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오오...이건...”
“정말...아름답군요.”
안토니오 부왕과 보좌관은 오를란도가 가져온 북미왕국의 도자기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리면서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반응에 도자기를 가지고 온 오를란도가 괜히 뿌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특히 이 순백의 도자기 위에 화려하면서도 기품이 있는 이 금박 장식이 무척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이에 안토니오 부왕은 오를란도가 가져온 도자기 중에 찻잔 세트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북미왕국의 도자기가 이 정도 수준일 줄은 몰랐군. 내가 그동안 봐왔던 도자기 중에 최고야. 묘하게 기품있으면서도 화려한 느낌인데?”
안토니오 부왕의 말에 보좌관이 반색했다.
“그렇지요? 유럽에 가져가면 비싸게 팔릴 것 같지 않습니까?”
“충분히 먹히겠어. 근데...흐음.”
안토니오 부왕은 말을 하다 말고 골똘히 오를란도가 가져온 도자기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단순히 도자기를 감상하는 거라고 보기엔 무척 진지한 표정이었기에 보좌관과 오를란도는 왜 저러는 건가 싶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걸리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부왕전하?”
조심스러운 오를란도의 질문에도 안토니오 부왕은 북미왕국의 여러 도자기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이곳으로 오기 전에 보았던 도자기와 꽤 비슷해 보여서 그러네.”
부왕의 말에 보좌관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보좌관도 도자기를 종종 본 적이 있었지만, 이 북미왕국의 도자기와 비슷한 도자기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도자기를 말입니까?”
“그렇네. 저지대 놈들이 팔던 도자기였는데 이것처럼 무척이나 화려하면서도 기품있는 문양이 특징이라 참 마음에 들었었지. 모양도 그렇고.”
네덜란드는 중국의 왕조가 명에서 청으로 바뀌면서 도자기의 생산량이 줄어들자 그 이후에 주로 일본의 도자기를 유럽에 가져가 팔았다.
일본의 도자기 기술은 동양 삼국 중 가장 뒤떨어졌고 1600년까지는 백자를 만들 기술도 없었지만, 임진왜란 시절 납치했던 조선의 도공들과 명나라가 망하면서 일본으로 흘러 들어간 중국의 도공들에 의해 급격히 기술이 발전하면서 꽤 괜찮은 도자기를 만들 수 있었고.
중국 도자기와는 전혀 다른 색감을 자랑하는 일본 도자기는 곧 유럽의 귀족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나름의 입지를 갖게 되었다.
그런 만큼 보좌관은 자신이 보았던 일본의 도자기를 떠올리면서 갸우뚱했다.
분명 일본의 도자기와 북미왕국의 도자기는 디자인과 문양에서 차이가 꽤 컸기 때문이다.
“저지대 놈들이 파는 도자기라면...일본의 도자기 말입니까?”
그런 보좌관의 말에 안토니오 부왕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저지대 놈들이 일본의 도자기를 주로 팔고 있긴 하지만...내가 본 도자기는 일본의 도자기 같지는 않았네. 화려한 색감보다는 이런 고급스러운 문양이 주로 들어갔달까? 아무튼, 내가 이곳으로 부임하기 전 고위 귀족들 사이에서 꽤 인기를 끌던 도자기와 너무 흡사하군.”
“그렇습니까?”
보좌관이 고개를 갸우뚱했을 때 안토니오 부왕은 눈앞의 도자기를 보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뭐...도자기는 마음에 들었는데 그 도자기로 저지대 놈들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는 것은 꽤 아니꼬워 보여서 더욱 기억이 남았어. 헌데 이 도자기도 그 도자기와 비슷한 수준은 되는 것 같아. 이거 유럽의 고위 귀족들에게 무척 인기가 있겠어.”
실제로 안토니오 부왕이 말하는 네덜란드 상인이 파는 도자기는 원상의 도자기였다.
비록 네덜란드 상인이 파는 도자기는 개척촌에서 만든 도자기고 이 도자기는 북미왕국에서 생산한 도자기였으나 생산 공방이 다를 뿐이지 같은 도자기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안토니오 부왕은 원상의 도자기와 비슷한 수준의 북미왕국의 도자기를 보며 무척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안토니오 부왕의 반응에 보좌관이 다행이라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고위 귀족으로 도자기 같은 사치품을 보는 안목이 있는 안토니오 부왕이 만족스러워할 정도라면 분명 에스파냐의 귀족들도 무척 마음에 들어 할 테니 말이다.
