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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144화 (144/850)

144화

정성국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싶었다.

겨우 원상의 도움을 받아 막부를 물리쳐 독립해놓고 이제 와 북미왕국에 합류하고 싶다니.

말이 북미왕국에 합류하겠다는 것이지 결국 북미왕국에 속하겠다는 뜻임을 모르진 않을 텐데 말이다.

정성국은 숙취가 다시 올라오는 것 같아 머리를 부여잡으며 물었다.

“북미왕국에 합류하고 싶다니...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전하.”

부복한 상태로 대답하는 샤쿠샤인을 보고 정성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끙...일단 일어나세요.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알겠습니다. 전하.”

계속 부복해 있으면서 정성국의 허락을 받고 싶긴 했지만, 북미왕국에 합류하고 싶다면서 정성국의 명령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샤쿠샤인이 일어나자 눈치를 보고 투로시노도 일어나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런 둘을 보고 골치가 아파진 정성국은 시종을 불러 시원한 냉수나 가져와달라고 부탁한 후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아이누 부족 연합이 북미왕국에 합류하기를 원한 다라...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잘 알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샤쿠샤인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정성국은 바로 캐묻기 시작했다.

“헌데 왜 그런 말을 한 겁니까? 아이누 부족 연합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이주 선단을 통해 아이누 부족 연합의 상황을 어느 정도 듣긴 했습니다만...딱히 문제는 없던 것으로 아는데?”

보통의 왕이었다면 오히려 영토가 늘어난다는 생각에 기뻐했을 것이다.

헌데 정성국은 오히려 이들에게 무슨 사정이라도 있나 걱정스러워하자 샤쿠샤인은 슬쩍 미소지으면서 정성국이 알고 있던 사실이 맞는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상, 아니 북미왕국의 도움으로 큰 문제는 없습니다.”

“헌데 왜? 아이누인들끼리 살기를 원해서 막부를 홋카이도에서 몰아낸 것 아닙니까?”

정성국의 물음에 샤쿠샤인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저 샤모들의 착취가 도를 넘어서 봉기했을 뿐이지요.”

“으음...그렇다고 왜 북미왕국 밑으로 들어올 생각을 하는 겁니까? 착취하던 왜인들은 모두 물러갔고 원상과의 교역으로 살기 나쁘지 않다고 들은 것 같은데?”

정성국의 물음에 샤쿠샤인은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물론 원상과의 교역으로 아이누인들의 삶은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아지긴 했습니다. 더는 배고픔에 굶주리는 사람들도 없어졌고. 이대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결정을?”

“투로시노가 그러더군요.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고, 그리고 우리도 살아남기 위해선 빠르게 변해야 한다고. 처음엔 그냥 그런가보다 싶었지만, 개척촌에 다녀온 오니비시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으음...”

오니비시가 개척촌에 들렀다는 보고는 들었지만, 개척촌을 보고 감탄했다는 보고 외엔 없었다.

헌데 그때 오니비시는 개척촌을 보고 자연과 함께 사는 아이누인들의 생활 방식을 바꿀 생각을 한 모양이다.

이에 정성국이 신음을 내뱉자 샤쿠샤인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정성국을 진중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이후로 조선인들의 도움을 받아 여러 정보를 수집하고 주변 정세를 파악하고 보니 고작 막부가 에조에서 물러났다고 해서 만족할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더불어 막부가 물러난 후 아이누인들끼리 발전을 위한 변화를 모색해보았지만 아무런 진전도 없었고 이대로 시간이 흘러봐야 나아질 것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더불어 우리가 그렇게 멈춰있는 동안에도 다른 나라들은 계속 발전해나갈 테니...”

그 말에 정성국은 인상을 찡그리면서 말을 끊었다.

정성국 역시 이대로 가다간 아이누인들이 뒤처지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아이누인들을 도와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발전할 수 있게 도울 생각이었고.

다만 에스파냐와의 전쟁으로 시작된 북미왕국의 확장에 정신이 없어 조금 밀렸을 뿐.

새진주가 건설되고 숨통이 좀 트이면 아이누 부족 연합을 도울 고문단을 파견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정성국이 입을 열었다.

“북미왕국이 아이누 부족 연합을 그냥 내버려 둘 거로 생각한 겁니까? 우리는 그저 말로만 동맹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누 부족 연합이 요청한다면 당연히 우리도 당신들을 도울 겁니다.”

