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와우! 저곳에 다 쌀이 재배되고 있다는 겁니까?”
새김포에서 새한강으로 이동하는 정기선의 갑판 위에서 투로시노가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보고 감탄사를 토해냈다.
강을 따라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넓은 논에 파릇파릇한 벼가 물에 잠겨 있는 풍경이 무척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투로시노의 감탄사에 옆에 있던 웅크린 늑대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보이는 곳은 그렇습니다. 여기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저 뒤쪽에서는 밀이 재배되고 있고요.”
웅크린 늑대의 설명에 샤쿠샤인을 비롯해 갑판 위에서 이색적인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이누인들이 무척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어...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인데...”
“저 뒤쪽에도 식량을 재배하고 있다니...”
그런 아이누인들의 반응에 웅크린 늑대는 살짝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이야 아직 벼가 자라는 중이라 딱히 볼품은 없습니다만 추수기에 노랗게 익은 벼가 끝없이 펼쳐진 광경은 무척 장관이랍니다. 그 광경을 보여주지 못해 참으로 아쉽군요.”
웅크린 늑대의 말을 샤쿠샤인이 받았다.
“그렇겠군요. 정말 지금 보이는 저 드넓은 들판에 노랗게 익은 벼라...정말 황금 들판이나 다름이 없겠군요.”
샤쿠샤인은 지금 보이는 파릇파릇한 벼가 아닌 노랗게 익은 벼로 뒤덮인 풍경을 상상하며 부럽다는 표정을 짓자 웅크린 늑대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렇지요. 그래서 그때쯤 되면 정기선 갑판엔 항상 사람이 북적인답니다. 그 황금 들판을 구경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자 투로시노가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작년부터 이곳 북미왕국에서 귀환하는 이주 선단마다 식량이 한가득 실려있어서 어디서 저렇게 많은 식량을 가져오나 궁금해했는데...바로 저기서 수확한 식량이겠군요.”
작년부터 이곳 북미왕국에서 귀환하는 지급 기범선 안에는 식량이 가득 실려있었고 이를 보관하기 위해 포로나이 근처에 커다란 식량창고를 지었고, 또 짓고 있었다.
이에 새로 개척한 지역에서 얼마나 많은 식량이 재배되길래 저러나 궁금했었는데 오늘 이 광경을 보니 충분히 북미왕국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럴 겁니다. 국왕 전하께서 이곳에 정착한 이후 의욕적으로 이곳 새한강 주변의 개간을 추진하고 있거든요. 덕분에 식량을 저장할 창고를 계속 지어도 부족할 정도라 일부를 포로나이 항으로 옮긴다고 했었으니...”
식량이 넘쳐난다는 소리에 샤쿠샤인은 부럽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참 부러운 소리군요.”
이에 웅크린 늑대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하하. 그래도 아이누 부족 연합도 식량이 부족하진 않잖습니까.”
솔직히 아직은 아이누 부족 연합은 식량이 넘쳐나는 편은 아니었다.
그저 아이누 섬에서 재배하는 감자와 원상이 싸게 넘겨주는 식량 덕분에 굶는 일은 사라졌다는 정도였지.
“예. 북미왕국 덕분에 이젠 굶을 일은 없지요. 하지만 이 광경은 정말 인상 깊군요.”
그러면서 샤쿠샤인은 다시 고개를 돌려 강 옆에 개간된 논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강을 따라 끝이 안 보일 정도로 조성된 논밭과 곳곳에 지어진 식량창고까지...북미왕국의 식량은 무척 풍족한 듯싶으니...우리 아이누인들도 북미왕국에 합류한다면 더는 식량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군.’
* * *
정성국은 곧 도착할 아이누인들을 맞이하기 위해 새한성의 선착장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려 저 멀리 보이는 정기선을 바라보았다.
‘좋네. 시간은 딱 맞췄군.’
정성국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 정성국이 직접 새한성의 선착장까지 나간다고 했을 때 청장들의 반대가 꽤 컸다.
아무리 아이누 부족 연합이 중요한 동맹이라고 한들 그들은 아직 북미왕국의 도움 없이는 자립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헌데 그들을 환영하기 위해 북미왕국의 왕인 정성국이 직접 선착장까지 행차한다니.
마치 북미왕국이 아이누 부족 연합에 숙이는 모양새가 아닌가.
이에 조선인 청장들이 더욱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성국은 그런 청장들을 보고 자신의 행차에 너무 의미 부여하지 말라면서 그들의 반대를 일축해버렸다.
