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대기만 하고 있으니 좀이 쑤시는데?”
산타페에 복귀해 대기한지도 벌써 2주가 넘었기에 음흉한 여우가 투덜거리자 침상 위에서 뒹굴뒹굴하던 게으른 곰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기회에 쉴 수 있으니 좋지 않아?”
속 편한 소리를 하는 게으른 곰을 보고 음흉한 여우는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별로. 하루빨리 우리를 공격한 놈들의 근거지를 공격하고 싶은데 대체 왜 대기해야 하는 건지.”
그러면서 음흉한 여우가 주먹을 꽉 쥐면서 살짝 열이 오른 듯 보이자 게으른 곰이 손을 흔들었다.
“워워. 진정하라고. 친구. 어차피 우리를 공격한 놈들은 내가 철저하게 추격해서 싹 다 잡았는걸? 근데 굳이 그럴 필요 있어?”
게으른 곰의 말에 음흉한 여우는 눈을 부라리면서 게으른 곰을 쏘아보았다.
“물론. 저들 때문에 경비대원이 5명이나 죽었어. 제대로 복수를 해 줘야지.”
중상을 입은 경비대원 6명 중 2명이 끝내 사망함에 따라 이번 아파치 족의 공격으로 총 5명의 경비대원이 죽은 셈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산타페에 대기하고 있는 병사들은 처음으로 자신의 전우가 죽었다는 사실에 꽤 날이 서 있었고.
이 때문에 간혹 산타페에 방문하던 주변 타 부족들은 혹시 오해라도 살까 싶어 아예 산타페 방문을 자제할 정도였다.
하지만 게으른 곰은 음흉한 여우의 말에 머리를 긁적였다.
게으른 곰 역시 경비대원 몇이 기습을 받고 죽었다는 소리를 처음 듣고 복수를 위해 철저하게 추격해 결국 마을을 공격했던 자들을 몽땅 잡았다.
그렇기에 게으른 곰은 이미 복수는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으음...어차피 조그마한 부족이고 전사들 태반이 사라졌으니 알아서 몰락할 텐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걔들 은근히 독하던데...”
게으른 곰은 목숨을 던져가면서 악착같이 덤벼들던 아파치 족을 떠올리고 떨떠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게으른 곰을 보고 음흉한 여우는 더욱 열을 올렸다.
“그게 더 기분 나쁘다고! 고작 조그마한 부족 따위가 우리 북미왕국을 만만하게 보고 덤벼들었다는 게! 이 기회에 주변 부족에게 제대로 북미왕국의 힘을 보여줬으면 좋겠어! 그렇지 않으면 계속 이런 일이 벌어질걸?”
음흉한 여우의 말도 일리는 있었지만, 너무 열이 오른 음흉한 여우를 보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뭐 조만간 새김포에서 명령이 내려오겠지. 그러니 난 그 전엔 푹 쉬련다.”
그러면서 다시 모포를 두르고 뒹굴거리는 게으른 곰이었고 그런 게으른 곰의 모습을 보고 맥이 빠진 음흉한 여우는 혀를 찼다.
“쯧쯧.”
그때 숙소의 문이 열리며 정보를 얻기 위해 지휘실로 향했던 굳건한 바위가 들어왔고 음흉한 여우가 그를 반겼다.
“오. 왔어?”
“아아. 게으른 곰. 또 침상에서 뭉그적거리는 거냐.”
“응.”
군사청에 소속된 병사들 대부분이 무척 날카로워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나른하면서도 행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게으른 곰을 보고 혀를 찬 굳건한 바위는 방금 새김포에서 내려온 명령을 친구들에게 알려주었다.
“쯧. 출격 명령이 떨어졌다.”
“드디어! 좋았어!”
“어휴...”
음흉한 여우는 드디어 출격한다는 명령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좋아했지만, 모포 안에 들어가 있던 게으른 곰은 세상 힘든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대조적인 두 친구의 반응에 굳건한 바위가 피식 웃을 때 음흉한 여우가 구체적으로 묻기 시작했다.
“저들 부족의 근거지를 공격하는 것 맞지?”
“아아. 다만 저들에게 항복할 기회는 주라더군.”
그런 굳건한 바위의 대답에 음흉한 여우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탐사대 전체가 출격하는 거 아닌가?”
“맞아.”
굳건한 바위의 대답에 음흉한 여우는 살짝 맥이 빠졌다.
“쳇. 그럼 저들은 무조건 항복할 것 같은데...야. 어떻게 생각하냐? 아까 저들이 꽤 독하다고 하지 않았어?”
