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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135화 (135/850)

135화

저 멀리 조그마한 마을이 보이는 산기슭에 무장한 원주민들이 몸을 낮추고 있었다.

이들은 아파치 족 출신의 원주민들로 겨울을 나느라 그동안 비축해두었던 식량 대부분을 소모했기에 당장 먹을 것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아 사냥도 여의치 않았고.

그 때문에 이 근처에서 그나마 식량이 풍족한 푸에블로 족의 마을을 약탈하기로 하고 비슷한 사정이었던 주변 부족과 연합해 산타페 외곽의 조그마한 마을 근처로 이동했다.

두 부족은 서로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의외로 사이가 좋았는데 이는 두 부족의 추장이 꽤 친했기에 가능했다.

그 때문에 서로의 부족 사정을 훤히 파악하고 있었고 함께 약탈을 결정하고 이곳까지 왔다.

하지만 이렇게 공격을 앞두자 작은 체구의 추장이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옆에 서서 푸에블로 족의 마을을 바라보고 있는 커다란 덩치에 강인한 인상을 한 자신의 친구를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공격할 건가?”

“해야지.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수는 없지 않나?”

이미 이곳까지 오는데 열흘이 넘게 걸렸다.

더불어 부족에 있는 전사 대부분이 나온 상황이었기에 빈손으로 돌아갔다간 두 부족 전체가 쫄쫄 굶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런 만큼 저기 보이는 마을을 약탈해 최대한 많은 식량을 가져가야 했다.

이를 알고 있는 커다란 덩치의 추장은 자신의 오랜 친구인 작은 체구의 추장을 바라보며 너도 상황을 잘 알면서 왜 그런 소리를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작은 체구의 추장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저들은 그 에스파냐인들보다 더 강력한자들이라고 하지 않았나?”

작은 체구 추장의 말에 커다란 덩치의 추장은 피식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걸 믿나?”

“하지만...최소한 저들이 에스파냐인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잖나. 더불어 푸에블로 족도 부족 별로 저 북미왕국이라는 곳에 합류하고 있고. 또 그 오만하던 에스파냐인들은 별말 없이 푸에블로 족의 영역에서 물러났고. 그런 정황을 따져볼 때 그 소문은 사실이지 않을까?”

“...”

그건 사실이었기에 커다란 덩치의 추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동안 이 지역에서 가장 강한 전사들을 보유하고 있던 에스파냐인들이었다.

그 때문에 푸에블로 족은 에스파냐인들의 밑으로 들어갔고 아파치 족은 푸에블로 족을 약탈하려고 에스파냐인들과 몇 번 싸워보고 피해가 컸기에 약탈을 포기했다.

그런 에스파냐인들이 푸에블로 족의 영역에서 물러나고 대신 그 자리에 들어온 것이 바로 북미왕국이다.

그렇기에 주변의 다른 부족들은 일단 관망하며 갑자기 등장한 이 북미왕국의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때 푸에블로 족의 영역에 퍼진 소문이 바로 이 북미왕국이 에스파냐와 전쟁을 벌여 승리하고 그 대가로 푸에블로 족의 영역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를 북미왕국에 합류한 푸에블로 족이 일부러 낸 소문이라고 생각하는 원주민도 있었고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원주민도 있었다.

커다란 덩치의 추장은 전자에 가까웠고.

푸에블로 족은 새롭게 등장한 저 북미왕국 밑으로 들어간 상황인 만큼 어떻게든 저 북미왕국의 힘이 강하다는 소문을 내야 주변 부족들이 함부로 공격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테니 벌인 수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작은 체구의 추장은 후자에 가까웠다.

그 때문인지 이미 식량 상황이 무척이나 악화되어 약탈을 결정해서 이곳까지 전사들을 동원해놓고 불안한 표정을 짓는 것이다.

이에 커다란 덩치의 추장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친구를 설득하려 할 때 작은 체구의 추장이 먼저 말했다.

“그리고 우리와는 달리 천둥소리가 나는 막대기도 가지고 있고 말을 탄 전사들도 꽤 많아. 괜히 건드렸다가 나중에 저들이 보복하겠다고 나서지 않을까?”

커다란 덩치의 추장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해야 해. 당장 식량이 부족하니 어쩌겠어.”

