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정성국은 집무실에서 일하다가 잠시 휴식을 취할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내리려고 시종에게 뜨거운 찻물을 준비시키며 원두를 분쇄하기 시작했다.
보통은 이런 일은 시종이나 담당 하인에게 맡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특히 프랑스 상류층에게는 커피를 담당하는 하인을 고용하는 것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하지만 정성국은 전생에도 이렇게 직접 핸드 드립을 통해 커피를 내려 마셨고 번거롭기는 해도 이것 또한 커피를 즐기는 과정이라고 생각했기에 시종에게는 맡기기보다는 직접 커피를 내리는 편이었다.
정성국이 분쇄된 원두의 향에 미소짓고 있을 때 집무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정성국은 당연히 뜨거운 물을 가져온 시종이라고 생각했지만, 집무실에 들어오는 발소리가 한둘이 아니라 재빨리 고개를 돌리자 개발청장과 관리청장, 그리고 외무청장인 조용한 곰이 집무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 벌써 보고 받을 시간이 된 건가?”
정성국의 말에 가장 앞서 들어오던 관리청장이 움찔하면서 조심스럽게 정성국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조금 일찍 오긴 했습니다만...”
“아. 괜찮네. 나도 잠시 쉬는 중이었을 뿐이네.”
정성국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행정청장은 안도했고 조용한 곰은 정성국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헌데 뭐 하시는 겁니까?”
“아...커피를 내리는 중이었네.”
“커피요?”
처음 듣는 단어에 조용한 곰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정성국은 슬쩍 웃으면서 대답했다.
“새로운 차...라고 해야 할까?”
정성국의 대답에 조용한 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오히려 관리청장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면서 입을 열었다.
“손수 차를 내리시는 겁니까? 시종은 어디가고...”
그런 관리청장을 보고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화낼 필요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 내 취미 생활이니 시종을 탓할 것 없네.”
“아...그렇습니까?”
정성국의 대답에 살짝 머쓱한 표정을 짓는 관리청장이었고 그런 관리청장을 보고 살짝 웃어준 정성국은 집무실 한쪽의 탁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잘 왔네. 어차피 시급한 보고는 아닐 테니 자네들도 앉게. 커피를 함께 마시고 보고를 듣도록 하지.”
“영광입니다. 전하.”
때맞춰 시종이 뜨거운 물을 가지고 왔고 정성국은 이를 받아들고 시종을 내보낸 후 커피를 여러 잔 만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정성국의 재촉에 청장들은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지만 조용한 곰을 제외하면 꽤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성국은 서서 커피라는 생소한 차를 내리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는데 자신들은 의자에 앉아있었으니.
그렇게 조선인 청장들에게는 불편한 시간이 흘렀지만, 곧 그들의 표정도 집무실에 퍼지기 시작한 커피 향에 진정되어 갔다.
잠시 후 그들의 앞에 화려한 장식의 커피잔이 하나씩 놓였다.
“자. 마셔보게.”
“감사합니다. 전하.”
조선인 청장들은 무척 황송한 표정으로 무려 왕이 직접 내린 커피가 담긴 커피잔에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조용한 곰은 꽤 흥미로운 표정으로 곧바로 커피잔을 들어 얼굴에 가져다 대고 향을 맡은 후 마시기 시작했다.
“흐음...괜찮군요. 커피라고요? 대체 어디서 나는 차입니까?”
“저 멀리 중동에서 가져온 녀석일세. 잉글랜드의 상인을 통해 얻을 수 있었지.”
“그렇습니까? 흐음...”
조용한 곰은 커피 향이 마음에 드는지 미소를 지으며 커피잔을 들어 느긋하게 마시기 시작했고 그런 조용한 곰을 보면서 말했다.
“그리고 함께 구한 커피 묘목을 하와이로 보냈다네. 만약 그곳에서 커피나무 재배에 성공한다면 손쉽게 커피를 구할 수 있겠지.”
“아. 하와이 지역이 커피를 재배하기 좋은 기후인가 보군요?”
“음...아마도? 그것도 있지만, 하와이도 무언가 특산품이 있어야 꾸준하게 교류가 가능할 것 같아서 커피 묘목을 보낸 걸세. 새목포의 나무처럼 말일세.”
