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후우. 드디어 오셨군요. 장인어른.”
정성국은 집무실에 들어오는 푸른 안개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금방 귀환할 줄 알았던 푸른 안개가 여름을 아카풀코에서 넘기고 가을에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외무청의 관리들은 협상이 길어지나보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시대 서양인이 얼마나 막 나가는지를 잘 알고 있던 정성국은 하얀 들꽃 때문에 차마 내색하진 않았지만, 걱정이 꽤 컸다.
푸른 안개는 에스파냐인들에게는 왕의 장인이자 고위 귀족으로 알려져 있는 만큼 푸른 안개를 인질로 삼아 북미왕국을 어떻게 해보려는 멍청이가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물론 정성국은 상대가 안 되는 듯 하자 곧바로 백기를 들어 올린 오를란도나 상황이 에스파냐에 불리하다는 판단이 들자마자 재빠르게 협상을 해서 최대한 피해를 줄인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이 그런 선택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또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밑에서 다른 생각을 하는 자가 있을 수도 있었고.
특히 에스파냐인들은 이곳 신대륙을 정복할 때 원주민 황제를 붙잡아 이득을 취한 적도 있었으니.
그나마 정성국이 푸른 안개의 소식을 알아보기 위해 인급 전선을 따로 아카풀코로 급파하지 않은 것은 만약 정말 긴급한 사태가 일어났다면 푸른 안개에게 딸려 보낸 지급 전선 3척과 인급 전선 6척으로 구성된 함대에서 먼저 연락선을 보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더불어 푸른 안개는 북미왕국의 왕이 아닌 왕의 장인인 만큼 아무리 멍청이들이라도 함부로 인질로 잡겠다고 나서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도 했고.
아무튼, 그렇게 아는 것이 많아 사서 걱정하고 있던 정성국은 자신을 보고 흐뭇하게 웃는 푸른 안개의 얼굴을 보고 맥이 탁 풀렸다.
푸른 안개는 자신을 무척이나 걱정하는 사위의 모습이 좋았던지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조금 늦었습니다. 전하.”
정성국은 푸른 안개의 웃음에 투덜거렸다.
“귀환이 왜 이리 늦어진 겁니까?”
“협상이 조금 길어졌습니다. 전하.”
푸른 안개의 대답에 정성국은 슬쩍 투덜거렸다.
“그래요? 헌데 아무리 협상이 길어져도 그렇지 이번 협상이 몇 달이나 끌 정도로 길어질 이유가 있나요?”
그런 정성국을 보고 푸른 안개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번 협상이야 저들도 우리도 괜히 길게 끌 이유가 없었으니 빨리 끝났을 뿐이지요.”
“하긴...”
저번 협상은 서로 간에 이해가 어느 정도 비슷하기도 했고 더불어 협상을 끝내야 북미왕국의 함대가 물러나는 만큼 당연히 에스파냐인들도 필사적으로 협상했었기에 단기간에 끝났을 뿐.
그것을 알고 있는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푸른 안개의 말에 수긍했고 푸른 안개는 씩 웃었다.
“그래도 이번 협상을 통해 우리가 원했던 대로 멕시코 지역의 원주민을 고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전하.”
푸른 안개의 말에 정성국은 반색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현재 북미왕국의 인력은 무척이나 부족해서 북미왕국의 확고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캘리포니아 중앙평원조차 거의 개발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따로 인력을 빼서 멕시코만에 인접한 텍사스를 개발한다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더불어 플로리다를 그냥 내버려 둬 잉글랜드의 남하를 허용할 것이 아니라면 최대한 빠르게 진출해야 하는 판이었으니.
그동안 청장들과 여러 번의 회의를 하긴 했지만 내심 막막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푸에블로 족이 북미왕국에 우호적인 편이었고 이들은 정착해서 농사를 짓는 부족이었던지라 인구수가 다른 부족들보다는 많아 이들을 최대한 이용할 계획이긴 했으나 그래도 한계는 있었다.
하지만 푸른 안개가 에스파냐와 협상을 한 덕분에 풍부한 누에바 에스파냐의 인력을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정성국은 무척이나 기쁜 표정을 지으면서 자세한 협상 내용을 파악하려 했다.
“그럼 얼마나 고용이 가능한 겁니까?”
“정확하게 원주민 몇 명을 고용한다...이런 것은 아닙니다.”
“그럼요?”
“국경선 인근 마을로 가서 직접 일꾼을 모집해야 합니다. 이 마을들을 정하는데 협상이 꽤 길어졌었고요.”
“음?”
의아해하는 정성국을 보고 푸른 안개가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에스파냐는 원주민의 노역을 통해 귀금속을 캐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노역은 마을 단위로 부과되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북미왕국이 원주민을 고용하게 되면 일정 인력을 차출해야 하는 마을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만큼 많은 일꾼을 모집하기도 어려웠고.
