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포로들과 함께 푸른 안개가 아카풀코로 떠나고 얼마 후 새김포에 천급 함선으로 구성된 이주 선단이 도착했다.
그리고 이 이주 선단에 정성국과 전아라가 그토록 기다렸던 강평화가 타고 있다는 소식에 정성국은 급히 그를 불러들였다.
강평화는 정성국의 집무실로 들어와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스승인 정성국을 보고 빙긋 웃은 후 고개를 숙였다.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정성국은 살펴보고 있던 보고서를 내려놓고 웃으며 일어나 강평화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잡고 피식 웃었다.
“전하는 무슨. 그냥 스승님이라고 불러. 다른 애들도 다 그렇게 부르니까. 그것보다 정말 오랜만인데?”
“그렇지요.”
다른 제자들이 개척촌을 떠나 북미왕국으로 향할 시기는 아이누인들과 왜인들이 전쟁을 치르던 시기였다.
그랬기에 강평화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일단 개척촌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북미왕국에서 제대로 화약 제조 공방이 돌아가서 각종 포탄과 탄환을 생산하기 전에는 개척촌에서 생산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다른 제자들보다 더 늦게 도착한 강평화는 오랜만에 만난 스승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니...뭐 굳이 그렇게 아쉬워할 것 까지야...”
정성국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강평화는 무척이나 아쉬운 표정으로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래도 스승님의 혼례에 참석하지 못한 것은 정말 아쉬운데요...그것도 2번이나...축제까지 했다면서요?”
“제대로 된 혼례를 올리지 못해 축제로 대체한 거지 뭐. 근데 그걸 왜 그렇게 아쉬워하는 거냐? 왠지 사감이 담긴 듯한데?”
정성국이 의아해하자 강평화는 입이 살짝 나온 채로 대답했다.
“그 축제에서 상돈이하고 주명이는 이곳의 처자와 눈이 맞았다니 아쉽지요!”
“응?!”
강평화의 대답에 정성국이 당혹스러워하자 오히려 강평화가 놀라 정성국을 쳐다보았다.
“어라? 설마 모르셨습니까?”
“...”
개척촌에 떨어져 있었던 강평화도 아는 사실을 자신이 몰랐다는 사실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정성국이었다.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강평화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스승님이 모르시는 것을 보면 다행히 아직 혼인한 것은 아니겠네요.”
“그렇겠지. 혼인했다면 내가 모를 리는 없으니까. 그러고 보면 이미 짝이 생겼으면 바로 혼인을 할 것이지 거 참...”
정성국이 구시렁거리자 강평화는 난처한 듯 웃었다.
“하하하.”
그런 강평화의 반응에 정성국은 피식 웃고 분위기를 잡고 강평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조선은 어떠냐?”
정성국이 슬슬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자 강평화 역시 허리를 펴고 대답했다.
“별다른 건 없습니다. 여전히 서인들이 득세하고 있고요.”
“그래? 개척촌에 대해 별말은 없고?”
정성국의 물음에 강평화는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스승님. 뭐 받은 게 있으니 적당히 묵인해주는 거지요. 그리고 주위의 군수나 현령, 현감 모두 서인이니 괜히 일을 키울 생각도 없는 듯하고. 아. 그리고 전에 개척촌의 선착장을 가득 메우던 선박들이 모두 포로나이로 떠나고 나자 무척 만족스러워하더군요.”
그런 강평화의 대답에 정성국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도 이주민들을 태우기 위해 개척촌을 드나들긴 하잖아?”
이에 강평화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대답했다.
“잠깐 드나드는 것 정도니까요. 그 정도는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흐음...”
정성국이 강평화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자 강평화가 덧붙였다.
“그리고 원상이 계속해서 조선 팔도의 산속에 처박혀 있던 유민들을 모아 개척촌으로 보내는 것을 두고 유민이 모이는 것을 경계하거나 혹은 개척촌에 정착할까 슬쩍 우려하며 지켜보던 것도...그 동안 꾸준히 배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가서 그런지 별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강평화의 대답에 정성국은 턱을 매만지면서 물었다.
