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정성국은 회의실에 앉아 회의실로 들어와 자신을 보고 환하게 웃는 제자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스승님. 부르셨습니까.”
“그래. 오랜만이구나. 일단 앉아라.”
“예. 스승님.”
정성국의 부름에 따라 이곳 새김포 곳곳에서 연구와 일을 하던 제자들이 회의실로 모였다.
정성국은 그동안 보고서나 연구청장을 통해 이들에게 지시를 내리곤 했다.
하지만 제자들의 얼굴을 본 지도 꽤 오래되기도 했고 이들은 실무를 맡고 있었기에 이들과 직접 대화하면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이들을 회의실로 부른 것이다.
더불어 이번 에스파냐와의 전쟁을 준비하느라 제자들이 뒤에서 그만큼 고생한 것도 있었고 북미왕국의 승리에 이 녀석들의 지분이 꽤 있는 것도 사실이었기에 제자들의 공을 치하할 겸 말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대면한 제자들은 정성국의 얼굴을 보고 몹시 반가워했다.
그동안은 전쟁 준비로 워낙 바빠서 직접 보고할 시간조차 없었으니까.
더불어 최근에 정성국은 친정하느라 꽤 걱정하기도 했었고.
그런 제자들과 잠시 일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정성국은 오랜만에 얼굴을 보았기 때문에 점차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을 느끼고 일단 이들을 부른 용건부터 처리하고 그 후에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 이야기를 끊었다.
“일단 너희들을 부른 용건부터 먼저 이야기하도록 하마.”
정성국의 말에 떠들썩하던 회의실의 분위기가 순간 고요해졌다.
그런 제자들의 반응에 히죽 웃은 정성국이 오른편에 앉아있는 이상돈을 바라보았다.
“먼저 상돈아.”
“예. 스승님.”
“이번에 에스파냐와 교역할 도자기 물량을 차질없이 생산할 수 있겠느냐?”
이번에 에스파냐와 교역의 물꼬를 텄고 교역을 시작하는 9월에 임시 보급항에서 에스파냐에 넘겨야 할 도자기의 물량은 꽤 많았다.
기존에 네덜란드에 팔던 물량의 몇 배는 될 정도.
당연히 이들에게 넘길 물량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이상돈의 안색은 어두워지며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쉽지 않습니다. 스승님. 작년에 아이누 부족 연합을 통해 접촉한 잉글랜드에 건네줄 물량까지 고려해야 하니까요.”
기존의 개척촌에서 생산하는 도자기는 밀무역을 통해 네덜란드로 넘어갔고 작년에 새롭게 아이누 부족 연합까지 찾아온 잉글랜드가 원하는 물량을 생산하기 위해 이곳 새김포에서 도자기를 만들어 잉글랜드로 넘길 생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몇 달 후 에스파냐에 막대한 물량의 도자기를 넘겨야 했으니.
당연히 그만한 물량의 도자기를 당장 만들어내기는 어려웠다.
가뜩이나 돈이 없는 에스파냐가 저렇게 막대한 물량의 도자기를 주문한 것은 그만큼 북미왕국의 도자기를 높이 평가한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생각보다 북미왕국이 누에바 에스파냐에 원하는 물품이 많아 도자기의 가격을 충분히 감당할 여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푸른 안개는 아예 귀금속이 아닌 현물로도 거래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었고.
이에 에스파냐인들은 환호하며 북미왕국의 도자기 수준을 파악하고 늘렸던 주문량에서 다시 그 배를 주문했다고 하니.
푸른 안개는 정성국의 명령에 따라 최대한 많은 도자기를 팔았지만, 그 도자기를 생산해야 하는 이상돈은 그 주문량을 듣고 눈앞이 깜깜할 정도였다.
“흐음...”
그런 이상돈의 반응을 보고 정성국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럼 일단 개척촌에서 생산하는 물량을 잉글랜드로 돌리면? 그럼 가능하겠지?”
정성국의 제안에 잠시 계산해보던 이상돈은 안색이 조금 펴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야 가능하겠지만...그렇게 되면 그동안 밀무역을 통해 개척촌의 도자기를 수입했던 네덜란드 상인들이 불만을 터트릴 텐데요?”
이상돈의 말에 정성국은 크게 개의치 않는 모양새였다.
