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정성국이 오랜만에 선착장에 행차했기 때문인지 새한성의 주민들은 다들 관심을 두고 선착장 근처에서 정성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정기선에서 내린 아이누인들과 대화를 하고 그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선착장을 떠나자 마차를 보고 손을 흔들며 열광하던 새한성의 주민들은 점점 멀어지는 마차의 뒷모습을 보고 대화를 나눴다.
“전하께서 선착장까지 나올 정도라니...누구지?”
“아이누인들로 보였는데...?”
긴가민가한 얼굴로 턱을 긁적이는 중년 사내의 말에 최근 이주한 남성이 잠시 정박했던 포로나이에서 보았던 아이누인들을 떠올리며 손뼉을 쳤다.
“아아. 확실히. 털이 풍성한 것도 그렇고 생김새도 그렇고 아이누인들이 맞아.”
“저들이 북미왕국엔 왜 온 거지?”
무슨 일인가 싶어 궁금해하는 중년 사내의 옆에 있던 꼬장꼬장해 보이는 살짝 나이든 사내가 투덜거렸다.
“그보다는 아이누인들을 맞이하기 위해 전하께서 선착장까지 직접 나온다고? 에잉.”
이에 중년 사내가 피식 웃으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에이. 뭐 그게 중요하다고. 여긴 조선이 아니라 북미왕국일세. 그리고 전하께선 소탈하시지 않나.”
“아...하긴. 그건 그렇지.”
중년 사내의 말에 나이든 사내도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재작년인가? 전하께서 왜놈들에게 핍박받는 아이누인들을 도와준 적이 있으니 감사의 인사를 하려고 온 것 아니겠나? 그러니 아까도 허리 숙여 인사한 거고.”
중년 사내의 말에 나이든 사내가 슬쩍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렇겠군. 아이누인들도 최소한 도리는 아는군. 야인인줄 알았더니.”
이에 중년 사내는 나이든 사내의 옆구리를 툭 치면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사람아. 그런 소리는 함부로 하는 게 아녀.”
“아. 그렇지. 크흠.”
* * *
샤쿠샤인과 투로시노는 정성국과 함께 선착장에 대기하고 있던 크고 화려한 장식을 자랑하는 4두 마차에 올라탔다.
곧 마차가 출발했고 정성국과 투로시노가 예전 함께 배를 타고 신대륙을 탐사하기 위해 항해하던 때의 일을 신나게 이야기 나누는 동안 샤쿠샤인은 슬쩍 시선을 돌려 창밖으로 북미왕국의 새로운 수도라는 새한성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건설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수선하고 황량할 거라더니...내가 보기엔 오히려 새김포보다는 더 나은 것 같아 보이는데...북미왕국의 능력이 대단하군. 이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홋카이도에도 이런 도시가 들어설 수 있을까.’
곳곳에 보이는 정원들과 그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 그리고 마차 한쪽에 매달린 왕실기를 보고 손을 흔들며 환호하는 사람들까지.
샤쿠샤인은 그런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다.
머리도 복장도 비슷해서 저들이 조선인인지 원주민인지 슬쩍 보아선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이곳으로 이주한 조선인들과 함께 선상 생활을 경험했던 샤쿠샤인은 이주를 결정하고 배를 탄 조선인들의 사정을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원상이 이곳을 개척하기 전 이곳 원주민들은 아이누인들보다 별반 다를 것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투로시노에게 들어 알고 있었고.
하지만 지금 샤쿠샤인의 눈에 보이는 저 환호하는 사람들은 아이누인들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조선인들의 속담 중에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속담이 있었지? 이들이 마치 그런 것 같군.’
샤쿠샤인은 아이누인들도 지금 보이는 저들처럼 조금 더 여유롭고 근심 없이 살길 바라는 마음에 물끄러미 창밖을 응시했다.
“이런. 오랜만에 투로시노 공과 만나 옛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샤쿠샤인 공이 소외되었군요. 미안합니다.”
정성국은 처음 본 커다란 선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따라 세상을 구경하려고 막무가내로 선박에 올라타려던 투로시노의 모습이 기억나 편히 대하려 했지만 투로시노는 무척 부담스러워했다.
그리고 투로시노와 샤쿠샤인은 비슷한 위치의 아이누인들을 대표하는 지도자인데 계속 투로시노만 편히 대하고 편하게 말을 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라 생각해 결국 투로시노에게도 적당한 존대를 하며 대화했다.
헌데 샤쿠샤인과는 달리 투로시노는 부족장이라고 보기도 어려웠고 제대로 된 직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굳이 호칭을 붙이자면 투로시노는 사령관으로, 샤쿠샤인은 부족장이라고 부를 수야 있겠지만 정성국은 이들을 존대하는 의미에서, 그리고 이들은 성이 없었기에 그냥 이름 뒤에 공(公)을 붙여 불렀고.
