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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133화 (133/850)

133화

날이 풀리는 2월 말부터 예정대로 각 청이 하나둘 새한성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각 청에 소속된 관리들과 그들의 가족이 이주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거기에 정성국을 믿고 허허벌판에 불과한 북미지역으로의 이주를 결정했던 정성국의 열렬한 지지자들인 원 개척촌 사람들도 대부분 정성국을 따라 새한성으로 이주하길 원했다.

어차피 새한성은 무척 넓었기에 이를 굳이 막을 필요는 없었기에 정성국은 이를 허락했는데 예상외로 정성국을 따라 북미왕국의 정식 수도라 할 수 있는 새한성으로 이주하려는 자들이 많아 급히 제동을 걸 수밖에 없었다.

이들을 한꺼번에 옮길 배편이 부족했을뿐더러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새한성으로 이주를 원해 미리 지어두었던 집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행정청은 부랴부랴 나서서 새한성으로 이주하길 원하는 백성들을 진정시키고 현재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하며 일단 기다리면 이주할 수 있을 거라고 알리느라 무척이나 바빴다.

그렇게 행정청에게 다시 한번 일 폭탄을 터트린 정성국은 새김포의 집무실에서 보고할 것이 있다며 찾아온 전아라와 함께 차를 마시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정성국은 집무실 한편의 조그마한 티테이블에 앉아 맞은편에 초췌한 기색이 역력한 전아라를 보고 살짝 인상을 찌푸리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요새 안색이 영 안 좋은데...너무 무리하는 것 아냐?”

전아라는 정성국이 직접 타준 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신 후 찻잔을 내려놓고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오라버니. 연구할 것도 많고...이런거라도 최선을 다해야죠.”

비록 뒷부분은 조그맣게 말한 전아라였지만 조용한 집무실이었기에 충분히 들을 수 있었던 정성국이었다.

이에 정성국은 내심 당황하면서도 애써 크게 개의치 않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씁.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말했잖아? 아직 우리 둘 다 젊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그렇지만...”

정성국의 말에 애써 미소를 짓는 전아라였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이런 전아라의 반응에 정성국도 내심 애가 탔다.

전아라가 아이 문제로 고민이 크다는 사실을 하얀 들꽃을 통해 알게 된 후로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했다.

헌데 정성국의 예상과는 달리 아이를 갖겠다고 마음먹은 이후 지금까지도 아이 소식은 없었고 정성국이 노력하고 하얀 들꽃이 배려해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아이를 갖지 못한 전아라는 더욱 자책하고 있었으니.

더불어 최근 전아라는 자신이 아이를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지 외출을 삼가고 연구에 더욱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정성국이나 하얀 들꽃은 내심 전아라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거 내가 문제이거나 아니면 아라가 너무 스트레스받는 것이 원인인 것 같기는 한데...아예 모든 업무에 손을 떼게 하고 당분간 쉬게 할까? 그게 낫겠지?’

전아라는 북미왕국의 화학 분야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연구원이었다.

이 때문에 전아라가 연구에 매진하는 것은 북미왕국의 발전을 위해서는 썩 나쁠 것은 없었고.

하지만 정성국은 전아라의 지아비로서 자책하며 연구에 매달리는 전아라의 모습이 무척이나 안쓰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에 새한성으로 천도하고 나면 일단 전아라를 연구에서 손을 떼게 하고 강제로라도 휴식을 취하게 할 생각을 했다.

다만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기에 일단 내색하지 않고 찻잔을 매만지고 있는 전아라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전아라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자 정성국은 최대한 편안하게 웃으려고 노력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너뿐만 아니라 하얀 들꽃도 아직 소식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잖아? 그런 것을 보면 오히려 내 문제일 확률이 높으니 자책하지 말고. 알았지?”

아이가 없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면서 전아라를 위로해주는 정성국을 보고 전아라는 애써 입꼬리를 들어올려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어두운 표정과 결합하여 정성국이 보기엔 무척 서글픈 표정을 한 전아라가 살짝 눈망울을 글썽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정성국의 관점에서야 아이가 없는 것은 당연히 두 사람의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이 시대의 사람인 전아라의 생각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아니에요. 저희가 부덕한 탓이죠. 차라리 새로...”

“그만!”

정성국은 급히 전아라의 말을 끊었다.

물론 정성국도 이제 와 다른 부인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략결혼을 꼭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할 것이다.