이곳 새한성으로 이주한 후 궁궐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바람도 쐴 겸 겸사겸사 행차하는 것뿐이라면서.
더불어 조선인 청장들이 원하는 것처럼 건물 1층에 마련된 대전에서 아이누인들을 맞이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정성국이었다.
‘왜 쓰지도 않는 대전을 커다랗게 만들어 놓고 그곳에 그럴듯한 옥좌까지 가져다 놨나 했더니만...’
새김포의 조그마한 건물과는 달리 이곳의 건물은 궁(宮)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그리고 궁의 정문으로 들어와 보이는 곳이 바로 거대한 대전의 입구였다.
그 입구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것이 바로 거대한 옥좌였고.
정성국이 예전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보던 이 동양풍의 옥좌는 보통 권위의 상징으로 알려진 것처럼 무척이나 높고 커다랬으며 화려한 편이었다.
비록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지만, 곳곳을 황금으로 장식해두었고 등받이의 양 모서리 부분에는 황금 부리가 인상적인 흰머리수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으니.
처음 정성국이 구경하러 들어갔다 그 화려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을 정도이니 오죽할까.
조선의 용상(龍床)과 비슷한 모습이었지만 더 크고 화려해서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만들었는지 솔직히 이 옥좌를 만든 장인을 붙잡고 묻고 싶을 정도였다.
더불어 과연 이 대전을 쓸 일이 있을까 싶기도 했고.
조선에서야 이러한 용상에 왕이 앉아 어전 회의를 한다지만 북미왕국에선 주로 회의실에서 회의를 진행하는 만큼 이 대전의 사용처가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다만 건물 자체가 워낙 커서 남는 공간이 많았기에, 그리고 나중에 쓸데가 있겠거니 싶어 별말은 하지 않았지만 먼지만 쌓여가던 공간이었다.
헌데 이번 아이누 부족 연합을 맞이해 이곳을 사용하자는 청장들의 말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이번 아이누 부족 연합의 구성원 중에 지도자급이 없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명백하게 그들의 지도자라 할 수 있는 샤쿠샤인과 투로시노가 있는데도 옥좌에 앉아 그들을 내려본다는 것은 그들의 격을 자신들보다 낮춰본다는 의미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해서 정성국은 곧장 이렇게 직접 마중을 나온 것이다.
더불어 대전은 계속 먼지나 쌓이게 잠가 버렸고.
그리고 정성국은 생각했다.
‘외무청을 원주민 출신으로 채운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다행이야. 이들은 그런 고정관념이 별로 없으니.’
처음에 원주민 추장들을 외무청의 관리로 임명한 것은 단순한 이유였다.
원주민 추장들은 대부분 토론을 통해 의견을 취합하는 만큼 협상에도 능한 편이라는 것.
더불어 다른 청에 배속해 일을 시키기엔 공부해야 할 지식이 많은 편이라 당장 중요하지 않은 외무청에 집어넣은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외무청의 규모가 커지고 외무청 관리는 주로 주변 원주민 부족과 협상을 해야 하는 만큼 같은 원주민 출신이 협상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이기도 했고, 당분간은 북미왕국이 원주민 국가로 알려져야 하는 만큼 대외 창구라 할 수 있는 외무청을 원주민 출신으로 구성했던 정성국이었다.
그리고 정성국의 기대만큼 외무청 관리들은 북미왕국 주변의 다른 부족들을 순조롭게 설득시켜 북미왕국을 확장하는데 일등 공신이 되었고.
물론 조선 출신이라 하더라도 관리로 일할 정도라면 정성국이 얼마나 원주민을 생각하는지 아는 만큼 함부로 원주민을 깔보지는 못할 테지만 이들은 조선에서 살아오면서 보고 들은 것이 있었기에 이번처럼 형식에 집착하거나 내심 야인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기에 외무청을 원주민 출신으로 꾸린 것을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정성국이었다.
‘외무청이 너무 확장에만 집착하지 않으면 딱인데...’
보통 정성국이 생각하기로는 군부에 해당하는 군사청이 호전적인 성향을 보여야 하는데 무장 수준은 높아도 절대적인 병사수가 워낙 적기 때문인지 오히려 확장엔 소극적인 편이었다.
현재의 북미왕국 영역을 지키기에도 벅차다는 생각 때문인지.
오히려 외무청의 원주민 추장들이 주변 부족을 적극적으로 북미왕국에 합류시키려고 애를 쓰며 북미왕국의 확장에 집착하는 편이었다.
