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그런 생각을 하며 정성국이 놀란 기색을 지우지 않고 말했다.
“4만이라니...예상했던 수보다 배는 많잖아? 뭐 원주민을 모조리 일꾼으로 만들기라도 한 건가?”
“비슷합니다.”
“엥?”
정성국이 농담처럼 이야기했는데 관리청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오히려 당황한 정성국이었다.
그런 정성국을 보고 조용한 곰이 끼어들었다.
“이쪽에서 제시한 조건이 워낙 좋다 보니 원주민 마을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조리 모였습니다.”
“...조건이 좋다고? 그게?”
분명 정성국이 기억하기로는 에스파냐에 줘야 하는 비용 때문에 원주민들이 실제 받는 보수는 북미인들이 개척단에 소속되어 일하고 받는 보수에 절반밖에 안 되었기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전하.”
그러면서 조용한 곰이 자세하게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그동안 원주민들은 에스파냐의 노역에 시달렸다.
이 원주민들에게 부과된 노역은 40일에 불과했지만, 근처에서 노역하는 것이 아닌 지정된 광산에서의 노역이었다.
자연스럽게 노역을 하기 위해 이동하는 시간까지 고려한다면 훨씬 많은 시간이 들어간다.
더불어 노역인 만큼 아무런 보수도 없고 식량도 제공하지 않았기에 원주민들은 알아서 먹고 자며 멀리 있는 광산까지 가서 일한 후 돌아와야 했다.
그런 환경에서 일해오던 원주민들에게 북미왕국이 제시한 보수에 숙식까지 제공한다고 하니 당연히 조건이 좋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이들에게 고용되는 기간 동안은 노역마저 부과되지 않는다고 했으니 당연히 원주민들이 몰릴 수밖에.
그러한 설명을 듣고 정성국은 오히려 기쁜 표정을 지었다.
가혹한 에스파냐의 통치 덕분에 값싸게 많은 인적자원을 당분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니까.
“강제로 모은 게 아니라면야 인원이 많아서 나쁠 것은 없는데...”
그러면서 정성국은 슬쩍 관리청장을 바라보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최대로 생각한 인원의 2배가 모인 탓에...이들에게 먹여야 하는 식량을 옮기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젭니다. 더불어 이들의 보수로 제공해야 하는 식량까지 생각하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좌절하고 있는 관리청장을 외면하는 정성국이었다.
“그래도 어쩌겠어. 그리고 일꾼은 많을수록 좋잖아?”
“제대로 그들에게 일을 시킬 수 있어야 좋은 거죠.”
“뭐 그렇기야 하지만...”
관리청장의 일침에 정성국은 별말 하지 못하고 보고서를 살피는 척했다.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관리청장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
“일단 최대한 분산해서 길의 정비와 병영과 마을의 건설, 그리고 새진주 건설에 투입하겠습니다.”
그런 관리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히죽 웃으면서 물었다.
“그래. 그러자고. 그리고...일꾼이 많아졌으니 이 기회에 철도도 함께 깔았으면 하는데...힘들려나?”
그러면서 정성국은 전생의 대륙횡단철도를 떠올렸다.
미국의 대륙횡단철도는 일반적인 의미의 대륙횡단철도와는 조금 달랐다.
기존의 대륙횡단철도가 대륙의 양 끝을 연결하는 철도라면 미국의 대륙횡단철도는 새크라멘토에서 오마하까지 연결된 철도를 의미한다.
당시 미시시피강을 기준으로 동부에는 이미 철도가 어느 정도 깔린 상황이었기에 이곳까지만 철도를 깔면 철길이 이어져 서부 끝에서 동부 끝까지 연결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미국의 대륙횡단철도는 유니언 퍼시픽 철도회사와 센트럴 퍼시픽 철도회사, 이 두 회사에 의해 약 6년의 공사 끝에 건설되었으며 이때 깔린 철도의 길이가 대략 2800km 정도 되었다.
그리고 이 대륙횡단철도가 완공되자마자 이 두 회사는 그동안 철도를 까느라 고생했던 중국인과 아일랜드인을 즉시 해고해버렸는데 그 수가 25000명에 달했다는 것을 기억한 정성국은 이번에 멕시코에서 고용한 원주민의 수가 4만에 가깝다는 사실에 이들을 이용하면 철도를 충분히 깔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깔아야 하는 길이는 대충 비슷해. 그리고 일꾼의 수는...솔직히 난공사 때문에 숱하게 죽어간 중국인들을 생각해보면 실제 공사에 투입된 인원은 전생이 훨씬 많았겠지만, 철도 공사의 난이도 자체가 다르다는 말이지? 그런걸 고려하면 비슷한 조건일 테고...그럼 이곳에서도 6년이면 철도를 깔 수 있으려나?’