이에 예전 기억이 있는 투로시노는 더욱 부담스러워했지만, 이미 당신은 아이누인의 대표임을 자각하라는 정성국의 말과 함께 덧붙인, 그가 아직 조선말이 익숙하지 않을 때 반말하던 시기를 기억하냐며 묻자 투로시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이를 받아들였다.
“아닙니다. 국왕 전하. 그저 북미왕국의 수도라는 이곳 새한성의 거리 풍경이 궁금해서 잠시 시선을 돌렸을 뿐입니다.”
샤쿠샤인의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마차를 보며 손을 흔드는 주민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 그렇습니까? 그거 다행이군요. 샤쿠샤인 공께서는 이곳의 거리 풍경은 어떻게 보십니까?”
이에 샤쿠샤인은 곧바로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거리는 깨끗하고 사람들의 얼굴엔 근심이 없고 행동에 여유가 넘치는 것이 무척 보기 좋습니다.”
당연히 좋은 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정성국이었으나 샤쿠샤인이 진심으로 저렇게 이야기한다는 것을 깨닫고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렇습니까? 하하하. 아직 제대로 개발되지도 않은 도시인데 좋게 보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에 샤쿠샤인은 슬쩍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면서 입을 열었다.
“우리 아이누인들도 언젠가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군요.”
그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덕담을 건넸다.
“샤쿠샤인 공과 투로시노 공, 그리고 이곳에 오지는 못했지만 오니비시 공이 힘을 합친다면 아이누인들도 곧 잘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정성국의 말에 투로시노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지만 샤쿠샤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약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분명 막부가 홋카이도에서 물러나면 모든 것이 좋아질 거로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나마 원상의 도움으로 최소한 막부가 홋카이도에 교두보를 두고 교역을 독점하던 때 보다는 확실히 아이누인들의 삶이 나아지긴 했다.
하지만 이번에 직접 배를 타고 이곳에 도착해 북미왕국을 둘러본 결과 고작 그 정도로 만족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다른 나라들은 열심히 발전하고 있는데 자신들은 제자리에 머문다면 그건 퇴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아이누인들의 상황은 무척 열악했고 북미왕국의 도움 없이 발전할 방법은 전무했다.
그 때문에 샤쿠샤인은 답답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조용히 읊조렸다.
“과연 그럴까요...?”
* * *
정성국과 함께 마차를 타고 북미왕국의 궁에 도착하자 정성국은 곧바로 아이누인들을 위한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장에서 배불리 먹고 마시고 즐긴 후에 궁에서 나와 근처에 배정받은 숙소에 들어온 샤쿠샤인은 탁자에 놓여있던 물병을 들어 마셨다.
“후우...아직도 알딸딸하군.”
“킥킥. 그래? 나도 그런데. 평소에 마시던 술보다 더 향기롭고 술맛도 좋았던 것 같아. 그리고 신기한 요리들도 많았고.”
이미 술에 잔뜩 취했는지 벌게진 얼굴을 한 투로시노가 침대에 앉아 키득거리자 할 이야기가 있어 그의 방에 함께 들어왔던 샤쿠샤인이 혀를 차며 일어났다.
“쯧. 많이 취했으면 일단 자고 내일 이야기하도록 하지.”
이에 투로시노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방안을 나가려는 샤쿠샤인을 막았다.
“아니야. 조금 알딸딸해 기분 좋을 뿐이지...딱히 판단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야. 그보다 할 이야기라...결정을 내린 건가?”
그런 투로시노의 반응에 샤쿠샤인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음...넌 이미 결정을 내렸나 보군?”
그 말에 투로시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야 뭐...이곳에 오기 전부터 이미 결정을 내리긴 했어. 다만 내 결정이 자네에게 영향을 줄까 봐 별말 하지 않았던 건데...아까 보니 자네도 이미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던데?”
“비슷한 생각?”
의아한 표정을 짓는 샤쿠샤인을 보고 투로시노는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이누인들도 이곳에 사는 사람들처럼 잘 살았으면 좋겠다. 아니야?”
의외로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는 투로시노를 보고 샤쿠샤인은 내심 놀라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새김포의 거리를 둘러보고 이곳 새한성의 사람들을 보고 확실히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 그리고 이번에 만난 북미왕국의 국왕 전하라면 충분히 믿고 아이누인들의 미래를 맡길 수 있겠구나 싶었고.”
샤쿠샤인 역시 아이누인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북미왕국으로 합류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았다.