이 때문에 푸른 안개는 최대한 많은 일꾼을 모집하기 위해 에스파냐와 협상을 했다.
이번에 새로 그은 국경선 인근 마을의 원주민을 대상으로 일꾼을 모집할 테니 그 마을에 부과된 노역을 일정 기간 멈춰달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에 대한 보상을 북미왕국이 에스파냐에 따로 제공하겠다고 했고.
처음엔 푸른 안개의 제안에 난색을 보이던 에스파냐인들은 충분한 보상을 하겠다는 이야기에 태세가 바뀔 수밖에 없었다.
에스파냐인들은 인디오들이 비루하고 힘이 약해 고된 노동엔 썩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만 어쩔 수 없으니 써먹는달까.
헌데 그런 인디오들 일부를 북미왕국에 제공하고 저들에게 보상받는다면 그것이 더 나아 보였던 것이다.
거기에 에스파냐 입장에선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었다.
북미왕국에 보상을 받고 국경선 인근 마을에 부과된 노역을 제외해 부족해진 일꾼은 다른 마을에 추가로 노역을 부과하는 것으로 충당할 수 있었으니까.
가뜩이나 이 노역에 시달리는 원주민 마을에 더욱 부담을 지우겠다는 속셈이었지만 에스파냐인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북미왕국이 얼마나 보상을 줄지에 대해 따져보느라 바빴지.
그런 에스파냐인의 반응에 푸른 안개는 이곳 원주민들의 고생이 짐작되어 쓴웃음을 지었고.
다만 생김새는 비슷하더라도 이곳 원주민과 북미왕국의 원주민들은 문화 자체가 달랐기에 그들을 딱히 동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푸른 안개는 북미왕국의 이득에만 신경 썼고.
그 결과 국경선 인근 마을 40여 곳의 마을에서 북미왕국에서 일할 일꾼을 모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대가로 에스파냐는 유럽에 가서 더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는 도자기를 5년에 걸쳐 추가로 얻게 되었고.
그렇게 북미왕국과 에스파냐는 웃고 도공들과 멕시코 지역 원주민은 눈물을 흘릴만한 협상이 체결된 것이다.
“그것 때문에 그렇게 협상이 오래 걸린 겁니까?”
정성국이 묻자 푸른 안개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를 바보로 생각하는지 또 속이려 들더군요.”
“예?”
갑작스러운 푸른 안개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 정성국을 보고 푸른 안개는 회상하기만 해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처음 협상을 시작한 후 어느 정도 협상이 진행되었을 때 에스파냐인들이 이야기한 50여 곳의 마을 중 몇 곳을 실제 확인해보았습니다.”
“설마...”
정성국이 말을 잇지 못하자 푸른 안개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30여 곳의 마을은 실제로 에스파냐의 통제하에 있었고 노역도 제공하는 마을이 맞긴 했습니다만...나머지 20여 곳의 마을은 그렇지 않더군요. 소규모 원주민 마을이었달까요?”
“허어...”
푸른 안개의 말에 정성국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개인 간의 거래도 아니고 나라 간의 협상에서 그런 사기를 치려 들 줄은 몰랐으니까.
그런 정성국의 반응이 당연하다는 듯 푸른 안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마을이 존재한다면 그들에게 충분한 일당을 지급해서 일꾼을 모집하면 그만이긴 합니다만...7곳의 마을은 기껏해야 10가구 정도가 사는 아주 조그마한 마을에 불과했습니다.”
정성국에게 이야기하면서 다시 화가 났던지 인상을 찌푸리는 푸른 안개를 보고 정성국은 헛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그래서요? 그러한 행태를 그냥 두고 보셨습니까?”
저번 협상은 저들의 제안이 오히려 북미왕국이 원했던 바였기에 모른 척하고 받아주었더니 북미왕국을 호구로 본 모양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한소리 했지요. 말로는 이웃 국가이니 친하게 지내자면서 이게 무슨 짓거리냐고. 아. 그리고 이를 빌미로 멕시코 시티의 방문 역시 거절했습니다.”
푸른 안개의 말에 정성국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멕시코 시티의 방문이요?”
이에 푸른 안개는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예. 제가 고위 귀족이라고 이미 알려진 탓인지 안토니오 부왕이 멕시코 시티로 방문해달라는 요청을 했었습니다. 저는 일단 아카풀코에 온 목적이 이번 협상인 만큼 협상이 끝나기 전에는 어렵다고 이야기했었고요. 그리고 이것을 빌미로 부왕의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전하께서 붙여주신 호위대원들의 반대가 심하기도 했고요.”
“잘하셨습니다.”
