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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125화 (125/850)

125화

광산촌을 둘러싼 목책에 등을 기댄 채 고민이 깊은 얼굴을 하며 발로 땅바닥을 툭툭 치고 있는 갈색 머리의 젊은 사내를 보고 커다란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순박한 얼굴의 사내가 살짝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말 남을 생각이야?”

“흐음...”

커다란 덩치의 물음에도 별말 하지 않고 계속 발로 땅을 툭툭 치며 고민이 깊은 기색이 역력한 갈색 머리의 젊은 사내를 보고 커다란 덩치가 살짝 목소리를 높였다.

“말해봐. 피엔테. 정말 이곳에 남을 생각이냐니까?”

커다란 덩치는 제대로 된 답변을 들을 때까지 계속 물어볼 기색이라 피엔테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솔직히 아직 마음을 정하지는 않았어. 하지만 조금은 끌리네.”

그런 피엔테의 대답에 커다란 덩치의 사내는 눈을 껌벅거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피엔테는 누구보다 자신이 에스파냐의 군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또한, 꽤 극단적인 백인우월주의자였고.

그렇기에 처음 북미왕국에 포로로 잡혔을 때 어떻게 위대한 에스파냐의 군인이 고작 미개인에 불과한 자들에게 포로로 잡혀 살아갈 수 있느냐면서 목숨을 건 탈출을 주장하기도 했었고.

그런 피엔테가 이제는 에스파냐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곳에 남을까 생각 중이라니.

물론 이곳에서 지내면서 피엔테 역시 어느 정도 현실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다.

그리고 저들 북미인을 백인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덩치도 알고 있었고.

하지만 그렇다고 에스파냐로 돌아갈 기회가 생겼는데 이를 포기하고 남을 생각을 할 줄은 몰랐다.

“허...피엔테 네가 그럴 줄은 몰랐는데? 정말로?”

덩치의 말 속에 담긴 뜻을 짐작한 피엔테가 씁쓸한 웃음을 머금고 투덜거렸다.

“아직 고민 중이라니까.”

그렇게 대답하는 피엔테도, 그리고 그 대답을 들은 덩치도 결국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충분히 짐작했다.

그렇기에 덩치는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를 물었다.

“대체 왜?”

피엔테는 덩치가 순수하게 궁금해한다는 것을 깨닫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차피 돌아가 봐야 다시 에스파냐의 병사로서 군함에 타기밖에 더하겠어?”

“아...그건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는 덩치를 보고 피엔테가 말을 이어나갔다.

“솔직히 군함 생활이 썩 좋지는 않잖아? 어차피 갇혀있는 건 거기나 여기나 똑같지. 배를 타나 이곳에서 석탄을 캐나 힘들긴 똑같고. 하지만 생활 수준은 차원이 다르잖아?”

이 시대에 배를 타는 것은 정말 고된 일이었다.

물론 뱃일 자체도 힘든 편이긴 했지만, 그보다는 생활 수준이 정말 열악했다.

북미왕국은 사정이 조금 달랐지만, 그 외에는 대부분 비슷했다.

최대한 많은 짐을 실어야 했으니 선원들의 휴식을 위한 선실을 만든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당연히 잠은 적당한 곳에 누워 그냥 자야 했다.

그건 이미 익숙한 뱃사람이라면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뱃사람들조차 먹는 것은 고역이었다.

지상에서와는 달리 해상에서는 식량을 보존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배 안에서는 습기 때문에 식량이 변질되기 쉬웠던 탓이다.

이 때문에 소금에 절인 고기나 살아있는 동물을 태우기도 했지만, 문제는 가장 중요한 주식인 빵이었다.

기존의 빵은 곰팡이 때문에 오래 보관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배 위에서 빵을 대량으로 굽기에는 커다란 화덕을 설치해야 하는 만큼 화재의 위험성과 더불어 불을 피울 연료가 문제였다.

그래서 빵을 대신해 뱃사람들의 주요 식량이 된 것이 바로 쉽 비스킷(Ship Biscuit)이었다.

비스킷이라는 단어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로 두 번 굽는다는 뜻이었다.

밀가루 반죽을 두 번이나 구우면 무척이나 딱딱하고 건조해져서 휴대하기도 쉽고 보존성도 증가해 로마 시절부터 이 비스킷을 휴대 식량으로 이용하곤 했다.

이런 비스킷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어진 쉽 비스킷은 보존성을 더욱 높이기 위해 오로지 밀가루와 물, 소금만으로 만들며 2번 굽는 것이 아닌 4번을 구워 수분을 최대한 억제했다.

덕분에 보존성은 올라갔지만, 무척이나 딱딱해서 그냥 먹기는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고 결국 그냥 먹으려면 이 쉽 비스킷을 이빨로 조금씩 갉아서 먹어야 했다.