“뭐 어차피 나가사키에서 진행하는 밀무역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이 기회에 잉글랜드와 제대로 교역을 하는 것이 나아. 그리고 이번에 에스파냐가 제대로 우리 도자기에 대한 가치를 알려줬으니 이를 계기로 그 가격에 맞춰야지. 그러니 당분간은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넘기는 물량은 확 줄이는 게 맞아.”
현재 네덜란드와 밀무역을 통해 넘기는 도자기의 가격은 현지에서 거래되는 중국의 도자기보다 살짝 못 미치는 가격을 받고 넘기고 있었다.
그것만 해도 대단하긴 했다.
현재 유럽에서 최고로 치는 도자기는 바로 중국산 도자기였으니까.
이 때문에 네덜란드의 상인들은 유럽에서 최고로 치는 중국산 도자기와 비슷한 가격을 쳐준 것만으로도 자신들은 원상을 충분해 배려해준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최근 네덜란드를 통해 퍼지고 있는 이 원상의 도자기가 기존의 중국산 도자기보다 훨씬 낫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세련된 디자인에 중국산 도자기보다 충격에 강했고 그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따뜻한 느낌의 순백색 자기였으니 말이다.
당연히 현지에서 거래되는 도자기의 가격은 이미 중국산 도자기의 가격을 넘긴 지 오래였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상인들이 거래에 불리한 이러한 내용을 이야기할 턱이 없었고 원상 역시 당장은 네덜란드 외에는 딱히 편하게 도자기를 넘길 곳이 없었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었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이번에 교역 협상을 하면서 에스파냐가 생각외로 도자기의 가격을 엄청 비싸게 쳐준 것이다.
오를란도와 보좌관은 북미왕국의 도자기가 중국산 도자기에 못지않다고 판단하고 유럽에서 거래되는 중국산 도자기 가격에서 운송비를 적당히 제외한 가격을 제시해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유럽에서 실제 거래되는 중국산 도자기의 가격에 비해 절반밖에 되지 않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만 하더라도 네덜란드의 상인에게 넘기는 가격의 몇 배는 된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북미왕국 도자기의 가격은 협상을 통해 결정되었는데 어차피 귀금속이 아닌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나오는 현물로 거래를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과 협상을 통해 북미왕국에서도 자신들이 보기엔 쓸모없는 구아노나 고무 따위를 꽤 비싼 값을 쳐주었기에 이에 대한 보답으로 북미왕국 도자기의 가격을 무척이나 비싸게 책정해버린 것이다.
또한, 네덜란드의 경우 일본에서 도자기를 사들여 인도를 거쳐 아프리카를 지나 유럽까지 빙 돌아가야 했지만, 에스파냐의 경우는 대서양만 건너면 그만이라 그만큼 가격에서 운송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기도 했고.
더불어 앞날을 고려해 전략적으로 내린 판단이기도 했다.
오를란도와 보좌관은 북미왕국의 도자기가 유럽에 제대로 먹히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니 이 북미왕국의 도자기를 이용해 중간에서 막대한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고.
그들의 예상대로 일이 흘러간다면 아무런 이득이 나지 않는 쓸모없는 땅을 넘긴 대가로 막대한 이득을 챙길 수 있으니 본국에서도 안토니오 부왕을 심하게 책망하지는 못하리라 판단했다.
이 때문에 교역 협상에 더욱 매달렸던 오를란도와 보좌관이었고.
조약문에 에스파냐가 선제공격한 것에 대한 배상으로 북아메리카 지역의 권리를 넘기는 대신 북미왕국은 에스파냐와 교역 협상을 한다는 문구가 들어간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문제는 훗날 북미왕국이 유럽에 알려지고 이곳에서 이러한 도자기가 생산된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당연히 직접 북미왕국과 교역해 도자기를 수입하려 들 테니 이때를 대비한 포석이었다.
에스파냐는 어차피 현물로 대가를 지급하면 그만이었지만 다른 나라들은 신대륙에 식민지가 없는 만큼 값비싼 돈을 주고 수입해야 할 테니 말이다.
그나마 프랑스나 잉글랜드는 신대륙에 식민지가 있긴 하지만 북미왕국이 원하는 물품들을 생산하기는 힘들어 보였으니.
이런 생각으로 에스파냐가 도자기 가격을 올려버린 결과 밀무역을 통해 원상의 도자기를 유럽에 가져가 막대한 이득을 챙기던 네덜란드가 첫 번째로 타격을 받은 셈이다.
