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슬슬 날이 무더워질 무렵 정성국은 집무실에서 더위를 버티며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숨을 돌릴 겸 집무실에서 나와 옆 방으로 향했다.
옆 방에선 하얀 들꽃이 수많은 보고서를 검토하느라 바빴다.
하얀 들꽃은 그동안 정성국의 비서로 이런저런 심부름을 하곤 했지만, 정성국과 혼인한 이후에는 일단 보좌관과 비슷한 위치로 바뀌었다.
아무리 권위의식이 없는 북미왕국이라 해도 왕의 부인이 직접 심부름을 할 수야 없었으니까.
더불어 다른 관리들도 무척 부담스러워하기도 했고.
그래서 아예 정성국의 집무실 옆에 따로 방을 하나 만들어 하얀 들꽃은 그곳에서 정성국에게 올라갈 보고서 일부를 미리 검토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정성국이 에스파냐와의 전쟁으로 부재했을 당시에도 그의 빈자리를 충분히 메워줄 수 있었고.
아무튼, 정성국은 차라도 한잔하면서 잠시 휴식을 할 생각으로 하얀 들꽃이 업무를 보는 옆 방으로 이동했고 살짝 열려 있는 문을 통해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보고서를 살피는 하얀 들꽃을 보았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왜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 보이는 것 같지?”
정성국이 방안으로 들어와 하얀 들꽃에게 다가가 묻자 하얀 들꽃은 이내 표정을 바로 하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아...아니에요.”
그런 하얀 들꽃의 반응에 오히려 정성국은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캐물었다.
“뭔데? 말해봐. 보고서 내용 때문에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개인적인 일이야?”
정성국이 묻자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짓던 하얀 들꽃은 물러날 기색이 보이지 않는 정성국을 보고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게 아카풀코로 떠난 아버지 때문에...아직 소식이 없죠?”
푸른 안개는 에스파냐 포로의 송환과 더불어 누에바 에스파냐의 원주민을 고용하는 문제로 협상을 위해 아카풀코로 떠난 지도 벌써 두 달이 흘렀다.
이곳 새김포에서 아카풀코까지 이동 시간을 고려한다 해도 확실히 귀환이 늦어지고 있었기에 정성국도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응...협상이 길어지나 본데?”
“별일 없겠죠?”
하얀 들꽃의 눈빛에 걱정의 빛이 서려 있는 것을 깨달은 정성국은 전에 하얀 들꽃에게 괜히 에스파냐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며 후회하며 일부러 과장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하하. 그럼. 걱정하지 마. 별일 없을 거야. 저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장인어른을 건드리진 못할걸. 그리고 호위대원도 붙여뒀고 에스파냐 포로들을 옮긴다는 구실로 함대를 구성해 뒀으니...에스파냐는 오히려 아카풀코 항 근처에 있는 함대가 무서워서라도 장인어른을 무척 잘 모실 거야.”
정성국의 말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조금 옅어지는 하얀 들꽃이었다.
“그렇겠죠?”
“그럼. 그보다는 아카풀코는 이곳보다 남쪽이라 더 더울 텐데 장인어른이 더위 때문에 고생할까 그게 더 걱정인데.”
그러면서 오히려 정말 푸른 안개가 더위에 건강이라도 해칠까 걱정하는 정성국을 보고 하얀 들꽃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하얀 들꽃의 시선을 느낀 정성국이 그녀를 마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아뇨. 그냥 고마워서요.”
그러면서 활짝 웃는 하얀 들꽃이 괜히 예뻐 보여서 정성국은 슬쩍 다가가 앉아있는 하얀 들꽃에게 허리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면서 대답했다.
“내가 더 고맙지. 내 일을 이렇게 도와주는데.”
그러면서 하얀 들꽃이 앉아있는 책상에 쌓인 수많은 보고서를 보고 무척이나 고마워하는 정성국의 모습에 하얀 들꽃은 환하게 미소지었다.
“후훗.”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환하게 미소짓는 하얀 들꽃은 무척이나 아름다웠기에 잠시 물끄러미 그 광경을 바라보던 정성국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오늘 일찍 들어갈까?”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하얀 들꽃이 배시시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후후. 아직 제 일은 많이 남았는걸요.”