애초에 하얀 들꽃과의 혼인도 그래서 받아들인 거고.

덕분에 이주민인 조선인들이 늘어나며 이곳 원주민과 생기던 마찰이 꽤 가라앉기도 했고.

하지만 고작 아이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부인을 들일 마음은 없었다.

특히나 원주민들에게 영향력이 큰 하얀 들꽃과는 달리 전아라는 같은 조선인들에게도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하얀 들꽃은 정성국의 밑에서 일을 하면서 새김포를 꽤 돌아다니며 원주민들의 고충을 관리들에게 전달해주기도 했고 정성국과 혼인하면서 이주민과 이곳 원주민의 결합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어버렸기에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었다.

반면 전아라는 북미왕국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화약 생산을 책임지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지만 이는 극비였기에 당연히 소수의 인물을 제외하면 전아라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더불어 개척촌에서부터 주로 골방에 처박혀 연구를 하는 만큼 당연히 존재감은 옅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이곳 북미왕국으로 와서 정성국과 혼인하고 종종 공식 석상에 나섰기에 전아라의 존재가 알려지긴 했지만 최근 아이가 없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공식 석상에도 나오질 않고 연구소에 처박혀 있었으니.

그런 상황에서 아이 때문에 새롭게 부인을 받아들이게 되면 하얀 들꽃은 몰라도 전아라의 위치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정성국은 전아라의 요청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전아라는 정성국이 말을 끊자 고개를 푹 숙였고 정성국은 그런 전아라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직 젊긴 한데 예상외로 아이 때문에 얘들이 너무 스트레스를 받으니 또 모르겠네. 다만 정 아이가 없으면 내 문제라고 생각하고 아예 평국이의 자식에게 왕위를 넘기는 것도 고려해봐야겠네. 일단 그놈부터 빨리 혼인을 시켜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정성국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전아라에게 다가가 슬쩍 안아주면서 소매로 전아라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말없이 위로해줬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전아라가 조금은 진정된 듯 보이자 정성국은 그녀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은 후 다시 의자에 앉아 바로 그녀가 가져온 보고서를 들어 올리며 보고를 듣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괜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냈다가 지뢰를 밟은 셈이었으니.

그런 정성국의 모습에 전아라도 별다른 말 없이 바로 보고를 시작했다.

정성국은 귀로는 전아라의 보고를 들으며 눈으로는 열심히 보고서를 훑어보았다.

전아라의 보고가 대충 끝나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석유의 정제 연구가 모두 끝났다라...고생했네.”

“아니에요. 오히려 축소된 증류탑을 직접 만든 장인들의 고생이 컸죠.”

작년 새나주에서 원유가 발견된 직후 원유를 가득 담아 밀봉한 통이 새김포로 운반됐고 강평화가 온 뒤로 화약 제조 업무를 모두 강평화에게 넘긴 전아라가 원유의 분별 증류하기 위해 매달렸다.

원유는 많은 종류의 물질들이 섞여 있는 복잡한 혼합물이었기에 이를 성분별로 분리하는 분별 증류가 필요했다.

분별 증류 자체는 크게 어려울 것은 없었다.

밑에서 열을 가해 끓는 점이 다르다는 것을 이용해 성분을 뽑아내면 그만이었으니까.

다만 실험실에서 하는 간단한 분별 증류가 아닌 훗날 대규모로 원유를 분별 증류할 것을 고려해 증류탑을 세우는 것까지 연구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

이러한 연구가 대략 끝났다는 소식에 정성국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석유의 사용이 가능해졌다는 뜻이니까.

물론 아직 갈 길이 멀다.

막상 원유를 증류해 나온 휘발유, 등유, 경유, 중유, 윤활유, 아스팔트가 나오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당장 쓸 수 있는 것은 오히려 등유와 윤활유, 아스팔트 정도였다.

끓는 점이 무척 낮은 LPG는 위험성 때문에 바로 공기 중에 날려버렸고 그나마 끓는점이 낮은 휘발유 역시 휘발성이 강해 위험한 관계로 바로 증류탑을 가열하는 연료로 사용하기로 했다.

등유는 일반적인 가정용 연료로 사용할 생각이었고 경유와 중유도 당장 사용할 곳이 없어 일단 증기기관의 연료로 사용할 생각이었지만 박기동이 증기기관을 얼마나 빨리 개조하는지에 달렸다.