“그거 다행이군요. 그리고 이 정도면 본국에서도 북아메리카 지역을 북미왕국에 넘긴 조약이 일방적인 에스파냐의 손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 보좌관의 말에 안토니오 부왕은 피식 웃으면서 보좌관이 왜 본국에 보고를 보내는 것을 필사적으로 늦춘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이것 때문에 본국에 보내는 보고를 미루라고 한 건가? 어차피 보고서에 이러한 거래 물품이 포함되어 있다고 쓰여 있는데?”
“그저 선박이 부족해진 만큼 정기 보고 편으로 보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보고서만으로는 본국에서 북미왕국의 도자기 수준을 파악하기 어려울 테니 말입니다.”
능글맞게 웃는 보좌관을 보고 안토니오 부왕은 고개를 저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 북미왕국과의 협상으로 인해 문제가 생기면 내가 물러나면 그만일세.”
그런 안토니오 부왕의 말에 오를란도가 진지한 얼굴을 하며 그에게 간언했다.
“부왕전하. 에스파냐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부왕전하께서 계속 이 누에바 에스파냐를 맡아야 합니다.”
그런 오를란도를 보고 안토니오 부왕은 눈앞에 있는 도자기로 만든 찻잔의 곡선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흐음...자네의 진지한 얼굴을 볼 때 단순한 아부 같지는 않고...”
그런 안토니오 부왕의 말에 오를란도는 보좌관을 바라보았다.
보좌관이 고개를 끄덕이자 오를란도는 조심스럽게 북미왕국과의 협상이 끝나고 보좌관과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왕전하. 만약 이번 사태로 인해 부왕전하가 물러난다면 다음 대의 부왕이 어느 분이 임명될지는 모릅니다만 잘못하다 북미왕국을 과소평가하거나 이번 조약에 적대적인 인사가 올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북미왕국과 마찰을 빚는 것이 에스파냐의 미래에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점입니다. 최소한 지금 에스파냐의 상황에서는요.”
“으음...그건 그렇지.”
오를란도의 생각에 안토니오 부왕 역시 동감했다.
현재 에스파냐의 상황은 내부적으로든 외부적으로든 좋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날벼락 같은 북미왕국의 공격에 저항할 생각조차 포기하고 그대로 협상을 청한 것 아닌가.
다행히 북미왕국은 유럽의 사정에 어두웠고 그 때문에 에스파냐가 원하는 대로 협상을 진행할 수 있었다.
덕분에 에스파냐는 실제로 큰 손해를 보지 않을 수 있었고.
아니. 지금 눈앞의 도자기를 보고 있자니 이번 협상은 오히려 에스파냐에 커다란 이득이라고 생각하는 안토니오 부왕이었다.
에스파냐 외엔 아무도 인정하지 않아 언제 뺏길지 모르는 북아메리카 지역의 권리를 넘겨준 대신 적대적이었던 북미왕국과 종전해 결국 교역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덕분에 이러한 도자기를 얻을 수 있게 되었으니.
거기에 이런 값비싼 도자기를 고작 철과 구리나 원주민들이 농사지을 때 간혹 사용하는 페루 부왕령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구아노, 그리고 히스파니올라 섬에서 자생하는 고무로 구할 수 있었으니 이것보다 이득인 교역이 또 어디 있겠는가.
더불어 북미왕국에서 은을 지불하지 않고도 도자기를 충분히 구할 수 있다면 그만큼 청에서 가져올 수 있는 차나 비단 역시 더욱 많아질 테니 가뜩이나 재정이 파탄 나버린 에스파냐에 있어서 북미왕국과의 교역은 점점 더 중요해질 것으로 생각하는 안토니오 부왕이었고.
그런 안토니오 부왕의 귓가에 오를란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만큼 이곳 사정에 정통한 부왕전하께서 계속 그 자리에 계셔야 합니다. 괜히 북미왕국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부왕이 부임해 북미왕국과 마찰이 빚어진다면 누에바 에스파냐가 흔들리고 이는 결국 에스파냐를 흔들릴 겁니다.”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오를란도와 옆에서 그 말이 맞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보좌관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안토니오 부왕은 여차하면 부왕의 자리에서 물러나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지만 북미왕국과의 협상을 직접 진행한 오를란도와 보좌관은 안토니오 부왕이 물러나고 북미왕국과 적대적인 부왕이 나타나면 여러모로 골치 아파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저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들은 안토니오 부왕이 본국의 문책에 순순히 물러나고 다른 부왕이 부임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들은 특히 실제 북미왕국의 함대를 두 눈으로 직접 보았기에 북미왕국과 적대하는 것은 에스파냐에 좋을 것이 없다는 의견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북미왕국을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는 쪽이었지.
