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며칠이 지난 후 정성국의 집무실로 군사청장과 웅크린 늑대가 찾아왔다.
뒤늦게 산타페에서 다시 전령을 보냈는데 이 전령은 포로로 잡은 아파치 족을 심문한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가져왔다.
외무청은 이미 새한성으로 이전했기에 이곳에 남아있던 웅크린 늑대가 외무청장인 조용한 곰을 대신해서 정성국에게 산타페 주변의 여러 부족에 관한 설명을 하기 위해 함께 온 것이다.
아무래도 외무청은 푸에블로 족을 북미왕국으로 합류시키기 위해 열심히 돌아다녔고 덕분에 산타페 주변의 다른 부족들에 대한 정보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먼저 웅크린 늑대가 외무청에서 파악한 주변 부족에 대한 정보를 이야기하고 군사청장이 전령이 가져온 보고서에 내용을 보고하자 정성국은 인상을 찡그렸다.
“허어...식량이 부족해서 살기 위해 약탈을 했다?”
“그렇다고 합니다. 전하. 그리고 자신들이 돌아가지 못한 이상 부족에 남아있는 부족원들이 굶을 것이 걱정이라는 이야기도 했답니다.”
“이것 참...”
정성국은 군사청장이 건넨 보고서를 보면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 산타페 외곽을 공격한 아파치 족의 근거지는 산타페에서 북동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는 전생의 캔자스 주였다.
이 캔자스 주는 미국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었고 더불어 미국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나 다름이 없었다.
헌데 그런 곳에 자리를 잡았으면서도 제대로 농사를 짓지 못해 사냥과 약탈을 병행해왔다니.
‘아파치 족이 그만큼 농사일에 익숙지 않다는 소리인가? 아 생각해보면 저들이 심는 작물은 겨울밀이 아니겠구나.’
이번에 약탈을 계획한 아파치 족의 근거지는 캔자스 주 남서부의 꽤 건조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 수확이 시원찮은 것도 영 이해 못 할 상황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미국인들도 1800년대 후반 미국으로 이주한 러시아인들이 가을에 심어 여름이 되기 전에 수확하는 겨울 밀을 가져와 여름의 열기와 가뭄을 벗어나기 전에는 농작물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었으니.
다만 들소는 꽤 있는 것으로 아는데 아파치 족이 굶주린다는 것이 좀 의외긴 했다.
정성국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군사청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고는 여기까지입니다. 전하. 어쩌시겠습니까? 탐사대에 공격 명령을 내릴까요?”
“글세...좀 애매한데.”
정성국은 찌푸린 표정으로 고심하기 시작했다.
상황을 보아하니 굳이 탐사대를 보내 저들의 근거지를 공격하지 않더라도 이번 공격으로 인해 부족의 전사 대부분이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혀버렸으니 두 부족의 몰락은 확정적이었다.
그리고 두 부족의 추장 역시 자신들을 추격하는 탐사대원을 막으려다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고.
그런 상황에서 굳이 탐사대원들을 저들의 본거지로 보낼 필요가 있나 싶었다.
더불어 웅크린 늑대의 말에 따르면 아파치 족 대부분은 에스파냐를 대신해 푸에블로 족의 영역을 차지한 북미왕국을 경계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탐사대를 보내 이미 반항조차 어려운 몰락이 예정된 두 부족을 공격하려 이동하면 자칫 다른 부족들이 오해하고 아파치 족 전체가 덤벼들 수도 있었다.
그건 정성국이 원하는 바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군사청장은 고민 어린 표정의 정성국을 보고 재차 요청했다.
“전하. 어차피 저들이 먼저 우리 영역을 침범하고 공격했습니다. 그러니 탐사대원들을 보내서 저들 부족의 본거지를 정벌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으음...탐사대가 아파치 족의 영역으로 들어서면 그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같은데?”
정성국의 말에 군사청장이 웅크린 늑대를 바라보며 눈치를 줬고 웅크린 늑대는 고개를 끄덕이며 끼어들었다.
