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정성국은 집무실로 들어온 박기동을 보고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박기동이 들고 온 것을 바라보았다.
“왔구나? 그래. 가져 왔니?”
박기동은 그런 정성국의 환대에 움찔하며 조심스럽게 들고 온 물건을 정성국에게 건네주었다.
“어...예. 여기 있습니다. 스승님.”
“오오! 드디어!”
정성국은 박기동이 건네준 물건을 받고 환호하며 곧바로 집무실 한쪽에 마련된 각종 차 다기들이 놓여 있는 탁자로 이동했다.
박기동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정성국을 따라 이동하면서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이 가져온 물건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근데 뭘 분쇄하려고 그런 기계를 만들라고 한 겁니까?”
“이거야. 이거.”
그러면서 정성국은 유리병에 담긴 잘 볶아진 커피 원두를 흔들며 환하게 웃었다.
작년 제임스가 원상에게 커피 묘목을 구해다 주고 도자기 거래를 성사시켰다.
당연히 거래 자체는 귀금속으로 했고.
다만 제임스는 북미왕국과의 거래를 위해 묘목뿐만 아니라 커피 생두도 함께 가져왔다.
커피 묘목을 구하려는 것을 보니 북미왕국에서도 커피를 마신다는 뜻인데 커피 묘목을 심는다고 바로 커피 열매를 수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제임스의 예상과는 달리 원상에서는 이 커피 생두에 대해 큰 흥미를 보이지는 않았다.
애당초 정성국이 구하라고 했던 커피 묘목은 이미 구했고 커피 생두는 따로 지침을 내린 것이 없었으니까.
이에 제임스는 혹시 이들이 가격을 후려치려고 이러나 싶었지만, 네가 정 팔겠다면 소량만 사겠다는 원상의 태도에 잠시 고민하다 팔지 않고 가져온 물량의 절반을 원상에 선물로 넘겼다.
제임스나 토마스의 예상처럼 아직 북미왕국에선 커피가 널리 퍼지진 않았지만, 도자기를 거래하는 조건으로 커피 묘목을 먼저 구해오라고 할 정도라면 북미왕국의 고위급 귀족이 커피를 찾는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이 커피를 선물로 넘긴다면 북미왕국의 고위급 귀족에게 흘러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고위급 귀족은 잉글랜드를 좋게 볼 테니 나쁠 것은 없었으니까.
그렇게 커피 묘목과 커피 생두를 얻게 된 원상에서는 잠시 보관하고 있다가 이번 이주 선단을 통해 새김포로 보냈고.
묘목은 전량 다시 배를 타고 하와이로 떠나는 이주 선단에 실렸지만 수많은 커피 생두가 담긴 자루들은 이곳에 남았다.
이를 뒤늦게 보고받은 정성국은 쾌재를 부르며 곧바로 커피를 마시려다가 오랜만에 마시는 커피인 만큼, 그리고 자신이 열심히 마셔봐야 수많은 커피를 다 마실 수는 없었기에 다른 이들에게도 커피를 권할 겸 손쉽게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도구들을 급히 제작하게 했다.
그리고 커피 그라인더는 다른 장인들이 만들어 박기동이 직접 가져온 것이고.
최주명의 이야기를 듣고 박기동과 한번 만나 연구 상황을 확인해 볼 필요는 있었기에 겸사겸사 말이다.
하지만 박기동은 잠시 눈을 찌푸리며 검은색 씨앗처럼 보이는 것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으음...그건 또 뭡니까?”
“아. 이게 이번에 구한 커피나무의 씨앗을 볶은 거지. 이걸로 커피라는 음료를 만드는 거고.”
그러면서 정성국은 유리병 마개를 열고 안쪽의 커피 원두를 꺼낸 후 박기동이 가져온 커피 그라인더에 넣고 원두를 적당한 크기로 분쇄하기 시작했다.
‘드르륵드르륵’
커피 원두를 다 분쇄하고 나서 커피 그라인더 밑부분에 달린 조그마한 상자를 꺼내 들어 올리자 전생에서나 맡을 수 있었던 고소한 커피 향에 정성국은 자신도 모르게 상자를 얼굴에 가까이 가져다 대고 향기를 맡았다.
“하아...향 좋네.”
그런 정성국을 박기동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분쇄하는 소리를 들어보면 꽤 단단해 보이는데...설마 그걸 타서 먹는 겁니까?”
이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미리 만들어두었던 드리퍼 위에 종이로 만든 거름망을 설치하고 분쇄된 원두 가루를 털어 넣으며 말했다.
“뭐...정 아무것도 없으면 모를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현재 유럽에서 유행하고 있는 커피는 박기동이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했다.
커피 원두를 아주 곱게 갈아 물과 함께 끓인 후 커피가 충분히 우러나오면 커피잔에 따라 커피 가루가 가라앉길 기다렸다가 마시는 터키식 커피랄까.