전생의 대륙횡단철도는 새크라멘토에서 오마하까지 거의 직선으로 노선을 정했기에 난공사가 많았다.
시에라네바다 산맥과 로키 산맥에도 철도를 깔아야 했으니.
특히 센트럴 퍼시픽 철도회사가 맡은 구간은 새크라멘토 바로 오른편에 있는 그 험난한 시에라네바다 산맥에 철도를 깔아야 했기에 결국 중국인을 고용해 그들의 목숨으로 철도를 건설했다.
그에 비하면 가뜩이나 인력이 부족한 북미왕국은 산맥을 뚫고 길을 낼 바에는 돌아가겠다는 생각으로 노선을 정했다.
그만큼 노선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덕분에 철도를 깔기도 쉬웠다.
이러한 사항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자 충분히 가능성이 보여 정성국은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연구청장을 바라보았다.
연구청장은 정성국의 눈빛에 움찔하면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하. 새나주에서 새진주까지 철도를 설치하려면 철이 부족합니다. 이번에 에스파냐에서 꽤 많은 철을 들여오기도 했고 조선에서도 많은 철을 수입했습니다만 그것으로 노선 전체에 철로를 깔기엔 부족합니다.”
“끙...역시 그런가.”
연구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많은 양의 철을 에스파냐로부터 수입했고 조선에서도 많은 양의 철을 수입했다.
특히 개척촌과 새김포를 오가는 이주 선단을 구성하는 배는 점점 늘어나는데 매년 조선에서 유입되는 유민의 수는 1만 근처였다.
그렇기에 여유 공간에 각종 물자와 마소를 북미왕국으로 가져오고 있었고 최근 정성국의 명령에 조선의 무쇠를 최대한 가져오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새나주부터 새진주까지 깔아야 하는 약 2300km의 철로를 만들기엔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연구청장은 여지를 남겼다.
“다만...계속해서 조선과 에스파냐에서 철을 들여온다면 가능할 것도 같긴 합니다.”
“그래?”
정성국이 솔깃한 얼굴을 하자 연구청장은 빠르게 덧붙였다.
“예. 다만 시간은 꽤 걸릴 겁니다. 꾸준히 수입하는 철을 가공해서 철로로 만들어 깔아야 할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아마 이번에 고용하는 원주민들로 철도를 완성하긴 어려울 겁니다.”
연구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상황이 그런 것을 어쩌겠는가.
정성국은 애써 아쉬운 기색을 떨쳐내며 입을 열었다.
“쩝...알겠네. 그럼 일단 이번에 에스파냐와 조선에서 수입한 철을 이용해서 최대한 빠르게 새한성과 새나주 노선을 완성하도록 하게. 그리고 멕시코 지역의 원주민들은 일단 기존의 계획대로 곳곳에 병영과 마을을 건설하도록 하고...인력에 여유가 있으니 길도 제대로 정비하도록 하게. 다리도 튼튼하게 건설하고. 훗날 철로를 깔 때 바로 깔 수 있게 말이네.”
비록 철로를 만들 철이 부족한 상황이라 멕시코 원주민의 힘을 이용해 철도를 깔지는 못할지언정 이들의 인력을 이용해 기반공사까지는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훗날 철도를 깔기도 쉬울 테고.
특히 전생에 주로 평지에 미친 듯이 철도를 깔았던 유니온 퍼시픽 철도회사의 경우 일꾼들이 숙련되자 하루에 최대 4.8km의 철도를 깔았다고 하니 미리 길을 정비해두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알겠습니다. 전하.”
* * *
유럽에 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에스파냐가 신대륙에서 원주민 국가에 일방적으로 패배했다는 것이다.
처음 이 소문이 은근히 퍼질 때만 해도 유럽인들은 그저 헛소문으로 여겼다.
아무리 현재 에스파냐의 상황이 좋지 못하고 줄곧 국력은 쇠퇴하고 있었지만 그건 정확하게 유럽 내의 정세를 파악하고 있는 자들이나 그렇게 생각할 뿐.
대부분 사람이 생각하는 에스파냐는 아직 유럽 내에서 알아주는 강국 중 하나였고 또 제국이었다.
그런 에스파냐가 고작 미개한 원주민 따위에게 패배했다는 소문이라니.