“전하. 그것이 걱정이라면 저희 외무청에서 탐사대와 함께 움직이겠습니다.”
그런 웅크린 늑대의 말에 정성국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함께 움직이겠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어차피 당장 아파치 족이 차지하고 있는 영역을 장악할 생각은 아니지 않습니까?”
웅크린 늑대의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성국 역시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해 약탈했다는 부족의 근거지를 공격해 북미왕국 주변의 부족들에게 경고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아파치 족 전체가 나선 것도 아닌 상황에서 괜히 조그마한 부족을 공격하다 일이 커지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당장 새진주까지 영역을 확장하는 것만 해도 북미왕국의 역량을 총동원해야 하는데 그런 상황에서 아파치 족과의 전면전은 어불성설이다.
더불어 만약 아파치 족과의 전면전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별다른 이득도 없었고.
“그렇지. 당장은 새진주 건설이 더 급해. 내륙으로의 영역 확장은 그 이후에나 가능하겠지.”
“그런 만큼 외무청 관리들이 탐사대원들과 함께 이동해 다른 아파치 족이 나서는 것을 막아보겠습니다.”
“가능할까?”
정성국은 살짝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웅크린 늑대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들에게 우리를 공격했던 두 부족의 본거지만 공격하고 물러난다고 알리면 크게 반발하지는 못할 겁니다. 탐사대 전체가 움직일 테니 말입니다.”
“흐음...”
정성국은 탐사대 전체가 움직이면 아파치 족이 위협을 느끼고 격렬하게 반응할 거라고 판단했는데 웅크린 늑대는 오히려 그 때문에 함부로 덤비지는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에 정성국이 다시 고민하기 시작하자 웅크린 늑대가 덧붙였다.
“그리고 아직 저들은 북미왕국의 힘을 정확히 모릅니다. 이번 일도 부정확한 소문만으로 북미왕국을 판단했기에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고 봅니다. 그런 만큼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해서라도 탐사대를 보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전하.”
정성국은 잠시 고민했지만 외무청의 웅크린 늑대까지 탐사대를 출동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하자 결정을 내렸다.
자신보다는 아무래도 외무청이 더 정확한 사정을 알고 판단을 내렸으리라고 생각한 탓이다.
“알겠네. 그럼 탐사대의 출동을 허락하도록 하지.”
결국, 정성국의 허락하자 군사청장과 웅크린 늑대의 안색이 밝아졌다.
군사청장은 조그마한 부족이 감히 북미왕국을 만만하게 보고 약탈하려 했다는 것에 무척 분노하고 있었다.
더불어 에스파냐와의 전쟁에서도 발생하지 않은 사망자까지 발생했었으니.
물론 상황이 상황이라 정성국은 딱히 군사청을 문책하지는 않았지만 군사청장은 정성국을 볼 면목이 없었는데 이를 만회할 기회가 생겼으니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웅크린 늑대는 이번 결정으로 인해 아직 눈치를 보며 합류하지 않은 몇몇 푸에블로 부족을 합류시킬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더불어 북미왕국의 힘을 파악하고 주변 부족들이 알아서 숙일 테니 협상하기도 쉬울 테고.
““알겠습니다! 전하!””
그런 반응을 보고 정성국은 쓴웃음을 머금고 군사청장을 보며 덧붙였다.
“다만 저들을 포로로 잡는 선에서 끝내도록 하게. 본거지는 불태우도록 하고.”
어차피 제대로 반항도 하지 못하는 자들을 죽여봐야 학살이나 다름이 없었고 이는 잠자리만 사나울 뿐이라고 생각한 정성국이었다.
차라리 포로로 잡아 부려먹는 것이 그들에게도, 그리고 북미왕국에도 낫다고 판단했다.
