊은 사내는 중년 사내의 외침을 신경도 쓰지 않고 오히려 손을 들어 눈두덩이에 가져다 대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이에 그물을 던지던 중년 사내가 동작을 멈추고 짜증을 내면서 젊은 사내의 뒤통수를 한 대 쳐주기 위해 일어나려 했을 때 젊은 사내가 중년 사내를 보고 소리쳤다.
“아저씨! 저기 저거! 흑선 아닙니까?”
“뭐? 흑선? 헉!”
중년 사내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젊은 사내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젊은 사내의 말대로 흑선이 보였다.
그리고 중년 사내는 기겁했다.
비록 흑선이 신기하고 두려운 존재이긴 했지만 가끔 주변 바다를 순찰하는 흑선을 먼발치서나마 보곤 했기에 이렇게 기겁할 이유가 없었다.
문제라면 평소와는 달리 여러 척의 흑선이 보인다는 점이었다.
이에 중년 사내는 입을 크게 벌리며 중얼거렸다.
“저게 대체 몇 대야?”
그러자 함께 그물을 던지던 노인이 두려움이 섞인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는 에조 원정 때 동원되어 살아남았기에 흑선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익! 저 흑선이 한 척도 아니고 저렇게 여러 척이?! ”
그러면서 부들부들 떠는 노인을 보고 중년 사내는 심각한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쩌지? 도망쳐야 하나?”
중년 사내는 저 대단한 흑선이 고작 이 조그마한 어선을 공격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노인의 반응은 달랐다.
“당연하지! 혹시 모르지 않나! 일단 도망치세!”
“끙...별 수 없지. 일단 걷을 수 있는 그물부터 대충 걷고 도망치도록 하지.”
이에 노인이 미친 듯이 그물을 잡아당기기 시작했고 곧 중년 사내나 젊은 사내도 달라붙어 그물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충 다 걷고 도망치려 할 때쯤 젊은 사내가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그냥 지나가는 것 같은데요?”
곧바로 노를 저으려던 중년 사내와 노인도 고개를 돌려 방향을 틀어 조금씩 멀어지는 흑선 함대를 보며 뻘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음...그러네.”
“저쪽이면...에조 지역으로 가나 보네.”
노인의 말에 중년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장구쳤다.
“가끔 흑선이 에조 지역 근처를 순찰하는 것을 보기는 했는데 저렇게 무리 지어 다니는 것은 또 처음이네.”
이에 젊은 사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끙...그럼 무사님께 보고해야 합니까?”
그 말에 중년 사내는 달갑지 않은 표정을 했지만,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무사님께 보고해야지. 돌아가면 내가 바로 보고하겠네.”
“뭐...그러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