처음 이 소문을 접한 유럽의 귀족들은 이를 카를로스 2세의 섭정인 마리아나를 폄하하기 위한 소문으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에스파냐가 이 원주민 국가에 패배하고 결국 협상을 통해 북아메리카의 모든 권리를 넘겼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유럽은 이 소식의 사실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긴 쉽지 않았다.
워낙 이런저런 소문들이 뒤섞인 탓이다.
다만 그들이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한 사실은 이랬다.
북아메리카 지역에 강대한 원주민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
이 원주민 국가와 마찰이 생겨 결국 전쟁이 벌어졌고 그 결과 이 원주민 국가가 동원한 일부 함대에 의해 누에바 에스파냐의 서해안이 모조리 불타올랐다는 것.
이 원주민 국가의 힘에 경악한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이 즉시 이들과 협상을 요청했고 그 결과 에스파냐가 가지고 있던 북아메리카의 모든 권리를 넘기는 것으로 평화 조약을 맺었다는 것.
그 대신 이 원주민 국가는 신대륙에서 에스파냐의 우방이 되기로 했고 이에 대한 예물로 자신들이 사용하는 도자기를 건넸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 원주민 국가의 명칭은 북미왕국이라는 것 정도였다.
그 외에도 여러 소문이 있긴 했다.
북미왕국은 유럽에서 최신 전투함으로 사용되는 1천 톤급의 갤리온과 비슷한 크기의 전투함을 수십 척이나 보유하고 있다든지, 수십만의 육군을 보유하고 있다든지, 화약 무기를 능숙하게 사용한다든지, 북미왕국은 하느님과 성경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든지, 북미왕국이 바로 에스파냐인이 신대륙에서 찾았던 엘도라도라든지 하는 소문이었지만 신빙성은 떨어진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신대륙에 새롭게 등장한 이 북미왕국이라는 나라를 정확히 파악하긴 어려웠다.
다만 의외로 에스파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이 북미왕국이라는 나라가 만만치 않은 강국이 아닌가 하는 여론이 우세하긴 했다.
더불어 북미왕국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에스파냐의 외교관들에게 여러 질문을 던진 결과 최소한 에스파냐가 가지고 있던 북아메리카의 권리는 북미왕국에 넘어갔다는 것을 확인해주었으니.
아무리 에스파냐가 요새 기세가 꺾였다고 해도 에스파냐는 유럽의 몇 안 되는 강국이었다.
그런 에스파냐가 비록 부왕의 결정이었다지만 북아메리카의 권리를 넘겼는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반응이 없다?
그건 북미왕국이 예상보다 강국이라는 소리였다.
아니었다면 아무리 내우외환이 겹쳤다고 한들 그냥 내버려 둘리가 없었으니까.
이에 유럽의 여러 나라는 북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한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괘 관심을 두고 지켜보았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반응은 달랐다.
먼저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북미왕국의 존재를 보고받고 코웃음을 쳤을 뿐이었다.
더불어 한창 계승문제 때문에 에스파냐와 다투고 있었기에 에스파냐를 살짝 비웃기도 했고.
그게 다였다.
이 당시 프랑스는 유럽의 패권을 장악한 국가였고 더불어 루이 14세는 유럽 내부의 세력 확장이 관심을 두었지 식민지주의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비록 에스파냐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식민지를 건설해 막대한 은을 캐오자 그게 부러워 유럽 내의 여러 국가가 경쟁적으로 신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려고 애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에스파냐를 제외한 국가들은 식민지에서 귀금속이 묻혀있는 광산을 발견하지 못했고 덕분에 에스파냐처럼 막대한 이득을 보지는 못했다.
특히 프랑스에 있어 신대륙의 식민지 중에 북아메리카 지역의 식민지는 큰 의미가 없었다.
이 시기 아카디아와 퀘벡에 식민지를 건설하긴 했지만, 그곳은 일반적인 식민지라기보다는 원주민과 교역을 통해 모피를 사들이는 거점에 불과했다.
오히려 설탕을 비롯한 신대륙의 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서인도 제도의 식민지들이 더욱 중요했지.
그러니 북미왕국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더불어 원주민과 꽤 우호적인 자신들이 북미왕국의 존재를 모를 정도면 꽤 거리가 떨어져 있다는 뜻이었으니 굳이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고 여기기도 했고.
다만 프랑스에서는 한창 도자기 수집이 유행이었고 이 북미왕국에서도 수준 높은 도자기가 생산된다는 소식에 잠시 관심을 가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반응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