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회임하셨습니다. 경하드립니다. 전하.“
김 의원이 전아라의 맥을 짚어본 후 환하게 웃으면서 이야기하자 전아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손을 배에 가져다 댄 후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런 전아라를 보고 옆에 있던 하얀 들꽃이 활짝 웃으면서 전아라의 회임을 축하했고.
”아라님! 회임을 축하드려요!“
”흑...하얀 들꽃. 고마워. 정말...정말 고마워.“
전아라는 옆에 있던 하얀 들꽃을 살짝 안으면서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아이를 갖지 못하자 예민해진 전아라를 여러모로 챙겨주고 배려해준 것이 바로 하얀 들꽃이었으니까.
그런 전아라의 반응에 하얀 들꽃은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활짝 웃으면서 전아라의 품 안에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걸요!“
하지만 전아라는 고개를 저으며 품 안의 하얀 들꽃을 꼭 안아주며 무척이나 고마워했다.
하얀 들꽃 역시 비슷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부터 챙겨주었고 그 덕분에 이렇게 아이를 갖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아라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형님이라고 불러. 아니면 언니라고 부르던가.“
”어...어찌 제가...“
”괜찮아. 그렇게 불러. 네가 아라님이라고 부르면 왠지 거리감이 느껴져서 그래.“
무척이나 살갑게 구는 전아라의 모습에 하얀 들꽃은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분명 전아라와 하얀 들꽃은 친하긴 했지만 약간의 벽이 없지는 않았는데 이번 일로 그러한 벽이 사라진 것처럼 보여 정성국은 그 광경을 보고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정성국은 김 의원에게 눈치를 보냈고 김 의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조심스럽게 방 밖으로 나갔다.
정성국은 하얀 들꽃을 품 안에 안고 무척이나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전아라를 한번 본 후 김 의원을 따라 방 밖으로 나갔다.
“경하드립니다. 전하.”
방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 의원은 정성국이 나오자마자 다시 한번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축하의 인사를 보냈다.
“정말 아라가 회임한 것이 맞지?”
“그렇습니다. 전하.”
김 의원의 확답에 정성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를 가지려고 마음먹은 후에도 아이가 생기지 않아 정성국 역시 내심 스트레스를 받은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거기에 자신은 부인이 둘이나 되는데 둘 다 아이 소식이 없으니 당연히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이번에 전아라가 임신했으니 그러한 부담감을 떨쳐낼 수 있었다.
“휴우...다행이군. 아무튼, 김 의원. 이렇게 직접 와줘서 고맙네.”
“아닙니다. 전하께서 의원을 찾는다는데 당연히 제가 와야지요. 헌데 이렇게 좋은 소식이 들려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러면서 김순호는 무척 밝은 얼굴을 하며 어느덧 한 나라의 왕이 되어 버린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김순호는 정성국의 도움으로 제대로 된 의원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정성국의 도움으로 지식을 쌓아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었고.
그런 만큼 정성국을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던 김순호는 그런 정성국이 급히 의원을 찾는다는 소식에 혹시 정성국의 건강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닌가 싶어서 하던 일을 제자에게 맡기고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이다.
헌데 북미왕국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기다리던 소식을 전하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이에 밝게 웃는 얼굴로 회임을 한 전아라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자세하게 이야기해주는 김순호였고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알았네. 허면 한 달 후쯤 새한성으로 이주할 생각이었는데 조금 더 미루는 것이 낫겠군.”
‘아마 16주 정도는 돼야 그나마 안정기라고 알고 있으니...그리고 이 기회에 모든 업무에 손 떼게 해야겠어.’
정성국의 말에 김 의원은 나쁠 것은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것이 아라님과 아기님의 안전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 실력 좋은 여의(女醫)와 경험 많은 산파를 아라님 곁에 두도록 하지요.”
자신이 계속 이곳에 붙어있었으면 좋겠지만 워낙에 일이 많았기에 어려웠다.
해서 자신의 제자 중 한 명을 전아라에게 붙여두고 또 경험 많은 산파까지 붙여두겠다는 말에 정성국은 고맙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부탁하지.”
“아닙니다. 전하.”
일단 급한 용건을 해결하고 나자 정성국은 오랜만에 본 김 의원에게 말을 걸었다.
“헌데 온 김에 이야기 좀 하지.”
“말씀하시지요. 전하.”