진심으로 이야기하는 정성국을 보고 샤쿠샤인은 자신보다 젊은 이 왕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간접적으로 돕는 것은 한계가 있겠지요. 정치적인 부분도 함부로 개입하기 어려울 테고요.”

“그거야...”

그건 그랬다.

너무 깊게 개입하면 내정 간섭이 되는 만큼 한계는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말을 잇지 못하는 정성국이었고 그런 정성국을 보고 샤쿠샤인이 계속 이야기했다.

“그리고 최근 잉글랜드의 선박이 아이누 부족 연합의 영역에 찾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아. 들었습니다.”

“그 잉글랜드라는 나라도 보통 대단한 강국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만...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정성국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아직 잉글랜드가 제대로 전성기를 맞이한 시절은 아니었지만, 한참 기세등등해서 성장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정성국의 대답에 샤쿠샤인은 투로시노를 힐끔 보고 말했다.

“그리고 러시아라는 서양의 나라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도 무척 대단한 강국이라고 들었고.”

“...그렇지요.”

지금이야 아직 러시아 제국을 설립한 표트르 1세가 즉위하기 전이라 유럽 내에서야 강대국으로 인정받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만만히 볼만한 나라는 아니었다.

물론 당장은 청이 강성하던 시기라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내는 만큼 러시아가 당장 아이누인들에게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다만 미래를 대비하라는 마음에서 러시아에 관한 이야기를 헤어질 때 슬쩍 했었는데 그것을 투로시노는 무척 심각하게 여긴 듯싶었기에 정성국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혀를 찼다.

“또한, 이번에는 북미왕국의 도움으로 샤모들이 물러나긴 했습니다만...기회가 생긴다면 다시 우리 아이누 부족 연합의 영역을 욕심낼 자들이지요.”

“으음...”

샤쿠샤인의 말에 정성국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당장이야 에조 지역 자체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기에 쉽게 포기했을 뿐이지, 만약 이곳에서 다른 나라에 값비싸게 팔 수 있는 해삼이나 해달 모피 등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렇게 손쉽게 아이누인들의 독립을 허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만큼 아무리 아이누인들이 왜인들과 거래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시간이 흐른 후에는 분명 왜인들도 상황을 파악하고 다시 에조 지역을 탐낼 것이 분명했다.

샤모를 거론하자 정성국이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샤쿠샤인은 웃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리 북미왕국이 제한적으로 도움을 준다고 한들 우리 아이누인들만으로 나라를 이루었을 때 과연 저들과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할 수 있겠느냐는 부분에서 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국왕 전하의 자비를 바라는 것이고요.”

“후우...”

비록 웃으면서 말을 하고 있지만, 자신들의 무력함을 자각하고 무척 서글픈 표정으로 웃으며 말을 하는 샤쿠샤인과 투로시노를 보고 정성국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무책임하다고 꾸짖으셔도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부디 아이누인들을 불쌍하게 생각하셔서 이 요청을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샤쿠샤인이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자 투로시노 역시 옆에서 고개를 숙였다.

“부디 이 요청을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전하.”

정성국은 고개 숙인 두 아이누인들을 잠시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이누인들이 북미왕국에 합류해서 홋카이도와 아이누 섬이 북미왕국의 영토가 된다면 나쁠 것은 없었다.

아이누 섬이야 당장은 볼모지 같아도 각종 자원이 묻혀있는 섬이었다.

특히 최근 석유를 정제하고 이를 이용하기 위한 연구를 시작한 만큼 미래를 생각하면 더욱 가치가 올라갈 수밖에 없는 섬이었다.

더불어 홋카이도 역시 비슷했다.

조선과 아예 연을 끊을 생각이 아니라면 북방항로는 북미왕국에 무척 중요했다.

이 때문에 아이누인들을 도와 막부를 에조 지역에서 몰아낸 것이고.

그런 만큼 홋카이도가 북미왕국의 영역이 된다면 홋카이도와 아이누 섬 사이의 라페루즈 해협은 온전히 북미왕국의 영역이 되고 북방항로의 안전과 라페루즈 해협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홋카이도를 북미왕국의 영토로 만드는 것은 이득이었다.