이 때문에 선원들은 주로 이 쉽 비스킷을 망치로 부수고 소금에 절인 고기와 물을 넣고 불려 죽으로 만들어 먹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 괴악한 맛을 자랑하는 죽이 바로 선원들의 주식이었다.

지금까지야 그러려니 하고 참고 견뎠지만,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경험했던 생활은 그의 생각을 바꾸기 충분했다.

“음...하긴 그 맛대가리 하나 없는 죽을 먹을 바엔 이곳에 남아 하얀 밀 빵을 먹는 것이 더 낫긴 하지. 확실히 여긴 식량이 풍족하잖아?”

덩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무척이나 풍족했다.

그래서인지 포로인 자신들에게도 충분한 식량을 제공했다.

더불어 에스파냐인들이 빵을 주식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주로 새하얀 밀가루가 담긴 밀가루 포대를 제공해줄 정도였으니까.

이 시기 새하얀 밀가루로 만든 빵을 먹는다는 것은 귀족들이나 가능한 사치였기에 포로가 된 에스파냐인들은 무척 놀라기도 했었고.

허나 이러한 생활도 곧 끝이 날 것이다.

아카풀코로 돌아가게 된다면 다시 배를 타고 장기간 항해에 투입될 것이 뻔했으니까.

그나마 뒷배라도 있다면 육상근무로 빠질 수도 있겠지만 피엔테나 덩치 모두 그런 뒷배 따윈 없었다.

그 때문에 에스파냐 본국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이곳까지 온 것 아니겠는가.

이에 덩치도 이곳에 남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런 덩치의 귓가에 피엔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고민 중인 거야. 이곳에서 지낸 3년. 썩 나쁘진 않았거든. 뭐 저 목책 밖으로 나가지 못해 답답하긴 했지만...이곳에 포로 신분이 아닌 백성의 신분으로 남는다면 지금처럼 목책 밖으로 나가지 못할 정도는 아닐 테니까. 그리고 북미왕국의 병사들이 한 이야기도 있잖아?”

이번 에스파냐와 협상을 계기로 포로들이 돌아갈 것이 확정되면서 그동안 철저하게 거리를 두고 자신들을 감시하던 북미왕국의 병사들이 말이 통하는 몇몇 에스파냐인들과 잡담을 하곤 했다.

에스파냐인들은 북미왕국에 궁금한 것이 많아 열심히 물어보긴 했지만, 태반은 웃으면서 얼버무렸다.

다만 몇 가지 질문엔 대답해주었는데 이 대답 때문에 에스파냐인들 중 몇몇은 이곳에 남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 질문은 대체 왜 자신들을 포로로 생각하면서 이렇게 좋은 대우를 해 준 것이냐는 물음이었는데 이에 병사들은 고개를 흔들면서 오히려 포로의 신분이었기에 자신들이 일한 것에 비하면 제대로 대우해 준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에스파냐인들이 헷갈려 할 때 병사가 대답하기를 만약 포로가 아니었다면 더 좋은 대우를 받았을 거라고 덧붙였다.

북미왕국에서 광부는 많지 않아 좋은 대접을 받는다나?

이를 떠올린 덩치가 심각한 표정으로 피엔테를 바라보며 물었다.

“흐음...그럼 나도 남을까?”

이에 피엔테는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네 선택에 달린 문제겠지.”

“끙...”

* * *

이번에 누에바 에스파냐의 원주민들을 고용하는 문제로 아카풀코로 향하는 외무청 고위 관리가 접견을 요청했다는 소리에 집무실로 불러들인 정성국은 집무실을 들어오는 푸른 안개를 보고 당황했다.

“어? 설마 이번에도 장인어른이 가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전하. 어차피 에스파냐인들은 저를 무척 높은 고위 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끙...”

장인인 푸른 안개가 다시 아카풀코로 향한다는 사실에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걱정하자 푸른 안개는 자신을 걱정하는 사위를 무척이나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북미왕국의 힘을 아는 저들이니 절대 저에게 해코지하지는 못할 겁니다.”

멋모르고 북미왕국을 공격했다가 누에바 에스파냐의 서해안이 박살이 났던 저들이 북미왕국의 왕인 정성국의 장인을 감히 건드리겠느냐는 뜻이었다.

이에 정성국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조건을 달았다.

“쩝...그렇기야 하겠지만...그럼 이번까지만 다녀오세요. 그 후엔 다른 젊은 친구들에게 기회를 주도록 하지요.”

“하하하. 절 노인네 취급 하는 겁니까?”

“그건 아닌데...”

누에바 에스파냐의 환경이 썩 좋지는 않다고 알고 있는 정성국은 괜히 푸른 안개가 그곳을 드나들다가 전염병이나 풍토병에 걸릴까 걱정되는 눈치였다.