푸른 안개의 대답에 정성국은 안도하면서도 다음엔 절대로 푸른 안개를 아카풀코로 보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반응에 푸른 안개는 살짝 가볍게 웃었고.
“아무튼, 그것 때문에 실제 그 마을을 직접 확인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더불어 너무 작은 마을들은 모두 제외하고 다른 마을로 대체하고 다시 확인하느라...”
푸른 안개의 말에 정성국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설마 우리 쪽에서 직접 마을을 방문했다는 겁니까?”
푸른 안개는 정성국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충분히 이해한 듯 고개를 저었다.
“북미왕국에 이주하겠다는 에스파냐인들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큰 어려움 없이 누에바 에스파냐를 돌아다닐 수 있으니까요.”
“아! 그들이 있었군요!”
이곳 북미왕국에 남고 싶어 하던 에스파냐인들도 일단은 다른 포로들과 함께 아카풀코로 향했다.
그리고 정말 다시 북미왕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이야기하라고 알렸고 대신 이번에 북미왕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어떤 취급을 받을지 명확하게 알렸다.
에스파냐 포로 전체에게 일괄적으로 공지했는데 이 때문에 외무청 관리의 설명을 듣고 마음을 바꾸어 북미왕국으로 이주하겠다는 에스파냐인의 숫자가 약간이지만 늘기도 했고.
이미 이주하기로 마음을 정한 에스파냐인들은 북미왕국에서 존귀한 신분으로 알려진 푸른 안개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푸른 안개는 정성국에게 그들의 공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최소한 이들은 에스파냐보다는 북미왕국을 선택했고 이를 위해 노력했으니 그에 대한 보답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한 푸른 안개였다.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곳에 정착하는데 약간의 배려를 해주겠다고 확답했고.
그러한 확답에 푸른 안개는 다행이라는 듯 웃으면서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그들 덕분에 일이 꽤 쉬워졌습니다. 덕분에 꽤 커다란 원주민 마을들을 주로 포함할 수 있었습니다. 대신 그들의 이주 때문에 그에 관한 협상을 하느라 더 늦어지기는 했습니다만...”
“허어...고생하셨습니다.”
그렇게 협상에 관한 이야기가 끝나자 정성국은 3달 넘게 선상에서만 생활해야 했던 푸른 안개의 노고를 위로했다.
그 후 정성국은 푸른 안개가 가져온 협정문과 보고서를 읽어보면서 물었다.
“헌데 대략적인 예상치도 없습니까?”
정성국의 물음에 푸른 안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확실하지는 않다는 말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에스파냐인들은 이 정도면 10만의 인력도 고용할 수 있다고는 하던데 당최 저들의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제가 보기엔 최대 1만에서 2만 정도의 원주민을 고용할 수 있어 보입니다만.”
“허어...그것만 해도 어딥니까. 고생하셨습니다. 장인어른.”
나쁘지는 않지만, 썩 만족스럽지도 않다는 표정을 짓는 푸른 안개였지만 정성국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가뜩이나 인력이 부족한 북미왕국의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일꾼 1만의 인력은 무척이나 소중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나마 푸에블로 족이 모두 북미왕국에 합류하게 되면 약간의 숨통이 트이긴 하겠으나 시간이 필요했고 그들이 합류한다 하더라도 그들을 모두 일꾼으로 만들순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 정성국의 반응을 보고 푸른 안개는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다만 이 인력을 한곳에 모으는 것도 일이고 그들의 보급을 책임지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닌지라...”
푸른 안개는 살짝 걱정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이미 이런 일에 이골이 난 정성국은 대수롭지 않다는 기색이었다.
“뭐 그렇긴 하겠지요. 하지만 그 문제는 개발청과 관리청의 관리들에게 맡기면 알아서 잘 할 겁니다. 내년 3월부터 5년이라...어? 이거 연장도 가능하군요?”
“예. 협상이 길어지기도 했고 그들을 관리하는 문제도 있기에 내년으로 미뤘습니다. 그리고 일단은 5년간 고용이지만 우리의 의사에 따라 최대 3년까지 연장할 수 있다는 조항을 달았고요.”
푸른 안개의 대답에 정성국의 표정은 더욱 밝아질 수밖에 없었다.
“잘 됐군요. 이건 우리에게 꽤 유리한 조항인데 잘도 승낙해줬군요.”
정성국의 말에 푸른 안개는 얼굴에 탐욕이 가득해 보였던 에스파냐인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뭐 연장되면 그만큼 이득이 늘어나니 저들도 딱히 막지는 않더군요.”
“하하하. 알겠습니다. 일단 뒷일은 개발청과 관리청에 맡기도록 하고 장인어른은 좀 쉬세요. 아. 그 전에 옆방에도 좀 들르시고. 하얀 들꽃이 장인어른 걱정을 꽤 했었습니다.”
정성국의 말에 푸른 안개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