“꾸준히 유민들이 빠져나가는 것에 대해서 뭐라 하지는 않고?”
“딱히...그들이 보기에 유민들은 세금을 내기 싫어 도망친 자들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물론 유민들이 뭉치기 시작한다면야 문제가 커지겠지만 오히려 조선 밖으로 빠져나가는 상황이니까요. 그리고 지금껏 큰 문제가 없었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는 거지요.”
유민은 결국 나라에서 부과한 의무를 저버린 자들이고 조정의 통제에서 벗어난 자들이다.
유민들의 입장에서야 자신들이 살기 위해 고향에서 도망친 것에 불과했지만 조정의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유민들은 자의로 조정의 통제를 거부한 자들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그런 유민들의 수가 많아지고 이들이 모여 조직화한다면 조정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원상은 이들을 하나둘 조선 밖으로 빼돌리고 있었다.
이러한 원상의 행동은 현재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서인의 입장에서 용인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더불어 이렇게 빼돌린 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
그런 만큼 인제 와서 이를 트집 잡기도 애매했고.
괜히 일을 키우면 개척촌을 공식적으로는 축소 시키고 이를 모른척한 서인에게도 좋을 것은 없었으니까.
강평화의 대답에는 그러한 뜻이 담겨 있었고 이를 파악한 정성국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지만, 오히려 자신들에게는 고마운 상황이라 이내 표정을 풀고 확인하듯 물었다.
“그렇긴 하지...쩝. 그래서 별말이 없다 이거지?”
“제가 듣기론 그렇습니다. 스승님.”
강평화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정성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흐음...그 소리는 아직 북미왕국에 대해 모른다는 뜻이네? 그걸 알았다면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텐데?”
이에 당연하다는 듯 강평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겠지요. 만약 그 사실을 알았다면 이렇게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마 저들은 스승님이 유민들을 이용해서 조선 밖의 외딴 섬을 개발하는 것으로 짐작하고 있을 겁니다. 특히 이번에 개척촌에 정박하고 있던 배들이 모두 빠져나간 것을 보고 자신들의 짐작이 맞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더군요”
강평화의 말에 정성국은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
그런 정성국을 보고 강평화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애초에 스승님께서 이곳에 새롭게 나라를 세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개척촌에서도 많지 않으니까요. 또한, 저희는 이렇게 모두 북미왕국으로 오지 않았습니까. 이제 조선 내에서 정확한 사정을 아는 사람은 윤휴 님이나 원상의 이천호 대방 어르신 정도일 겁니다.”
“그렇군.”
둘 다 함부로 입을 놀릴 인사는 아니었기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경신년까지는 4년...그때까지만 이렇게 아무 일 없었으면 좋겠네.’
다행이라면 현 왕인 현종은 온화한 편이고 서인들은 자신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굳이 조정에 평지풍파를 일으킬만한 일을 스스로 만들 생각은 없어 보였으니 지금껏 해온 대로만 하면 될 것처럼 보였다.
‘2차 예송 전까지는 이 상황이 어느 정도 유지될 테니 크게 상관없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정성국의 귓가에 강평화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헌데 스승님. 이곳에서는 그동안 하던 연구나 하면 되겠지요?”
강평화의 말에 정성국은 생각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며 자신이 개척촌을 떠나기 전에 강평화에게 몇 가지 연구과제를 떠넘겼던 것이 기억났다.
“연구? 아. 그래. 성과과 있었나?”
이에 강평화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 있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스승님. 기존의 60mm 화포를 개조해 사거리를 늘려 요새에 설치해 사용할 것을 생각하고 만든 요새형 60mm 화포와 야전에서 사용할 것을 생각하고 최대한 경량화해서 만든 이동형 60mm 화포. 이렇게 두 가지 형태로 개발했습니다.”
“호오...”
강평화의 말에 정성국은 무척 흥미를 나타냈다.