“아.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성국은 무척 조심스럽게 한 모금씩 음미하고 있는 다른 청장들을 보며 슬쩍 웃으며 말했다.
“일단 개발청장. 자네가 가져온 그 보고서부터 줘보게.”
“여기 있습니다. 전하.”
정성국은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개발청장이 건네준 보고서를 쭉 읽어보고 무척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공사 중인 새나주에서 새진주까지의 수많은 공사 현장에서 아무런 사고나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뜻인데 그게 가능한가 싶었던 것이다.
“이거 좀 예상외인데? 외외로...별다른 문제가 없네? 사고도 한 건도 없고. 이게 가능한가? 아무리 경비대원들이 도와준다 하더라도 말이지.”
그런 정성국의 의문에 개발청장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를 일으키거나 사고를 치면 가차 없이 퇴출당하니까요.”
“으음?”
그래도 정성국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개발청장은 이번에 고용된 멕시코 원주민들의 사정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워낙 박한 대우를 받아왔던 멕시코 원주민들에게 높은 보수와 숙식을 제공하는 북미왕국의 일자리의 가치는 무척 높다는 것이다.
더불어 마을별로 일꾼이 모집된 터라 북미왕국이 일꾼들에게 보수로 건네주는 식량을 모아 가족이 있는 마을로 보낸다고 하니 이곳에서 사고를 쳐서 퇴출당하는 순간 마을로 돌아가도 손가락질을 받을 수밖에 없는 분위기라고 한다.
그러니 사람이 그렇게 많이 모여 있어도 큰 문제 없이 어지간하면 그냥 좋게좋게 넘어가는 편이라고 한다.
또한, 예전 산타페 인근의 마을을 아파치 족이 공격한 일이 있었다.
그 보복으로 북미왕국은 탐사대를 산타페로 소집한 후 북미왕국의 영역을 침범했던 아파치 족의 근거지를 불태워버렸고.
이 일이 알려지면서 북미왕국의 무력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문은 북미왕국에 고용되어 국경선 안쪽으로 들어온 멕시코 원주민의 귀에도 들어갔고.
자연스럽게 자신들을 통제하는 북미왕국 병사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잘못해서 저들과 부딪치기라도 하면 북미왕국의 기병 부대가 나타나 자신의 마을을 불태우지 않을까 걱정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북미왕국의 통제에 따라 일을 열심히 하면 후한 보수를 받고, 사고를 친다면 북미왕국이 보복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멕시코 원주민들은 자연스럽게 북미왕국의 통제에 따라 열심히 일한다고 한다.
거기에 공사 구간이 험한 지형이라면 공사 도중에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 현재 공사 중인 현장은 거의 평야 지대였고 병영을 세우거나 길을 정비하는 수준의 공사에 불과했으니 딱히 문제가 생길 여지가 없다는 개발청장의 보고였다.
이에 정성국은 예상과는 달라 조금 의아해하긴 했다.
이번에 북미왕국이 고용한 멕시코 원주민은 워낙 많고 통제 인원은 적은 편이었기에 공사 현장에서 수많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실제로는 큰 문제 없이 잘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정성국의 예상과 달랐을 뿐이지 개발청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오히려 문제가 없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기에 정성국은 슬쩍 웃으면서 칭찬했다.
“그렇군. 뭐 그렇다 해도 청장들을 비롯한 관리들과 병사들이 애를 쓰는 덕분이겠지.”
“하하하.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전하.”
정성국의 칭찬에 개발청장은 환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고 그와 함께 옆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관리청장과 조용한 곰의 얼굴에도 미소가 어렸다.
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정성국은 슬쩍 관리청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문제는 계속 이렇게 식량을 운송할 수 있겠느냐는 건데...가능하겠나?”
정성국의 물음에 화기애애하고 훈훈한 분위기이던 집무실의 공기가 살짝 가라앉았다.
관리청장은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면서 보고하기 시작했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확실히 거리가 멀어질수록 식량 운송이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 때문에 산타페 동쪽으로는 식량 운송이 원활하지 않은 편이고 말입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새진주의 건설에 차질이 빚어질 것 같습니다. 전하.”