“그래도...”
“그리고 당분간은 아라님과 보내세요.”
“응?”
정성국이 의아한 표정으로 하얀 들꽃을 바라보자 그녀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살짝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아라님이 내심 아이 소식이 없어 많이 불안해하시더라고요.”
“그...그래?”
정성국은 그런 기색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기에 하얀 들꽃의 말에 몹시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런 정성국을 보고 쓴웃음을 지은 하얀 들꽃은 전아라가 얼마나 현 상황에 압박감을 받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불안해하는지를 조심스럽게 설명해주었다.
이를 듣고 정성국은 속으로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전아라가 받는 압박을 전혀 신경 쓰지 못했던 탓이다.
오히려 정성국은 훗날을 고려해 애가 생기는 것을 내심 미루고 있기도 했고.
정성국이 딱히 권력욕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북미왕국이 북미 지역을 장악하고 어느 정도 발전하기 전까지는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자식 교육을 잘 한다 하더라도 전생의 기억이 있는 정성국의 관점과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의 관점은 다를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 만큼 정성국이 왕으로 집권하는 시기는 꽤 길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최대한 아이를 늦게 갖는 것이 어떨까 싶었던 것이다.
물론 너무 젊은 시절에 왕위에 오르는 것은 썩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정성국의 생각이었으나 그렇다고 흰머리가 나는데도 세자인 것도 웃기긴 했으니까.
전생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덕분에 70이 넘는 나이에도 계승자의 신분이었던 찰스 왕세자라던가 고구려의 장수왕과 그의 자식인 고조다의 경우도 있었고.
그리고 현재 프랑스의 왕인 루이 14세 역시 장수했기에 결국 왕세자, 왕세손이 먼저 죽어버려 증손자가 왕위를 잇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정성국이었으니 말이다.
나름 건강에 신경을 쓰고 있었고 분명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긴 했지만, 조선의 왕처럼 손발이 다 묶이고 예법 때문에 시달릴 일은 없었던 정성국이었기에 막연한 자신감으로 아이를 갖는 것을 미루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전아라가 그렇게 마음고생이 심할 줄이야.
특히 정성국은 전아라나 하얀 들꽃과 공식 석상에서도 종종 애틋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인지 아직 애가 없는 것을 두고 이런저런 말이 있다는 소리에는 솔직히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고작 1년밖에 안됐구만. 그리고 아라뿐만이 아니라 하얀 들꽃도 애가 없으면 결국 내 문제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나? 왜 엄한 애들한테 은근히 압박을 주고 난리래?’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린 정성국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 북미왕국의 중심은 누가 뭐라 한들 정성국이었기에 만약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북미왕국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만큼 정성국의 2세는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고.
하얀 들꽃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별말은 하지 않고 쓴웃음을 지으며 책상 위에 수많은 보고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전 이 보고서를 다 처리하기 전엔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요. 그러니 당분간은 아라님과 함께 지내면서 위로해주세요.”
“으음...”
정성국은 하얀 들꽃의 마음을 짐작하고 고맙게 느껴져서 다시 한번 앉아있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
그런 정성국의 행동에 하얀 들꽃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 * *
“아이누 부족 연합의 지도자가 이곳 북미왕국을 직접 방문하길 원한다?”
“그렇습니다. 전하.”
“흐음...”
정성국은 집무실에서 조용한 곰의 보고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이누인들이 왜인들과 싸워 결국 독립을 쟁취한 이후 원상의 뒤에 있는 북미왕국과 정성국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막 독립을 인정받은 상황이라 함부로 자리를 비우기는 쉽지 않았다.
그나마 아이누 부족 연합은 지도자가 여럿이라 지도자 중 한 명인 오니비시가 잠시 시간을 내서 개척촌까지는 방문한 모양이지만 개척촌엔 이미 정성국이 없었기에 무척 아쉬워했다는 보고를 이미 받았었고.
헌데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됐다고 판단한 건지 이곳 북미왕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아이누 부족 연합은 북미왕국의 중요한 동맹 중 하나였기에 외무청의 청장인 조용한 곰이 직접 이렇게 보고하러 온 것이었고.