음흉한 여우가 침상에서 좌절하고 있는 게으른 곰을 툭툭 치면서 묻자 게으른 곰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야...독하다고 해도 기껏해야 500명도 안 되는 조그마한 부족일 텐데 대항하면 그건 독한 수준이 아니라 미친 거지.”
게으른 곰의 대답에 음흉한 여우는 이번 출격에도 실제 전투를 경험할 기회는 없겠구나 싶어 입맛을 다셨다.
“쩝...결국, 주변 부족들에게 무력시위나 하는 정도인가?”
이에 굳건한 바위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렇게 될 확률이 높아 보여. 내일 낮에 출격한다고 하니 미리 준비해두라고. 휘하 부하들에게도 알리고.”
“아아. 그러지.”
그러면서 음흉한 여우가 먼저 숙소를 나가자 굳건한 바위는 모포를 붙잡고 침상에서 뭉그적거리는 게으른 곰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넌 안가냐?”
“으으...좀 있다 알리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서 모포를 꼭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짓는 게으른 곰이었다.
이에 굳건한 바위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되겠냐? 빨리 너도 일어나.”
“쳇.”
* * *
‘두두두두두’
멀리서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들리자 조그마한 마을의 원주민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너도나도 티피에서 나와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런 원주민들에게 보인 것은 저 멀리서 대규모로 무리 지어 평원을 거침없이 달려나가는 말을 탄 전사들의 모습이었다.
이를 보고 원주민들은 자신도 모르게 입이 벌어져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들도 말이라는 동물을 모르진 않았다.
최근 간간이 말을 타고 다니는 원주민들이 있었기에 익숙하지는 않았어도 생소하진 않았으니까.
그때도 가까이서 보면 그 높이 때문에 꽤 위용이 대단했다.
그렇기에 고작 수명, 혹은 수십 명이 말을 타고 달릴 때도 무척 두려울 정도였으니까.
헌데 저렇게 대규모로 무리 지어 달리자 땅이 뒤흔들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위용과 박력이 엄청났다.
이에 원주민 어른들은 살짝 두려운 기색이 섞인 얼굴로, 그리고 아이들은 두 눈을 반짝이면서 대규모로 무리 지어 달리는 말을 탄 전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러길 잠시.
비록 곧바로 마을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점점 가까워졌고 저들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아 보였기에 혹여 자신들의 마을로 쳐들어오는 것이 아닐까 싶어 마을의 전사들이 잠시 긴장하며 일단 무기를 챙기기 시작했다.
물론 무기를 든다고 맞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빈손으로 저 광경을 보는 것이 더욱 두려웠달까.
마을의 전사들이 그런 모습을 보이자 무리 지어 달리는 말을 탄 전사들의 모습에 눈을 반짝이며 정신없이 바라보는 아이들을 여성들이 급히 손을 붙잡고 티피 안으로 들어갔고.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말을 탄 저 대규모 무리는 슬쩍 방향을 틀어 마을과 거리를 두고 계속 달렸고 이 말을 탄 대규모 무리는 마을을 지나쳐갔다.
곧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어느덧 사라지자 정신을 차렸다.
“저건...무슨 부족이길래 저렇게 말을 탄 전사들이 많은 거야? 주변에 저런 강성한 부족이 있나?”
긴장해서 흑요석으로 만든 도끼의 자루를 아직 으스러져라 움켜쥐고 있었던 마을의 전사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자 그제야 마을의 전사들이 긴장이 풀린 듯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것보다 저렇게 무리 지어 이동하니...장관은 장관일세.”
한 전사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일 때 긴 머리를 딴 중년의 전사가 전에 들었던 한 이름을 생각해냈다.
“저들이 온 방향을 보아하니...아마 그 북미왕국이라는 곳 아닐까? 엄청난 대부족이라고 하던데?”
그 말에 대부분 놀란 표정을 짓는 전사들이었다.
갑자기 나타나 에스파냐의 영역을 차지한 북미왕국은 아직 베일에 가려진 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부족이라는 소문은 있었지만 실감하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수천의 말을 탄 전사들이 평원을 거침없이 질주하는 모습을 보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 그 에스파냐를 대신해 푸에블로 족의 영역을 차지한? 이야. 대단하네.”
그러면서 북미왕국의 전사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감탄하는 전사였다.
“그러게. 말을 탄 전사들도 가까이서 보면 무척이나 위협적으로 느껴졌었는데...그런 전사들이 저렇게 많이 뭉쳐서 함께 달리니까...어휴.”