어차피 이 북방항로의 안전 때문에 북미왕국은 아이누 부족 연합을 버릴 생각도 없었고 그 어떤 세력이 아이누 부족 연합에 개입하는 것을 철저하게 배제할 생각이었으니.

더불어 아이누 섬과 홋카이도가 북미왕국의 영토가 되면 아시아에 제대로 된 거점이 생기는 만큼 훗날 조선에 안 좋은 일이 벌어질 때 북미왕국이 개입하기도 쉬웠다.

특히 몇 년 후 일어날 경신 대기근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런 만큼 이들의 요청대로 아이누 부족 연합을 받아들이는 것은 나쁠 것이 없었다.

그리고 샤쿠샤인의 말도 충분히 일리가 있었고.

아무리 정성국과 북미왕국이 아이누인들을 도와주려 해도 간접적인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외부의 위협은 막아줄 수 있을지언정 내부의 문제는 개입하기 어려웠다.

그런 만큼 샤쿠샤인의 말처럼 아이누 부족 연합을 북미왕국에 합류시키는 것이 아이누인들에게도 북미왕국에도 좋았다.

거기에 아이누인들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기득권마저 일정 부분 포기할 생각으로 이야기하는 샤쿠샤인이 솔직히 대단해 보이기도 했고.

다만 정성국이 고민하는 이유는 막부 때문이었다.

막부 역시 아이누 부족 연합 뒤에 다른 나라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것이 부담스러워 에조 지역에 손을 떼고 아이누 부족 연합의 독립을 허락한 것이고.

하지만 이는 아이누 부족 연합 뒤에 있는 나라의 정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뿐더러 서양 세력으로 짐작되는 이 나라와 고작 에조 지역을 두고 싸우기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포기한 것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곧바로 북미왕국이 나타나 에조 지역을 장악한다면 과연 막부가 그것을 두고 볼까.

이 부분은 정성국으로서도 예상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막부와 쇼군의 위신에 해가 간다고 생각하고 미친 듯이 덤벼들 수도 있었고 아니면 그냥 모른 척할 수도 있었고.

‘하지만 언제까지 밀무역만 할 수는 없지. 아시아에도 북미왕국의 이름을 알리고 존재감을 키워야 해. 그래야 훗날 청국과도 교역할 수 있을 테고...조선에도 개입할 수 있을 테니...아무리 막부가 부담스럽다 하더라도 이 제안을 포기하긴 좀 아깝지.’

이에 정성국은 내심 결정을 내렸다.

다만 정성국은 당장 북미왕국에 합류하면 급격하게 발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 이들에게 조심스럽게 현재 북미왕국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북미왕국은 최근 에스파냐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막대한 영토를 얻었고 이 영토를 장악하느라 여력이 없어서 당장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막대한 지원과 발전을 이룰 수는 없을 것이라고.

이에 둘은 처음엔 살짝 실망하던 기색을 보였지만 북미왕국이 서양의 대국인 에스파냐와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는 이야기는 몰랐는지 꽤 놀란 눈치였다.

더불어 그런 북미왕국이라면 자신들을 막부와 서양 세력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오히려 표정이 밝아졌다.

그리고 정성국의 설명을 듣고 보니 정일신이나 박경수의 조언처럼 하루빨리 북미왕국에 합류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미왕국의 영역이 확장되면 그만큼 수많은 원주민 부족들이 북미왕국에 합류하게 될 테고 북미왕국은 합류한 원주민 부족들을 신경 쓰지 동맹이라는 이름의 아이누인들을 신경 쓰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둘은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의 생각이 같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후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괜찮습니다. 전하. 북미왕국의 사정이 그렇다는데 기다리지 못할 이유가 없지요. 그러니 부디 아이누 부족 연합의 북미왕국 합류를 허락해주십시오.”

“아이누 부족 연합의 북미왕국 합류를 허락해주십시오.”

설명을 마친 정성국은 그런 아이누인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누 부족 연합의 뜻이 그렇다면야...북미왕국으로의 합류를 환영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다만 자세한 이야기는 일단 청장 회의 후에 하도록 합시다.”

정성국은 그들에게 일단 쉬라고 이야기하고 시종이 가져다준 어느새 미지근해진 물을 단숨에 마신 후 회의실을 나오며 생각했다.

‘북미 지역만 차지할 생각으로 북미왕국이라고 지었는데...이것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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