북미왕국이 텍사스 지역에 진출해 전선을 건조하기 전까지는 해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를 대비해 기존의 60mm 화포를 가져가 텍사스 지역에 건설하는 항구에 해안 요새를 세우고 화포를 설치해 방어할 생각이었는데 그에 맞는 새로운 화포가 개발되었다니 흥미가 생길 수밖에.
또한, 슬슬 북미 지역 내륙으로 진출해 원주민들을 포섭해야 한다.
물론 식량을 무기로 최대한 우호적으로 원주민들과 교류할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호구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아니. 호구가 되더라도 최소한 힘이 있다는 것은 원주민들에게 확실히 보여줘야 한다.
그런 만큼 쉽게 끌고 다닐 수 있는 경량화한 60mm 화포의 개발 역시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정성국의 귓가에 강평화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또한, 조금만 더 연구하면 80mm 화포의 개발 역시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래? 흐음...고생했구나.”
개척촌에서 화약 제조 공방과 더불어 무기 제조 공방까지 도맡아 관리하면서도 이런저런 연구를 진행한 강평화를 기특하다는 듯 바라보는 정성국이었다.
“아닙니다. 스승님.”
그러면서도 정성국의 칭찬에 기쁜 듯 빙긋 웃는 강평화였고.
그런 강평화를 보면서 정성국은 이다음에 할 말을 꺼내기가 꺼려졌지만 어쩌겠는가.
그동안 전아라가 꽤 무리하기도 했고 전아라는 일단 석유를 정제하고 그 부속물을 연구하는 쪽으로 빼야 했으니.
이에 정성국은 강평화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음...그래. 헌데 나는 네가 그동안 하던 연구와 더불어 화약 제조 공방을 좀 맡았으면 한다만...아! 무기 제조 공방은 따로 책임자가 있으니 그건 네가 굳이 맡지 않아도 될 거다. 연구 쪽만 네가 맡으면 될 거야. 그리고 80mm 화포의 개발이 시급한 것은 아니니까 천천히 시간을 들여 연구하면 될 테고.”
막대한 일 폭탄을 떠넘기겠다는 정성국의 말에 강평화는 흠칫거리며 어찌 그럴 수 있느냐는 눈초리로 정성국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에 정성국은 차마 강평화를 바라보지 못하고 슬쩍 고개를 돌렸고.
그렇게 잠시 집무실에 침묵만이 감돌았을 무렵.
“...알겠습니다. 스승님.”
“어?”
목소리에 기쁨이 담겨 있는 강평화의 대답에 정성국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강평화를 바라보았다.
강평화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런 강평화의 모습에 정성국이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강평화가 활짝 웃었다.
“축하드립니다. 스승님. 드디어 북미왕국의 후계자가 생기는 거군요!”
“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경하드립니다. 스승님.”
전아라의 일을 모조리 강평화에게 떠넘기자 전아라가 회임을 한 것이라 착각한 모양이었다.
그런 강평화를 보고 잠시 말문이 막힌 정성국이 곧 정신을 차렸다.
“아...아직은 아닌데?”
정성국의 대답에 강평화는 순간 시무룩해지면서 입을 열었다.
“예? 그럼 아라는 아니지...중전마마? 음...사모님?”
전아라의 호칭을 두고 고민하는 강평화를 보고 정성국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냥 아라라고 불러. 뭘...”
만약 전아라가 이들과 별다른 친분이 없다면야 모를까 애당초 어렸을 때부터 함께 공부하며 지낸 사이지 않은가.
북미왕국에서 예법을 엄청 따지는 것도 아니고.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강평화는 이미 북미왕국의 왕인 정성국과 혼인했기에 예전처럼 그냥 이름을 부를 수는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고...일단 스승님의 아내가 된 만큼 사모(師母)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럼 사모님은 뭐하고요?”
전아라가 맡고 있던 업무를 자신이 다 담당하면 전아라는 뭐하느냐는 물음에 정성국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너에게 모든 업무를 떠넘기고 아라는 쉴까 봐? 아라도 다른 연구를 해야 한단다.”
정성국과 혼인해서 왕의 부인이 되었음에도 다른 연구 하느라 바쁠 것이라는 정성국의 대답에 강평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힘없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스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