그런 사위의 모습을 보고 푸른 안개는 웃으면서 한마디 했다.

“뭐 손주라도 생기면 늙었다는 것을 인정하겠습니다만...”

이 말에 당황한 정성국은 헛기침하며 곧바로 이야기의 주제를 돌렸다.

“크흠. 아무튼, 급히 보고할 것이 있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입니까?”

그런 정성국의 반응을 보고 인자하게 웃은 푸른 안개가 용건을 이야기했다.

“아. 이번에 아카풀코로 데려갈 에스파냐인 포로들에 관한 보고입니다.”

“음? 무슨 사고라도 터졌습니까?”

“그건 아니고...포로들중 일부가 이곳에 남고 싶어 하더군요.”

푸른 안개의 대답에 정성국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예? 이곳에 남고 싶다고요?”

“그렇습니다. 전하. 포로로 잡혔던 에스파냐인 몇몇이 이곳에 남아도 되는지 묻더군요.”

“허...”

에스파냐인들의 반응은 생각지도 못했었기 때문인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는 정성국을 보고 푸른 안개가 장난스럽게 아부했다.

“정확히는 북미왕국의 백성이 되기를 청했습니다. 이게 다 전하의 관대함 덕분이겠지요.”

그런 농담에 정신을 차린 정성국은 푸른 안개를 바라보고 정확한 사정을 파악하려 했다.

“아니...대체 왜요? 포로로 이곳에 3년 넘게 마을 안에서 갇혀 살지 않았습니까? 나 같으면 하루빨리 아카풀코로 돌아가고 싶을 것 같은데?”

이에 푸른 안개는 자신이 직접 이곳에 남길 원하는 에스파냐인들과 대화해 파악한 사정을 정성국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에스파냐와 협상이 끝나고 나서 포로들이 곧 풀려날 것을 알게 된 몇몇 병사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좀 한 모양입니다.”

“무슨 이야기를요?”

순간 인상을 찌푸린 정성국을 보고 푸른 안개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가 북미왕국의 정보가 에스파냐에 알려지는 것을 극히 꺼린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 확인해본 결과 북미왕국에 대한 중요한 이야기는 딱히 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다만 북미왕국에서 광부가 많지 않아 광부로 일하면 꽤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식의 말을 했답니다.”

“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분명 광산에서 일하는 것은 그만큼 힘들었기에 그만큼 대우를 해주는 편이었으니까.

더불어 에스파냐인들처럼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가 가장 많은 돈을 받고 있었고.

“그리고 에스파냐 병사들이 포로의 신분이 아니었다면 3년간 탄광에서 일했으니 돈 좀 벌었겠다고 농담처럼 이야기 한 모양입니다.”

그제야 저들의 반응을 이해한 정성국이 헛웃음을 지었다.

하긴 원주민들도 배불리 먹을 수 있으니 별다른 반발 없이 북미왕국에 합류했는데 에스파냐인이라고 뭐 다르겠는가.

“허...그래서 북미왕국의 백성으로 이곳에 남고 싶다?”

“그렇지요. 어쩌시겠습니까?”

정성국은 잠시 고민하다가 푸른 안개를 보았다.

“몇 명이나 됩니까?”

“대략 4, 50명가량 됩니다.”

“흐음...”

생각보다 많은 인원에 정성국은 놀라며 생각에 잠겼다.

“일단 이번에 에스파냐의 포로들을 되돌려 보낼 때 모두 아카풀코로 데려가도록 하세요. 괜히 에스파냐가 훗날 꼬투리 잡을 수도 있으니.”

남겠다는 에스파냐인이 한둘이면 모를까 지금 남겠다는 에스파냐인이 너무 많았다.

그들을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에스파냐에서 무슨 꼬투리를 잡을지 몰랐다.

“그럼...”

정성국의 말에 푸른 안개가 살짝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을 때 정성국이 바로 덧붙였다.

“그 후 그들이 원하면 그들의 이주 신청을 받아주세요.”

“아...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그러면서 인자하게 웃는 푸른 안개를 보고 정성국은 함께 웃으며 이곳에 남겠다는 에스파냐인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을 이야기했다.

“다만 생김새가 다른 만큼 결혼이 쉽지는 않을 테니 정말 이곳에 정착할 생각이라면 가정을 꾸려서 오는 것을 권하도록 하세요. 더불어 이번에 오게 되면 어떤 대우를 받는지도 확실하게 설명해주도록 하고. 다만 첩자로 이곳에 올 수도 있는 만큼 이동에 약간의 제약을 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리도록 하고요. 최소 5년간은 꽤 불편할 수 있다고도 미리 알리세요.”

“알겠습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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