만약 이것이 나중에 알려진다면 에스파냐는 자신들의 선택이 탁월했다고 자화자찬할 것이고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에 이를 갈 것이 확실했다.
“그렇긴 합니다만...그럼 아예 네덜란드 상인과의 밀무역을 중단하는 겁니까?”
의아해하는 이상돈을 보고 정성국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니고...일단은 물량을 확 줄이고 저들이 불만을 표시하면 잉글랜드가 도자기의 가치를 제대로 쳐줘서 그쪽으로 물량을 배정했다는 정보를 살짝 흘리라고 할 거야.”
현재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는 전쟁 중이었다.
이 전쟁은 북아메리카의 네덜란드 식민지인 뉴암스테르담을 잉글랜드가 무혈로 접수하며 네덜란드를 만만하게 생각한 찰스 2세가 1665년 선전포고를 하며 시작되었다.
하지만 10년 전 영국에게 패배해 해상 패권을 놓친 것에 이를 갈고 있던 네덜란드는 프랑스를 끌어들여 연합해 잉글랜드를 공격했고 결국 이 2차 영란전쟁에서는 네덜란드-프랑스 연합군이 승리한다.
그러한 역사를 알고 있던 정성국은 원상을 통해 은근슬쩍 정보를 흘릴 생각이었다.
네덜란드가 가져갔던 물량은 잉글랜드의 상인에게 배정되었다고.
그리고 최근 거래한 상대가 원상의 도자기 가격을 제대로 쳐주었다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인들은 잉글랜드의 상인들이 도자기 가격을 높여 자신들이 받던 물량을 가져갔을 거로 생각할 것이 뻔했다.
당연히 네덜란드 상인들은 잉글랜드를 욕하며 본국에 이러한 정보를 넘길 테고 네덜란드는 잉글랜드를 더욱 싫어하게 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면 잉글랜드에 더욱 가혹한 조건을 제시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북미 동해안에서 확장하고 있는 잉글랜드 식민지도 영향을 받지 않을까 싶었고.
‘아주 그냥 기둥뿌리를 뽑았으면 하는데...잠깐만.’
전생에서는 이 2차 영란전쟁의 승리로 네덜란드는 잉글랜드에 여러 이권을 챙기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뉴암스테르담을 잉글랜드가 장악하고 있던 동남아의 룬 섬과 바꾼 것이다.
현대 관점에서야 기껏 승리해놓고 뉴욕과 동남아의 한 섬을 바꾼 네덜란드가 멍청해 보이겠지만 당대의 관점에서는 고작 항구만 존재하는 뉴욕과 육두구가 나는 룬 섬을 바꾼 것은 엄청난 이득이었다.
‘만약 이번에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도자기의 출처가 북미왕국이라는 것을 흘리고 북미왕국이 저들이 알고 있는 북아메리카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흘린다면? 그래도 저들이 뉴욕을 포기할까? 흐음...’
정성국이 잠시 네덜란드의 상인들을 통해 북미왕국의 정보를 흘리는 것이 어떨까 고려하고 있을 때 정성국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달은 이상돈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이에 정성국은 일단 네덜란드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이상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도자기의 생산량을 늘려야 해. 알겠지?”
정성국의 말에 아직 웃음기가 가득한 표정의 이상돈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계속해서 도공을 늘리고 있긴 합니다만...더 모집해야겠군요.”
“그래. 이왕 늘리는 거 왕창 늘려. 그리고 생산량의 증대를 위해 철저하게 공정을 나누어서 분업화시키고.”
“...도자기도 분업을요?”
이미 분업의 개념은 원상 시절부터 잘 써먹고 있었다.
다만 도자기의 경우는 예술품에 가까웠는데 이를 일반 상품처럼 분업화시키자는 정성국의 말에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이상돈이었다.
그런 이상돈의 반응을 보고 정성국은 머리를 긁적였다.
“도공들이 반발하려나?”
정성국의 말에 살짝 턱을 긁적이면서 생각해보던 이상돈이 고개를 저었다.
“흐음...썩 좋아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전하의 명령이라면 다들 따를 겁니다. 거기에 생산량을 늘리려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 테니까요. 일단 제가 직접 도공들과 이야기해보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