외무청에 일하면서 서양 세력에 대한 교육을 받은 원주민 추장들은 북미왕국이 아니었다면 훗날 자신들에게 어떤 미래가 펼쳐졌을지를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나 멕시코 지역 원주민들의 실상을 파악하면서 서양인들이 얼마나 잔혹한지를 깨달았고.
그 때문인지 외무청에 일하는 원주민 관리들은 대부분 북미왕국이 하루빨리 북미 지역 전체를 차지하길 원했다.
그렇다고 같은 원주민으로서 서양 세력에 의해 핍박받거나 자신의 영역에서 쫓겨난 원주민들이 안타까워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북미왕국이 서양 세력에 의해 아즈텍 제국이나 잉카 제국처럼 허무하게 무너질까 걱정이 되었을 뿐.
북미왕국에서 그나마 가장 많은 정보를 접하는 외무청 관리였기에 이들은 현재 북미 지역의 상황을 어느 정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서쪽은 북미왕국이, 동쪽은 잉글랜드가, 북동쪽은 프랑스가 일부 차지하고 있었지만 세 나라 모두 현재의 영역을 교두보로 삼아 내륙으로 거침없이 뻗어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북미왕국의 확장이 늦춰지면 그만큼 서양 세력의 차지하는 영역이 더욱 커질 것으로 생각했다.
비록 에스파냐가 북미 지역의 권리를 넘기긴 했지만, 그 권리는 그저 에스파냐가 더는 북미 지역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의미에 불과하다고 정성국이 누누이 이야기했었으니.
그 때문에 외무청의 관리들은 서양 세력이 내륙으로 확장하다 결국 북미왕국을 공격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 때문에 더더욱 확장에 집착하는 것이다.
정성국은 무리하게 확장하다가 북미왕국이 흔들리는 것을 경계하는 반면 외무청의 관리들은 빠른 확장을 통해 서양 세력이 차지할 영역을 먼저 선점한다면 저들이 이용할 수 있는 원주민 자체가 줄어드는 만큼 북미왕국이 아즈텍 제국처럼 서양 세력에 의해 무너지진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뭐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정성국이 그런 생각을 할 때 뒤쪽에서 호위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정기선이 도착했습니다.”
“아? 그렇군.”
정성국은 생각을 멈추고 선착장에 정박한 정기선에서 가장 먼저 내리는 사람을 보고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 그를 환영했다.
“투로시노! 오랜만이네!”
그런 정성국의 모습에 투로시노는 눈을 크게 뜨며 몹시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정성국이 자신들을 맞이하기 위해 선착장에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으니까.
“아. 대방, 아니 국왕 전하! 선착장에 나오실 줄은...”
무척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곧장 선착장에 무릎을 꿇으려는 투로시노의 어깨를 잽싸게 잡으면서 피식 웃었다.
“이렇게 유창하게 말을 하는 자네를 보니 감회가 남다르군. 자네는 처음 이곳을 탐사할 때 배에 올라타 함께 이곳까지 항해한 동료나 다름이 없는데 오랜만에 이곳을 방문한 자네를 환영하기 위해 내가 이곳에 나온 것이 그렇게 놀랄 일인가. 그래. 잘 지냈나?”
정성국의 환영에 투로시노는 몸 둘 바를 몰랐지만 이미 어깨가 정성국의 손에 잡혀있었기에 고개만 숙이면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전하.”
그런 투로시노의 반응에 정성국은 살짝 안타까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이것 참...그렇게 숙일 필요는 없네. 자네는 아이누를 대표해서 내 앞에 선 것 아닌가.”
투로시노는 정성국의 말과 행동에 흐뭇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면서도 다시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이누 부족 연합은 북미왕국의 도움으로 꿈에 그리던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북미왕국이 아이누 부족 연합의 은인이라 할 수 있는데 어찌 북미왕국의 국왕 전하께 무례를 범하겠습니까.”
“끙...”
정성국은 투로시노의 반응에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잡고 있던 팔을 풀며 뒤쪽에서 밝은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누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샤쿠샤인은 무릎을 꿇는 것은 정성국이 원치 않는 듯 보였기에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이누 부족 연합의 대표 중 한 사람인 샤쿠샤인이라고 합니다. 아이누인들을 가엽게 여기고 도와주신 자애로운 북미왕국의 국왕 전하를 이렇게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런 샤쿠샤인의 인사에 정성국은 살짝 쓴웃음을 머금고 정중하게 대답했다.
“북미왕국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아이누 부족 연합 사람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