이는 분쇄한 커피를 직접 끓여 마시는 터라 커피의 향은 극대화되고 진한 맛을 느낄 수는 있다고는 하지만 정성국이 기억하는 커피와는 달랐기에 자신에게 익숙한 도구들을 준비시킨 정성국이었다.
왕이니만큼 그 정도 사치는 부려도 될 것 같았고.
전생에 커피를 달고 살았던 정성국이었고 이곳에선 어쩔 수 없이 차를 마셨을 뿐이라 더욱 익숙한 커피를 마시고 싶었달까.
“...뭔가 좀 본격적인 것 같습니다만?”
“아아. 이왕 만드는 김에 이것저것 만들었지.”
“으음...”
박기동이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는 것도 모른 채 정성국은 커피를 내리는 데 집중했다.
유리로 만든 서버 위에 드리퍼를 올려둔 후 뜨거운 물이 담긴 다기로 물을 드리퍼 위에 붓자 커피 향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이에 정성국은 다시 한번 미소지었다.
그런 정성국의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박기동은 차를 우리는 것 치고는 꽤 번거롭지만, 향 자체는 좋다고 느끼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똑똑 찻물이 떨어지는 걸 보니 신기하네요. 이래서 유리로 받침대를 만드신 겁니까?”
“아? 어어. 그렇지.”
그러면서 다시 조심스럽게 물을 붓는 정성국을 보고 박기동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묘하게...손도 많이 가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군요.”
“하하하. 그렇긴 하지.”
그러면서 커피가 내려지길 기다리면서 박기동과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던 정성국은 어느 정도 커피가 추출되자 서버 안의 커피를 미리 준비해 둔 화려한 커피잔에 따랐다.
“자. 마셔봐라.”
“감사합니다. 스승님.”
정성국이 손수 우린 차라는 것을 알기에 박기동이 무척 조심스럽게 커피잔을 들어 올리는 동안 정성국은 정말 오랜만에 다시 맛보는 커피 맛에 눈물을 살짝 글썽거렸다.
“하아...좋다...”
정성국의 감탄사에 박기동도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나쁘지 않군요. 향도 괜찮고.”
“그렇지?”
의외로 커피를 마음에 들어 하는 박기동을 보고 정성국은 무척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에 커피를 마시던 박기동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그거 잠을 쫓는데도 참 좋거든.”
정성국의 말에 박기동은 표정이 살짝 구겨지면서 투덜거렸다.
“...왜 이걸 주셨는지 알겠군요. 이거 마시고 더 연구나 하라는 겁니까...”
그런 제자의 반응에 정성국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 뭐 그 정도는 아니고 워낙 피곤해 보이니 그런 거지. 커피하고 장비 챙겨줄 테니 너도 잠이 오면 마시도록 하렴. 아. 그리고 이 원두 분쇄기를 만든 장인에게 한 100개 정도 더 만들어두라고 하고.”
스승의 말에도 박기동은 뚱한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굳이 이런 거 마시지 않아도...연구할 목록이 줄어들면 좀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이에 정성국은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 그건 무리. 점점 더 많아지면 모를까.”
“끙...”
정성국의 말에 박기동은 죽을상을 썼지만, 정성국은 오랜만에 맛보는 커피 맛에 취해 미소 짓고 있었다.
“하아. 오랜만에 커피를 마시니 정말 좋구만.”
“어? 커피를 드셔보신 적이 있으신 겁니까?”
의아해하는 박기동의 물음에 정성국은 살짝 당황해서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아? 아. 예전에 어떻게 운 좋게 서양 상인을 통해 마셔본 적이 있긴 했지.”
“아...그렇습니까?”
고개를 갸웃하는 박기동을 보고 정성국은 빠르게 주제를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주명이한테 들어보니 새로운 증기기관을 만들었다면서?”
“끙...주명이 녀석이 이미 이야기했나 보군요.”
“그래. 결과는?”
이에 박기동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정성국을 바라보며 보고하기 시작했다.
“일단...큰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원했던 것보다 마력이 나오지 않아서 문제를 찾고 있습니다만...”
“뭐 원하던 대로 500마력에는 미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못 써먹을 정도는 아니잖아? 450마력 정도는 나온다면서?”
“예. 그렇습니다.”
“그럼 그거 좀 몇 개 만들어서 주명이한테 넘겨라.”
정성국의 명령에 박기동은 안색이 슬쩍 흐려졌다.
“새로운 배...를 건조하실 생각이십니까? 급한 것이 아니라면 조금 더 시간을 주시죠? 어떻게 해서든 처음 목표대로 500마력의 증기기관을 양산하고 싶은데 말이죠...”
“완벽주의도 좋다만...당장 급해서 말이다.”
그러면서 이번에 합류한 아이누 부족 연합의 영역과의 연락망 구축을 위해 이번 새 증기기관이 필요하다고 자세히 설명하자 이를 듣고 박기동은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끙...아이누인들이 북미왕국에 합류했다니...연구실에 처박혀있어서 그건 또 몰랐군요.”