그의 옆에 있는 한 전사가 방금의 광경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에스파냐라는 놈들과 싸워 승리한 부족이라는 소문이 있던데...아까 그 전사들을 보니 맞는 것 같네.”
그 소문을 흘려들었던 전사들조차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한 젊은 전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그러게. 근데 갑자기 왜 저렇게 무섭게 달려가는 거지?”
이에 그 옆에 있던 전사가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면서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바로 공격할 것만 같았던 날카로운 분위기의 말을 탄 전사들을 떠올리고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으음...그건 모르겠지만...과연 저 전사들을 막을 부족이 있을까 싶네.”
그 말에 주변 전사들의 안색이 모두 심각해졌다.
확실히 그랬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말을 탄 전사 몇 명과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
이번에야 저들이 신경을 쓰지 않고 그냥 지나쳐 다행이었다지만 만약 저들이 자신들의 마을을 공격했다면 저항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게. 우리를 공격하러 오지 않은 것은 다행인데...저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냥 쓸려나갈 것 같은데...?”
한 전사가 맥없이 이야기하자 다른 전사들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분위기가 가라앉은 가운데 흰머리수리의 깃털로 장식한 모자를 쓰고 있던 나이든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우리 힘으로 막기는 어렵겠군. 그렇다고 주변 부족들이 연합한다 해도 막기는 힘들어 보이고.”
“아. 추장님.”
“저 산타페에 북미왕국의 말을 탄 전사들이 엄청나게 있다는 소문을 듣긴 했는데...그게 저들인가 보군.”
추장의 말에 주변 전사들이 다들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습니까? 얼핏 봐도 우리 부족 전체보다 많은 숫자로 보이는데...전사가 그 정도면 대체 북미왕국은 얼마나 큰 부족인 건지.”
“그러게나 말일세.”
추장은 주변 전사들의 의견에 동의하며 뒤쪽에 서서 북미왕국의 전사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이 마을의 주술사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하나? 할망구?”
곱게 나이든 노파는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추장을 보며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북미왕국은 떠오른 해와 같아. 너무 강력해. 부족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푸에블로 족처럼 그들의 밑으로 들어가던가 아니면 아주 멀리 이주해야 할 거야.”
그 말에 추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그 광경을 직접 보았는데 저들과 맞선다는 선택은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니까.
결국, 부족의 미래를 위해 선택을 해야 했고 이에 추장은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
“흐음...일단 산타페로 가봐야겠군.”
“아아.”
그렇게 이번 출격을 통해 북미왕국의 힘을 제대로 보여주면 주변 부족이 북미왕국에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당분간은 조용할 것이라 여긴 정성국의 생각과는 달리 원주민들은 평원을 거침없이 달려나가는 북미왕국의 전사들을 보고 북미왕국의 힘에 경악해 북미왕국에 더욱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 * *
거침없이 들판을 질주해나가던 북미왕국의 탐사대는 곧 말을 멈추고 잠시 휴식에 들어갔다.
이에 탐사대원들은 수통에 들어있는 물을 마시고 육포를 입에 넣으며 구시렁거렸다.
“어휴. 생각보다 힘드네.”
“그러게. 며칠째 제대로 쉬지도 않고 달리고 있으니. 휴우.”
그때 맨 앞에서 지도를 유심히 보고 있던 중년 사내에게 지친 기색의 외무청 관리가 다가가 말을 걸었다.
“방금의 마을도 방문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외무청 관리의 말에 탐사대의 대장이라 할 수 있는 이정호가 지도에서 눈을 떼고 외무청 관리를 바라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너무 작은 마을까지 들를 필요 있겠습니까? 적당한 규모의 부족이야 몰라도 아까처럼 작은 부족의 마을까지 들러서 외무청의 관리가 나서서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만...진격 속도도 고려해야 하니까요.”
이정호 대장의 말에 외무청 관리는 그도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정호가 손에 들고 있는 지도에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그건 그렇지요. 알겠습니다. 헌데 목적지까진 얼마나 남았습니까?”
이에 이정호 대장은 다시 지도를 바라보고 대충 거리를 계산해보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이틀은 더 가야 할 겁니다.”
그 대답에 외무청 관리는 안색이 거무죽죽해졌다.
이 고생을 이틀이나 더 해야 한다니.
외무청 관리는 다른 탐사대원들과 마찬가지로 이 고생을 하게 만든 아파치 족의 근거지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까득...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