당장 먹을 것이 부족해 굶어 죽게 생겼는데 미래를 걱정할 여유는 없었다.

이번 약탈은 부족의 생존이 달린 문제였던 것이다.

이를 상기시켜주자 작은 체구의 추장은 고개를 푹 숙였다.

“...”

아파치 족은 수렵 생활을 하는 부족이었기에 늘 식량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농경 생활을 하는 푸에블로 족과 접촉한 이후 그들처럼 농사를 지으려고 노력했었지만, 농사에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이들이 자리한 지역이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것인지 농사만으로 먹고 살기는 어려웠다.

그렇기에 사냥을 하거나 다른 부족을 약탈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나바호 족도 비슷했지만 차이라면 나바호 족은 푸에블로 족에게 배운 농경 기술로 농사를 지어 어느 정도 식량을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공격을 앞둔 작은 체구의 추장은 지금이라도 방향을 틀어 차라리 나바호 족을 약탈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때 커다란 덩치의 추장이 말했다.

“그리고 우리의 본거지는 꽤 먼 편이지. 그래서 그 에스파냐 놈들도 방어만 할 뿐 우리의 본거지를 공격한 적은 없었고. 그러니 저들도 비슷할 거야.”

“하지만...저들은 그 에스파냐인들보다 말을 탄 전사들이 많다잖아? 그걸 직접 본 사람도 있고. 그럼...”

계속해서 불안해하는 작은 체구의 추장을 보고 커다란 덩치의 추장이 고개를 저었다.

“알았네. 정 저들의 보복이 걱정된다면 북서쪽으로 돌아 귀환하도록 하세. 그럼 나바호 족이 약탈한 것으로 알 테니 큰 문제는 없겠지.”

그때 작은 체구의 추장이 슬슬 해가 지는 것을 느끼면서 자신의 친구이자 용맹한 전사인 커다란 덩치의 추장을 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차라리 우리도 푸에블로 족처럼 저들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떨까? 저들은 에스파냐인들처럼 강압적이진 않다면서? 이미 저들에게 합류한 푸에블로 족의 처우도 괜찮다고 해서 푸에블로의 다른 부족들도 하나둘 저들에게 합류하고 있잖아?”

“흥. 그래 봐야 저들도 그 에스파냐 놈들과 똑같은 정복자일 뿐이야. 보호해준다는 구실로 우리의 것을 가져간단 말이야! 헌데 저들의 밑으로 들어가자고?! 가뜩이나 식량이 부족한 판국에 저들에게도 식량을 바치겠단 소리야?”

“...으음.”

그동안 푸에블로 족을 보호해준다는 구실로 농작물 일부를 세금으로 내야 했고 노역을 제공해야 했으며 자신들의 종교를 강요하던 에스파냐에 비하면 이번에 새로 등장한 북미왕국은 무척이나 관대했다.

일정량의 세금만 내면 그만이었고 그것도 아직 이들의 농사 기술과 수확이 빈약하다는 이유로 어느 정도 유예를 두었으니.

이런 사실이 에스파냐에 반감을 품다가 북미왕국이 등장하자마자 곧바로 합류한 부족들에 의해 널리 알려지자 푸에블로 영역의 다른 부족들도 하나둘 북미왕국에 합류하고 있었다.

더불어 북미왕국이 산타페에 입성했을 때 동원했던 말을 탄 전사들은 무척이나 강력해 보였기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던 푸에블로의 부족들은 이들의 보호를 받는 것도 나쁠 것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파치 족 대부분은 당장 먹을 식량조차 부족한 편이었기에 북미왕국에 합류한다는 선택을 하기 어려웠다.

당장은 세금을 유예해준다고 해도 결국은 수확량의 일정량을 세금으로 가져갈 것이 뻔했으니 말이다.

물론 이들이 북미왕국과 어느 정도 교류를 하면서 북미왕국의 성향을 알고 있었다면 이런 선택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북미왕국의 최우선 목표는 텍사스 지역으로의 진출과 새진주의 건설이었기에 산타페 이북의 내륙 지역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 때문에 외무청의 관리들도 푸에블로 족으로 분류되는 부족들만 돌아다니며 설득했고.