김 의원이 고개를 숙이자 정성국은 밝은 얼굴임에도 피곤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는 그를 보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의원의 수가 부족한가?”
김 의원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전하. 많이 부족하지요. 덕분에 요새 연구는 거의 못하고 있을 정돕니다.”
그런 김 의원의 대답에 정성국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대답했다.
“역시 그런가? 개척촌에서도 꾸준히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의원들이 오고 있다고는 들었는데...”
김 의원과 그의 제자들 대부분이 이곳 북미왕국으로 이주하긴 했지만 처음 이주했을 때만 해도 이곳의 교육 환경이 열악했기에 김 의원의 제자 일부는 개척촌에 남아 의원을 양성해 보내기로 했었다.
이를 언급했지만 김 의원은 턱도 없다는 듯 단호한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애송이들이 대부분이라...함부로 환자를 맡기기도 어렵습니다. 일단은 기존의 의원들 밑에 배속시켜 일을 돕게 하면서 가르치고는 있습니다만...”
“그런가...”
분명 개척촌에서 의원을 양성해내고는 있었지만, 경험이 부족해 당장은 환자들을 맡길 수는 없다고 단호한 기색으로 말하는 김 의원의 말에 정성국 희미하게 웃었다.
자신의 의술 실력이 부족해 잘못된 처방으로 결국 환자를 죽였던 경험이 있는 김 의원이었기에 다시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기색이었기에.
“그리고 우두를 만들고 접종하는 것도 일이고요. 워낙 북미왕국의 확장이 빠르다 보니...그쪽에 할당된 인원을 늘리지 않으면 우두 접종이 너무 늦어지는지라...”
최근 에스파냐와의 일이 주변 원주민 부족에게 널리 퍼져나갔고 이에 조그마한 부족들은 북미왕국으로 합류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북미왕국의 인구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만큼 우두 접종을 해야 할 사람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그나마 이주민들은 개척촌에서 우두 접종을 마치고 오는지라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감당이 안 됐으리라.
“흐음...”
“그나마 이곳 새김포의 학교에서 졸업하는 똑똑한 원주민 친구들 덕분에 간신히 버티고는 있습니다만...이들을 의원이라고 하기엔 어렵죠.”
일손이 워낙 부족한 탓에 제대로 된 우두 접종도 힘들었기에 교육청에서 최대한 배려해주어 의술에 관심이 있는 원주민들을 계속 보내주고 있었다.
이들을 가르쳐 우두 접종을 맡겼고 별문제는 없었지만, 이들을 의원으로 보긴 힘들었다.
오히려 간호사에 가까웠지.
이에 정성국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결국, 이곳에서도 제대로 된 의원을 키울 교육 기관이 필요하다는 소리군.”
정성국의 말에 김 의원은 그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무척 기쁘게 웃었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겁니다. 지금은 일손이 너무 부족한 상황이다 보니...”
“알겠네. 그 부분은 생각하고 있는 것도 있으니 교육청장과 이야기 하도록 하지. 아. 그리고 보건청을 만드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나?”
보고서를 통해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하고는 있었지만 직접 대면해 이야기를 듣는 것과 보고서를 통해 듣는 것은 아무래도 달랐다.
이를 진작 알았다면 무슨 조치라도 취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보건청을 만들어 소통 창구를 만들어두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해서 묻자 김 의원은 살짝 떨떠름한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보건청이라...보건청을 만드는 것 자체는 찬성입니다만...설마 제가 보건청장을 맡아야 하는 겁니까?”
“자네 말고 보건청장 자리를 사람이 있긴 한가?”
보건청장이 꼭 의원 출신일 필요는 없다지만 어느 정도 의학적인 지식은 필요했다.
하지만 교육 수준이 낮은 현 상황에서 어느 정도 의학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의원들뿐이었고.
거기에 일단 보건청을 만들고 제대로 체계를 잡아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실무에도 익숙한 김순호가 직접 청장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한 정성국이었다.
이를 이야기하자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젓는 김 의원이었다.
“끙...가뜩이나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라 제가 보건청장을 맡아야 한다면 보건청을 신설하는 것을 당분간은 반대하겠습니다.”
정성국은 그런 김 의원의 반응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쩝...알았네. 일단 보건청장을 맡을 인물을 찾기 전엔 보류하도록 하지. 다만 요청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와서 요청하도록 하게. 아니면 행정청을 통해 요청하던가.”