물론 디젤 엔진과 비교하면 효율은 무척 떨어지겠지만, 뚝딱 디젤 엔진을 만들어낼 수야 없는 노릇이니.

더불어 아직 석유 화학 산업의 가장 중요한 원료인 나프타를 추출하지도 못했고.

이 나프타를 추출해 에틸렌과 프로필렌과 같은 알켄을 생성하고 이를 통해 다양한 물질을 합성해 석유 화학 산업을 시작해야겠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그러고 보면 나중에 석유 화학 산업을 위해서라도 사람을 더 키워야 하는데...흐음.’

석유는 수많은 종류의 물질이 뒤섞인 혼합물이기에 이를 제대로 분리해서 특성을 파악하는 것만 해도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전아라와 몇몇 연구원만으로 연구하는 방식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이를 인지한 정성국이 대책을 생각하고 있을 때 집무실이 열리면서 하얀 들꽃이 들어왔다.

“전하. 이거 드셔 보세요. 어? 아라님도 계셨네요?”

하얀 들꽃은 전아라를 보고 멈칫하자 전아라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아. 하얀 들꽃이네. 일하는 곳이 가까우니까 자주 들리나 보구나.”

별 뜻 없이 말한 전아라였지만, 전아라가 요새 무척이나 우울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하얀 들꽃은 혹시 전아라가 오해라도 할까 봐 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요. 아라님. 그냥 바로 옆방에 있으니까 저 혼자 간식을 먹기 미안해서 가끔 들를 뿐이에요. 믿어주세요.”

“누가 뭐라니? 근데 그건 뭐야?”

전아라는 애써 변명하는 하얀 들꽃을 보고 피식하고 웃으면서 하얀 들꽃이 들고 온 접시를 가리켰다.

그러자 하얀 들꽃은 접시를 티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아! 전하께서 출출하실 것 같아서 간식으로 가져온 건데 아라님도 함께 드시면 되겠네요. 이거 무척 맛있어요!”

“그래?”

접시 위에는 갓 튀긴 것으로 보이는 먹음직스러운 두툼한 약과가 몇 개 올려져 있었다.

전생에 정성국이 먹어보았던 약과와 갓 만든 약과의 맛은 전혀 달랐기에 정성국도 꽤 좋아하는 간식 중 하나였기에 바로 한입 베어 물었다.

입안에 퍼지는 살짝 느끼하면서도 달달한 맛에 정성국은 재빨리 차를 마시면서 전아라에게도 권했다.

“맛있다. 먹어봐. 하얀 들꽃도 온 김에 같이 먹고.”

“예! 전하!”

하얀 들꽃이 재빨리 한쪽에 놓여있는 찻잔을 가져올 때 전아라가 약과를 입에 가져다 댔다.

“웁.”

전아라가 갑자기 들고 있던 약과를 얼른 내려놓고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헛구역질을 하자 정성국과 하얀 들꽃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전아라를 바라보았다.

“응?”

“왜 그러세요? 아라님?”

자신도 모르게 헛구역질을 한 전아라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좀...갑자기 기름 냄새가 확 올라와서 나도 모르게...”

전아라의 대답에 정성국과 하얀 들꽃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약과를 들어 냄새를 맡아보았지만, 딱히 거슬리지는 않았다.

“난 괜찮은데...”

“저도요...고소한 냄새만 나는데...”

“그래?”

정성국과 하얀 들꽃의 반응에 전아라는 이상하다는 듯 다시 조심스럽게 다른 약과를 집어 얼굴로 가져갔지만.

“우웁.”

다시 헛구역질하며 약과를 재빨리 놓았다.

“아라님? 괜찮아요?”

하지만 이번엔 쉽게 가라앉지 않았던지 재빨리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집무실을 나갔고 정성국은 기묘한 표정으로 걱정스러운 표정의 하얀 들꽃을 보고 이야기했다.

“얼른 따라가 봐.”

“예. 전하.”

하얀 들꽃까지 집무실을 나가자 정성국은 바로 바깥에 소리쳤다.

“호위대장! 밖에 있나?”

“예. 전하. 부르셨습니까?”

정성국이 큰 소리로 부르자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급히 집무실로 들어온 호위대장에게 정성국은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의원을 불러오게. 당장.”

“알겠습니다. 전하.”

급히 집무실을 나가는 호위대장의 뒷모습을 보면서 정성국은 생각했다.

‘저거...입덧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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