“그러냐.”
얼마나 연구에 바빴으면 그럴까 싶어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든 정성국이 괜히 박기동의 눈치를 살폈다.
박기동은 그런 정성국을 눈치채지 못하고 잠시 생각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상황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그 연락선이라는 것은 몇 척이나 건조하실 생각이십니까?”
“최소한 4척? 아예 여유 있게 10개 정도 만들어서 주명이한테 넘겨 줘.”
실패에 가까운 증기기관을 무려 10개나 만들라는 말에 살짝 인상을 찡그린 박기동이었지만 이내 수긍했다.
“흠...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새로운 증기기관에 대한 문제가 일단락되자 정성국은 곧바로 다른 주제를 꺼내 들었다.
“아. 그리고 트랙터에 관한 보고도 최근엔 못 들어본 것 같은데?”
이에 박기동은 꽤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일단 연구소에서 트랙터를 제작해 구동 시험을 하는 중입니다.”
“그래?”
정성국이 반색하자 박기동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예. 구동 시험이 성공적으로 완료되고 시범 운행을 할 때 보고를 올리려고 했습니다만...”
“오오. 그럼 몇 마력짜리 증기기관으로 만든 녀석인데?”
“20마력입니다. 스승님.”
“흐음...”
박기동의 대답에 정성국은 잠시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마 시골에서 흔히 사용하는 경운기가 10마력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하니 마력 자체는 부족하진 않겠군.’
“뭐 실제로 시범 운행을 통해 개선해 나가야겠지.”
“뭐 그렇죠.”
박기동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성국이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트랙터를 만드는 이유는 단순히 짐을 옮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농사에 직접 사용하려고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그건 그렇다고 치고...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나 그 트랙터로 무슨 일을 할 수 있느냐인데...”
정성국의 물음에 박기동은 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일단 트랙터 뒤에 쟁기를 매달아 땅을 갈아엎는 것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설계대로라면요.”
“그래? 그건 괜찮군.”
현재 땅을 개간하는 일은 전적으로 소를 이용하고 있었는데 이를 대체할 수 있다는 소리에 정성국은 살짝 만족감을 나타냈다.
뒤에 붙은 사족은 애써 무시했고.
“또한, 써레를 매달아 논바닥의 흙은 평평하게 고를 수도 있고요.”
“음음. 그것도 중요하지.”
정성국은 만족스러운 눈초리로 더욱 기대하며 박기동을 바라보자 박기동은 살짝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어...그리고 짐을 실은 마차도 견인해 옮길 수도 있을 테고...”
이에 정성국은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쟁기며 써레며 장비를 부착해 이용할 수 있으니 당연한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거야 뭐...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수확이라고 생각하는데...”
정성국은 기대 만발한 눈초리로 박기동을 바라보았지만, 박기동은 살짝 스승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풀을 베는 것까지는 가능한데...그 이후가 문제입니다. 해서 그 부분은 연구 중이고요.”
박기동의 대답에 정성국은 살짝 아쉬웠지만, 정말 박기동이 만든 트랙터가 제대로 굴러가고 쟁기나 써레로 논밭을 개간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것만 해도 트랙터를 대량양산할 가치는 있었다.
현재는 소와 인력을 이용해 논밭을 개간하는 형편이었으니.
이에 정성국은 웃음을 머금고 박기동에게 말했다.
“야. 그것만 해도 어디겠어. 정말 트랙터가 제대로 땅을 갈아엎기만 해줘도 개간하기도 편할 테고. 뭐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지.”
“뭐 그렇긴 합니다만...”
“아무튼, 고생했다. 트랙터의 시범 운행을 할 때 나도 좀 부르고.”
“하하. 알겠습니다. 스승님.”
정성국의 칭찬에 박기동은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웃기 시작했다.
그런 박기동을 보고 정성국은 슬쩍 입을 열었다.
“근데...석유로 구동하는 새로운 기관의 개발은 아직 어렵지?”
이에 박기동의 안색은 순간 굳어졌다.
석유를 정제한 이후로 연구를 통해 증기기관의 연료로 석유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어차피 물을 데우는데 어떤 연료를 사용하느냐의 문제였으니 약간만 개조하면 되는지라 어려울 것은 없었고.
하지만 정성국은 석유를 증기기관의 연료로 사용하기엔 너무 아까운 생각이 들어 단기통 디젤 엔진의 대략적인 모습을 그려주고 연구해보라고 던져줬지만, 워낙 일이 많은 터라 디젤 엔진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예. 연구 중이긴 합니다만...솔직히 그건 아직 어렵더군요. 기본적인 원리야 이해가 가지만...시간을 더 주셨으면 합니다.”
그런 박기동을 보고 정성국은 애써 그를 달래기 시작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렇게 죽을상을 하진 말라고.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