정성국이 심유한 눈빛으로 생각에 잠긴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외무청의 의견을 피력했다.
“전하. 저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합니다만...”
“아. 딱히 반대하는 것은 아니네. 저들이 시간 내서 오겠다는데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지. 그보다 누가 방문하는지는 모르나?”
“아. 투로시노와 샤쿠사인이 직접 방문하겠다고 하더군요.”
“허어? 두 명이나 온다고? 그렇게 여유가 있나? 왜국은 아예 홋카이도에 관심을 끊었나 보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선 둘이 함께 움직이기는 쉽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아이누 부족 연합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세 사람이 바로 오니비시와 샤쿠샤인, 그리고 정성국과 안면이 있는 투로시노였다.
오니비시와 샤쿠샤인은 홋카이도 아이누인들을 양분하는 대 부족장에 가까웠고 투로시노는 부족장은 아니었지만, 원상과의 친분으로 인해 결국 아이누 섬의 아이누인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성장했으니까.
그런 인물 중 2명이 오랜 기간 자리를 비운다는 소리는 그만큼 아이누 부족 연합의 현 상황이 안정되었다는 뜻과도 같았기에 정성국은 꽤 부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누 부족 연합의 상황이 좋다면 우리에게도 나쁠 것은 없지. 어차피 요새 이주 선단은 자주 오가는 만큼 이주 선단 편으로 오라고 하게. 아이누 부족 연합엔 미안하지만, 함부로 그쪽에 배치된 지급 전선을 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알겠습니다. 전하. 지금 새김포에 정박하고 있는 이주 선단 편을 통해 소식을 보내도록 하지요.”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잠시 시기를 따져보다가 물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올해 방문은 어렵겠지?”
정성국의 물음에 조용한 곰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겁니다. 아슬하게 마지막 이주 선단 편으로 올 수야 있겠지만...그렇게 되면 겨울내내 이곳에서 보내야 하니까요. 아무리 아이누 부족 연합의 상황이 좋다고 해도 그건 어려울 겁니다.”
“역시 그렇지? 그럼 아예 내년에 오라고 전하게. 내년이면 저들을 이곳 비좁은 새김포가 아닌 더 넓은 곳에서 맞이할 수도 있을 테고 수행원들은 이곳의 빈 건물에 머물러도 될 테니.”
내년이면 정성국을 비롯한 각 청은 이곳 새김포가 아닌 현재 기초적인 기반 공사를 어느 정도 끝내고 곳곳에 건물을 짓고 있는 새로운 수도로 옮겨간다.
이를 언급한 정성국의 말에 조용한 곰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이주 선단 편에 끼어 오는 만큼 많은 아이누인들이 오지는 못할 테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수행 인원 없이 달랑 둘이 오지는 않을 텐데 미처 그 생각을 못 한 것이다.
“아...그것도 그렇군요. 아무리 아이누 부족 연합이 제대로 된 나라가 아니라고 해도 지도자 둘이 움직이는데 수행 인원도 꽤 있을 테니...그들이 머물 장소까지 생각하면 당장 온다고 해도 말려야 했겠군요.”
정성국은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고려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이누 부족 연합은 비록 제대로 된 나라라기보다는 아직 부족 연합체에 불과했지만, 북미왕국에 무척 중요한 우방이나 다름이 없었다.
특히나 조선 조정의 눈치 때문에 함부로 개척촌을 키울 수 없어 포로나이 항을 이용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들을 잘 대우해줘야 했고.
하지만 이곳에선 여유 건물조차 없어서 저들이 온다 하더라도 이주민들이 잠시 머무는 비좁은 숙소에 머물러야 할 판이라 그것이 걱정되어 이야기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었던 정성국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렇지. 그러니 내년에 오라고 연락을 보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전하.”
조용한 곰은 고개를 숙이며 집무실을 나가려 했기에 정성국은 슬쩍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아직 아카풀코에선 아무런 소식이 없나?”
정성국의 질문에 조용한 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전하. 협상이 길어지나 봅니다.”
이에 정성국은 살짝 표정이 굳어졌지만, 딱히 내색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조용한 곰을 배웅했다.
“그런가...알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