비록 막부가 당장은 자신들의 독립을 허용하고 에조 지역에 손을 떼긴 했지만, 또 언제 탐욕을 부릴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더불어 투로시노가 이야기했던 서양 세력에 관한 이야기도 머릿속에 가시처럼 박혀있었고.
특히나 존재를 알 수 없는 러시아라는 나라보다는 아이누 부족 연합까지 찾아온 잉글랜드가 있었으니.
이를 계기로 원상의 사람들을 통해 서양 세력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서양 세력들이 원주민들에게 얼마나 가혹한지를 알게 될수록 아이누인들이 믿을 구석은 북미왕국 외엔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곧바로 북미왕국에 합류하겠다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은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가 알고 지내는 원상 소속 조선인들은 충분히 믿을 수 있었지만, 정성국을 직접 만난 적은 없었기에 좀 불안했던 것이다.
특히 북미왕국은 왕의 권한이 무척 큰 편이었고 정성국의 결정에 따라 상황이 뒤바뀔 여지가 커 보였기에.
하지만 직접 북미왕국에 도착해 조선인과 뒤섞여 사는 원주민을 관찰하고 정성국과 대면해본 결과 충분히 믿을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기에 샤쿠샤인은 마음을 정했다.
더불어 원주민의 대추장이었던 웅크린 늑대가 외무청의 고위 관리라는 사실도 다행이었다.
그의 안내를 받아 새김포를 둘러보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웅크린 늑대가 이곳 원주민의 대추장이라는 사실과 북미왕국에 합류한 후 정성국의 배려로 외무청의 고위 관리가 되었다는 사실은 정성국이 기존의 권력자들을 어느 정도 배려해준다는 뜻이었다.
더불어 지배계층을 무조건 조선인으로만 채우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고.
아무리 샤쿠샤인과 오니비시가 아이누인들의 미래를 생각해 이런 결정을 내리고 북미왕국의 밑으로 들어가겠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뒷방 늙은이로 살아가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북미왕국의 관리로 살아갈 생각에 정성국과 이야기를 해볼 생각이었고.
헌데 정성국이 이곳 원주민을 대하는 방식을 볼 때 굳이 이런저런 협상을 하지 않더라도 정성국이 알아서 자리를 마련해줄 테니 더는 걱정할 것이 없었다.
그런 샤쿠샤인의 말에 투로시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거대한 나라의 왕이 되었음에도 막부는 제대로 된 나라로 인정하지도 않는 조그만 부족 연합에 불과한 자신들에게 존대하고 환영해주던 정성국은 예전 말이 통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눈빛을 보고 기꺼이 배를 오르게 해준 시절의 정성국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까.
그런 정성국이라면 충분히 믿을 수 있었다.
“아아. 국왕 전하라면 분명 아이누인들을 잘 이끌어줄 거야. 그럼 확실히 결정은 내린 것 같고...언제 이야기할 생각이야?”
이에 샤쿠샤인은 몹시 진중한 얼굴로 투로시노를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이런 이야기는 빨리하는 것이 좋을 듯싶네. 그러니 내일 함께 알현을 청하고 이야기하도록 하지.”
그 말을 듣고 투로시노는 빙긋 웃으며 곧바로 허리를 펴 침대에 누웠다.
“좋아. 그러자고. 내일 보세.”
* * *
다음날 약간의 숙취에 연신 꿀물을 들이켜던 정성국은 샤쿠샤인과 투로시노의 알현 요청에 바로 그들을 회의실로 불러들였다.
정성국이 회의실로 들어오자 즉시 의자에서 일어나는 샤쿠샤인과 투로시노에게 앉으라며 손짓하고 정성국은 빈 의자에 앉아 어제 엄청나게 술을 마시고도 멀쩡해 보이는 둘의 주량을 내심 부러워하면서 바로 알현을 요청한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투로시노가 먼저 입을 열면서 고개를 숙였다.
“먼저 어제 우리 아이누인들을 환대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정성국이 숙취 때문에 머리를 살짝 부여잡고 있다가 투로시노의 말에 애써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아이누 부족 연합은 우리 북미왕국의 중요한 동맹이라 할 수 있는데 당연한 것 아니겠소.”
그러면서 적당히 공치사하던 정성국과 투로시노의 대화가 끝나자 샤쿠샤인은 투로시노에게 눈빛을 보냈다.
투로시노가 고개를 끄덕이자 둘은 심각한 얼굴로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부복하며 말했다.
“국왕 전하. 우리 아이누 부족 연합은 북미왕국의 동맹이 아닌 북미왕국에 합류하고 싶습니다.”
갑작스러운 아이누인들의 행동에 이들이 뭐 하는 건가 바라보고 있던 정성국은 예상하지 못한 샤쿠샤인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