그렇게 생각했기에 진심을 담아 안토니오 부왕을 설득하려 들었고 이에 본국에서 문책하면 부왕자리에서 기꺼이 물러날 생각이었던 안토니오 부왕은 생각을 바꾸었다.
‘하긴...이들의 말처럼 후임으로 오는 부왕이 오판한다면 정말 에스파냐는 흔들릴 수 있어. 그럼 최대한 본국이 북미왕국을 얕보지 못하게 다시 보고서를 써야겠군. 그리고 친분이 있는 다른 귀족들에게도 편지를 좀 쓰고.’
안토니오 부왕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썼다고 생각한 본국으로 보낼 보고서를 적당히 과장해 쓸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에스파냐의 미래를 걱정하는 오를란도와 보좌관을 보고 미소지었다.
“흐음...무슨 뜻인지 알겠네.”
* * *
“거래는 모두 끝났나?”
“그렇습니다. 전하.”
정성국의 물음에 조용한 곰이 대답했다.
일단은 에스파냐에 관한 일이었기에 이번 교역은 외무청에서 주관했기 때문이다.
“도자기는 저들이 원하는 수량을 맞춰서 넘겼나?”
비록 이상돈에게 따로 이야기해 도공을 최대한 늘리고 새로운 도자기 공방도 세우라고 명령을 내리긴 했지만 에스파냐에 넘기는 도자기는 최고급의 도자기였다.
당연히 새롭게 만든 공방에서 당장 이러한 도자기를 만들기는 어려웠고 덕분에 기존의 도공들이 물량을 감당하기 위해 무척이나 고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습니다. 전하. 도공들의 고생이 정말 컸습니다.”
도공들은 이상돈을 붙잡고 하소연했고 이상돈은 정성국의 집무실로 쳐들어와 하소연했기에 그들의 고생을 잘 알고 있던 정성국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랬겠어. 따로 도공들에게 충분히 사례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저들에게 받은 물품들은?”
“여기 그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조용한 곰이 자세한 보고서를 정성국에게 건넸고 정성국은 이를 쭉 살펴보면서 만족스러우면서도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허어...의외로 철과 구리가 꽤 많네? 그에 비해 구아노나 고무는 무척 적고.”
“구아노나 고무의 가격이 싼 만큼 워낙 많은 양을 필요로 하는지라...”
도자기에 무척 비싼 값을 책정한 에스파냐였다.
거기에 물량도 꽤 많은 편이었고.
그에 비해 구아노나 고무의 가격은 무척 싼 편이었고.
당연히 구아노나 고무로 도자기의 가격을 치르려면 정말 엄청난 물량을 운반해야 했다.
문제는 누에바 에스파냐 서해안에 있는 배의 절반 가까이가 이미 북미왕국의 공격에 불타버렸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북미왕국이 원하는 물품 중에 최대한 비싼 가격을 책정한 철이나 구리 위주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 그것도 그렇겠군.”
“해서 에스파냐 쪽에서 요청을 해왔습니다. 단기간에 많은 양의 물품을 운송하기 어려우니 항구를 상시 열어달라고.”
에스파냐도 당장은 도자기의 가치에 맞는 물량을 맞추기 위해 철이나 구리로 지불하긴 했지만 계속 그렇게 거래하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고무의 경우는 그저 야생고무나무의 수액을 채취하는 수준이기에 많은 물량을 넘기기 어려웠고.
이 때문에 에스파냐는 그들이 생각하기엔 가장 쓸모없어 보이는 구아노로 도자기 대금을 치르길 원했다.
하지만 이미 배가 부족한 상황에서 단기간에 그 많은 물량을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북미왕국에 요청했다.
이에 정성국은 잠시 고민했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흐음...아쉬운건 우리니 어쩔 수가 없네. 그러도록 하게. 다만 장기간 체류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리게.”
“알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