괜히 나바호 족이나 아파치 족의 영역에 들어갔다가 문제가 생길까 피했던 탓에 이들은 북미왕국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 수가 없었고 푸에블로 족에 퍼진 여러 소문으로만 북미왕국을 판단했기에 이러한 선택을 내린 것이다.

“이 방법밖에 없네.”

고민하는 자신의 오랜 친구를 보고 단호하게 선언하는 커다란 덩치의 추장이었다.

이에 작은 체구의 추장은 굳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친구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전투를 앞두고 이런 소리를 해서 미안하네. 사죄의 뜻으로 내가 선봉에 서도록 하지.”

“미안할 것 없네. 다 부족의 미래를 걱정해서 그런 것 아니겠나. 그럼 맡기도록 하지.”

뒤에서 몸을 웅크린 채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두 부족의 전사들은 결론이 나자 하나둘 무기를 들어 올리며 투지를 끌어올렸고.

이에 커다란 덩치의 추장은 어느덧 해가 져서 어두워진 것을 확인한 후 목소리를 죽이며 소리쳤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마을로 접근해서 북미왕국의 전사들을 공격하도록! 분명 천둥소리를 내는 막대기는 무서운 무기이지만 너무 겁먹지 마라! 한번 천둥소리를 내서 상대방을 공격한 후엔 다음 천둥소리를 내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 그사이에 달라붙어 싸우면 된다! 그러니 절대 겁먹지 마! 저 마을에 주둔하고 있는 북미왕국의 전사는 얼마 되지 않으니까!”

이곳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이고 들었던 이야기였기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아파치 족의 전사들이었다.

커다란 덩치의 추장이 투기를 끌어올린 두 부족의 전사들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바라보다가 선봉에 서기로 한 자신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작은 체구의 추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소리쳤다.

“가자! 빠르게 북미왕국의 전사들을 해치우고 이곳 마을의 식량을 약탈해 빠지는 거다!”

* * *

산타페에 건설된 병영 안 숙소에서 게으른 곰이 군복을 입고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숙소 위에 침상에서 뒹굴뒹굴하고 있을 무렵 갑작스럽게 숙소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한 탐사대원이 들어와 외쳤다.

“조장님! 급보입니다!”

다급한 얼굴로 숙소에 들어온 탐사대원을 보고 게으른 곰은 왠지 더는 쉬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기분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숙소에 들어온 탐사대원을 바라보았다.

“뭔데?”

“봉화가 올라왔습니다!”

“뭐?”

만약을 대비해 병영 옥상에 설치한 봉화가 올라왔다는 탐사대원의 보고에 게으른 곰은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탐사대원에게 다가가며 확인했다.

“확실해? 봉화 맞아?”

“그렇습니다. 이곳 산타페의 북서쪽 외곽 마을에서 올라온 봉화입니다.”

탐사대원이 확실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하자 게으른 곰은 탄식을 내뱉었다.

“젠장. 하필이면 당직일 때 이런 일이!”

왜 하필이면 지금 봉화가 오른단 말인가.

새나주에서 이곳 산타페로 이동한 후 각종 순찰과 정찰 업무에 무척이나 바빴다.

그리고 막 당직이라는 명목으로 이곳에서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다시 출동하게 생겼기에 울분을 토해내는 게으른 곰이었다.

그런 게으른 곰의 반응에 탐사대원은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조장님!”

재촉하는 탐사대원을 보고 게으른 곰은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면서도 바로 명령을 내렸다.

“뭘 어떻게 해! 일단 절차대로 바로 출동한다! 애들 당장 출동 준비시켜!”

“알겠습니다! 조장님!”

게으른 곰의 명령에 탐사대원은 바로 숙소를 빠져나갔고 그런 탐사대원의 뒷모습을 보면서 게으른 곰도 한쪽에 세워둔 갑오 소총과 군장을 챙기면서 중얼거렸다.

“하아...봉화라니...별 일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보다 나중에 굳건한 바위나 음흉한 여우가 이 사실을 알면 무척 부러워하겠는데? 킥킥킥.”

게으른 곰은 공을 세우겠다며 휴식도 마다하고 다시 동쪽으로 가버린 두 친구 녀석들을 떠올리고 피식 웃으면서 숙소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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