그런 정성국의 말에 김 의원은 밝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전하.”
정성국은 다시 돌아가려는 김 의원을 보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김 의원.”
“예?”
“혹시 수술할 수 있나?”
갑자기 묻는 정성국의 의도를 알 수 없었던 김 의원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수술이요? 어떤 수술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김 의원의 물음에 정성국은 제왕절개에 관해 그가 알고 있는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김 의원은 심각한 얼굴로 정성국이 하는 말을 집중해서 듣다가 정성국의 설명이 끝나자 신음을 흘렸다.
“제왕절개라...산모의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낸단 말씀이군요. 그리고 봉합하고.”
“그렇지. 가능할까?”
정성국이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묻자 김 의원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정성국이 설명한 제왕절개라는 수술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해 보였지만 실제로 성공시키기엔 산모에게 무척이나 위험해 보였다.
더불어 북미왕국의 의학 수준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고.
“어렵습니다. 간단한 봉합 정도면 모를까...그 정도면 제대로 된 마취도 필요하고 수술에 대한 경험이 풍부한 의원이 필요한데...솔직히 저도 경험이 많지는 않습니다.”
김 의원과 제자들은 기존의 조선의 의원들에 비해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사람 몸에 칼을 대는 것도 크게 꺼리지는 않았지만 외상을 치료하는 경험 자체가 무척 부족한 편이었다.
그 때문에 에스파냐와의 전쟁에서 군의로 따라오기도 했었지만 큰 의미는 없었고.
“끙...역시 그런가.”
정성국 역시 큰 기대는 하지 않았기에 김 의원의 말에 곧바로 수긍했다.
이 시대의 출산은 꽤 위험한 일이었기에 혹시나 하며 물어본 것에 불과했으니까.
이즈음 서양에서도 제왕절개를 시도하긴 했지만, 산모의 죽음은 필연적이었고.
다만 정성국은 아직 북미왕국의 의학 수준은 갈 길이 멀다는 사실과 함께 제대로 된 교육 기관을 최대한 빨리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연구는 해보겠습니다만...큰 기대는 하지 마시지요.”
이에 정성국은 가뜩이나 일이 많은 김 의원에게 괜히 제왕절개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나 싶어 살짝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만약을 대비해서 혹시나 하고 물어본걸세. 너무 부담 갖지 말게.”
김 의원은 그런 정성국을 보고 희미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괜찮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전하.”
그 말을 하고 김 의원은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정성국은 곧바로 전아라와 하얀 들꽃이 있는 방 안으로 들어왔고.
그때까지도 하얀 들꽃은 전아라의 품 안에 있었기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면서 전아라와 하얀 들꽃에게 다가갔다.
전아라는 정성국이 가까이 다가온 후에야 하얀 들꽃을 껴안고 있던 포옹을 풀며 정성국을 보았다.
“오셨어요? 오라버니? 김 의원님은 가셨나요?”
“그래. 워낙 바쁜 양반이니까. 다만 제자를 보내주기로 했어. 그리고 경험 많은 산파도 찾아서 보내주겠다고 했고.”
정성국의 대답에 전아라는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그렇군요.”
그런 전아라를 보고 정성국은 환하게 웃으면서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동안 아이 문제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지? 축하해. 그리고 참 고맙고.”
정성국의 말에 전아라는 무척이나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고개를 저으며 정성국과 옆에서 베시시 웃고 있는 하얀 들꽃을 바라보았다.
“아니에요. 괜히 제가 예민하게 반응해서 오라버니도 그렇고 하얀 들꽃도 그렇고 고생이 많았죠.”
그동안 아이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묘하게 어두운 기색이 있었던 전아라의 밝은 모습을 보면서 정성국은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밝은 얼굴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보기 좋다.”
“후훗.”
전아라는 정성국의 손길이 뺨을 지나치자 웃었고 정성국은 그런 전아라를 잠시 바라보다가 생각이 난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회임했으니 이제 네가 맡고 있던 업무는 밑으로 넘기도록 해. 알았지?”
은근히 워커홀릭 기질이 있는 전아라였기에 반발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전아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오라버니. 그보다 그동안은 두 사람이 저를 배려해주었으니 이젠 제가 두 사람을 배려해줄 차례네요.”
그러면서 옆에서 웃고 있는 하얀 들꽃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았지만, 정성국은 살짝 식은땀을 흘렸다.
’아...하얀 들꽃도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