관리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한숨을 내쉬었다.
“끙...결국, 더 많은 돈이 들어가겠군.”
현재 원주민들을 고용하며 보수를 식량으로 주고 있었지만, 식량의 운송이 어렵다면 은으로 주면 되긴 했다.
이러면 부피가 줄어드는 만큼 운송하기도 편했고.
다만 아직 북미왕국 내에서 유통되는 금과 은이 넉넉한 편은 아니라 최대한 북미왕국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으려고 식량으로 대신 지불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편이 오히려 멕시코 원주민들에게도 이득이었다.
북미왕국과 에스파냐의 식량 가격은 차이가 좀 있었기에 북미왕국에서 보수로 지급하던 식량을 은으로 환산해 바꾸어 주게 되면 그 은으로 다시 누에바 에스파냐의 영역에서 식량을 구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북미왕국에 직접 식량으로 보수를 받는 것보다 줄어들게 된다.
당연히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어 최대한 자제하려 했지만, 리오그란데강 동쪽부터는 식량 수송이 원활하지 않아 식량 비축량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일단 북미왕국에서 일꾼들에게 숙식 제공을 하겠다고 약속한 이상 일꾼들이 먹을 식량은 북미왕국에서 책임져야 하는데 이를 운송하는 것조차 아슬아슬해 보였으니까.
이에 관리청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렇지요. 그리고 그 때문에 에스파냐와의 협상이 필요합니다.”
관리청장의 말에 정성국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에스파냐를 통해 새진주 건설에 필요한 물자와 식량을 사 오겠단 소린가?”
“그렇습니다. 전하.”
관리청장의 말에 정성국은 슬쩍 커피잔을 들어 천천히 커피를 마시면서 생각에 잠겼다.
관리청장의 말도 틀리진 않았다.
어차피 새진주까지는 워낙 멀었기에 괜히 식량을 비롯한 각종 물자를 직접 운송하려 했다가는 오히려 운송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커질 것은 뻔했다.
그 운송 비용을 생각하면 차라리 관리청장의 말처럼 에스파냐에서 사 오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그렇게 되면 너무 많은 은이 에스파냐로 빠져나갈까 봐 걱정스러워졌다.
“흐음...그럼 에스파냐로 빠져나가는 은이 너무 많지 않을까?”
그 말에 조용한 곰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건 협상을 통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정성국이 의아한 표정으로 조용한 곰을 바라보자 조용한 곰은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식량과 물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단지 운송이 어려울 뿐이지요.”
“그렇기야 한데...”
“그러니 에스파냐와 한번 협상을 해보겠습니다. 물자 교환을 말입니다.”
“아. 설마 에스파냐 서해안에 식량과 각종 물자를 넘겨주고 새진주에서 받겠단 소린가?”
조용한 곰의 말은 에스파냐와 협상을 통해 새진도나 아카풀코 항에 일정 식량과 각종 물자를 넘기고 비슷한 수량의 물자를 새진주 남쪽에 있는 베라크루즈 항을 통해 운송 받겠다는 소리였다.
그런 조용한 곰의 의견에 정성국은 그게 가능하겠느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조용한 곰은 자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물론 이를 성사시키려면 에스파냐에 약간의 이익을 보장해줘야 하는 만큼 어느 정도 손해는 보겠지만...”
정성국은 됐다는 듯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어차피 식량이나 소금을 비롯한 각종 물자야 여유가 있으니 괜찮아. 어차피 그 물자들을 몽땅 은을 주고 에스파냐에 사들이는 것보다야 낫겠지.”
“예. 바로 그렇습니다.”
“좋아. 그럼 그건 외무청에서 잘 협상해 보게.”
“알겠습니다. 전하.”
그렇게 대략적인 보고를 끝내고 일어나려는 청장들을 보고 정성국이 슬쩍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혹시 커피가 마음에 들면 바깥의 시종에게 이야기하도록 하게. 커피하고 커피를 내릴 도구들을 내어 줄 테니.”
열심히 마시는 중이었지만 도저히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수많은 커피 자루를 처리하기 위해 열심인 정성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