군사청장은 살짝 아쉬워하긴 했지만, 저들의 본거지를 불태우는 것과 탐사대 전원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주변 부족에게 경고하는 것은 충분했고 정성국의 성향과 북미왕국에 일손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하. 일단 저들 부족을 포위한 후 항복을 권유하겠습니다. 포로가 이야기한 내용대로라면 작은 부족이니 탐사대 전원이 움직인다면 감히 반항하지 못할 겁니다.”
정성국이 군사청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때 웅크린 늑대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게 주변 부족과도 어느 정도 접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에 정성국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면서 말했다.
“다른 아파치 족이나 나바호 족과 말인가?”
“그렇습니다.”
괜히 주변 부족과 마찰이 생길까 걱정되어 접촉 자체를 막았더니 북미왕국을 만만하게 보고 이런 상황이 발생했다.
그런 만큼 웅크린 늑대의 말도 일리는 있었기에 잠시 턱을 매만지면서 말하는 정성국이었다.
“흐음...외무청의 관리가 그렇게 남아돌진 않을 텐데?”
가뜩이나 최근 동진을 결정하면서 새나주에서 새진주까지 이동하는 경로 근처의 수많은 부족과 접촉하느라 바쁜 외무청이었다.
이를 지적하자 웅크린 늑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주장을 굽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접촉조차 하지 않는 것도 상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최소한의 인원을 배정해서 교류의 물꼬는 터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훗날 편해질 테고요.”
당장은 인력이 부족해서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내륙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것을 포기할 생각은 아니었기에 정성국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게. 다만 너무 주변 부족을 흔들지는 말게.”
의외로 외무청이 확장에 적극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산타페 주변의 다른 부족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허락한다면 외무청의 관리들은 현란한 말솜씨와 풍부한 식량을 무기로 이들을 흔들 것이 분명했다.
정성국은 이를 경계한 것이다.
내륙으로의 확장은 좋다.
특히 아파치 족이 자리 잡은 캔자스 주는 훗날 프랑스가 미시시피 강의 본류와 지류를 탐사하고 자신들의 영토라고 선언한 루이지애나에 포함되는 지역인 만큼 미리 이들 부족과 접촉해두는 것은 나쁠 것이 없었다.
정성국은 현재 북미 동해안에 자리 잡은 잉글랜드도 무척 경계했지만, 훗날 미시시피 강을 탐사하고 이 지역 전체의 권리를 주장한 프랑스 역시 경계하고 있었다.
현대의 루이지애나는 미국 남부의 미시시피 강 입구에 위치한 작은 주에 불과하나 프랑스가 식민지로 선언한 루이지애나는 북쪽은 오대호에서 남쪽은 멕시코만까지, 서쪽은 로키산맥에서 동쪽은 애팔래치아 산맥까지를 포함하는 미국의 1/4는 넘는 광활한 영역이었으니까.
물론 역사가 이미 바뀌었고 북미왕국의 존재가 유럽에 알려졌으며 에스파냐가 북미왕국에 북아메리카의 모든 권리를 넘겼다고 알려진 만큼 과연 프랑스가 미시시피 강을 탐사하고 이 영역을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할까 싶기는 했다.
하지만 직접 북미왕국에 당한 에스파냐를 제외한다면 다른 유럽 강대국들은 원주민들로 구성된 북미왕국을 고려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는 정성국이었다.
더불어 오만하기로 소문난 프랑스인들 아닌가.
아무리 정성국이라 하더라도 정보의 부재로 인해, 그리고 안토니오 부왕과 누에바 에스파냐의 관리들이 살짝 과장한 보고서로 인해 유럽에서 북미왕국의 국력이 어마어마하게 뻥튀기되어 알려졌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으니 이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만큼 정성국 역시 새진주의 건설이 끝나면 플로리다 지역에 병력을 보내 플로리다 지역을 장악하는 것과 동시에 미시시피 강 하류에도 새로운 항구를 건설하고 그곳을 기점으로 배를 통해 미시시피 강을 탐사하면서 내륙을 장악할 생각이었고.
하지만 당장은 절대 무리였기에 이를 당부하자 웅크린 늑대는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