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그때 관리청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리 조그마한 마을이래도 만약을 대비해 일정 병사는 주둔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주민을 끌어들이더라도 자체적으로 방어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관리청장의 말에 정성국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현재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을 머릿속으로 계산해보고 대답했다.
“현재 이곳에서 쉬고 있는 경비대 1500명하고 은 광산지대 주변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 중 절반을 빼면 총 2천의 여유 병력이 생기는 만큼...각 마을에 100명씩 주둔시키면 최소한의 습격은 막아낼 수 있겠지. 부족한 병사는 나중에 더 보충해줄 테니 일단 그렇게 알고 있게.”
정성국의 말에 개발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일단 말을 탄 아차피 족을 상대할 수 있게 목책을 두른 병영부터 건설해야겠군요.”
“그래야 할걸세.”
일단 병영을 건설하고 그 병영을 중심으로 주변의 원주민들을 모아 마을을 건설하는 방법 외엔 없었다.
이를 짐작한 개발청장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군사청장을 한번 바라보고 말했다.
“그럼 아직 산타페 동쪽으로는 제대로 된 정보가 없으니...일단 새나주에서 산타페 중간에 건설될 병영의 위치를 군사청장과 상의해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개발청장의 말을 허락하려던 정성국은 회의실 한쪽에서 열심히 듣고만 있던 연구청장을 보고 생각이 난 듯 덧붙였다.
“으음...그러도록 하게. 아. 연구청장! 자네도 붙도록 하게. 저 경로를 따라 나중엔 철도까지 깔아야 하니 고려해야 할 사항이 더욱 많을 거야.”
정성국의 말에 연구청장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개발청장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연구청장을 바라보다 안색이 새파래지며 정성국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 그러면 경사도 고려해야 하니 길이 더욱 길어질 겁니다만...”
개발청장을 보고 정성국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워낙 인구가 부족한 북미왕국인지라 길 중간에 마을을 건설하고 나중에 철도를 다른 노선으로 만들어 중간에 역을 만들고 또 마을을 세우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겠지. 하지만 어쩌겠나.”
이에 개발청장은 신음을 흘리며 정성국의 뒤편에 놓인 지도를 바라보았다.
“끙...”
“그리고 철도가 깔리기 전까진 그 길을 통해 수많은 물자를 운송해야 하니 좀 돌아가더라도 평지로 길을 정하는 것이 나을 거야.”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계속해서 북미 지역의 지도를 바라보는 개발청장이었다.
“으음...”
그런 개발청장이 안쓰러워 보였기에 슬쩍 조언을 해주는 정성국이었다.
“아마 새나주와 산타페를 거의 일직선으로 연결하는 것은 불가능할걸세. 중간에 산맥들도 많고. 그러니 당연히 꽤 우회해야 할거고...여러가지를 고려하면 아마 국경선을 따라 길을 내는 것도 나쁘진 않아.”
새나주와 산타페를 일직선으로 연결하면 콜로라도 고원지대를 지나야 하는 만큼 우회하는 것이 나았다.
문제는 산타페의 위치가 뉴멕시코 북부에 위치하고 있어 꽤 많이 돌아가야 한다는 점이었고 이를 지적하는 개발청장이었다.
“그러면 너무 돌아가게 됩니다만...산타페는 국경선과는 거리가 꽤 있으니...”
정성국은 개발청장의 지적에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른 대안을 제시해주었다.
굳이 산타페에 집착하지 말라고.
“뭐 필요하다면 산타페는 포기하고 그 남쪽에 마을을 건설하는 것도 나쁠 것은 없지. 어차피 리오그란데강을 통해 산타페를 오갈 수 있을 테니 말일세.”
“아...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전하.”
정성국의 말에 그나마 안색이 나아지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개발청장이었고 그런 그를 보며 다시 한번 미안한 마음에 쓴웃음을 짓는 정성국이었다.
“그러도록 하게. 그리고...아. 행정청장.”
정성국이 부르자 또 무슨 일을 시킬지 걱정이 된다는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는 행정청장이었다.
“...말씀하시지요. 전하.”
그런 행정청장의 반응을 애써 못 본 척하면서 용건을 이야기하는 정성국이었다.
“현재 통바 족을 집중적으로 우두 접종을 하고 있지?”
“그렇습니다. 전하.”
“그 이후엔 추마시 족일테고?”
정성국의 물음에 행정청장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만약을 대비해 해안가에 사는 부족을 우선해서 접종하고 있으니까요.”
“으음...”
행정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안색을 찌푸리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 정성국의 반응을 보고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 행정청장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전하?”
행정청장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정성국은 슬쩍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 인력을 나누어서라도 이번에 합류할 푸에블로 족에게도 우두 접종을 했으면 하는데...”
그러면서 말을 흐리는 정성국을 보고 그 이유를 묻는 행정청장이었다.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미 저들은 에스파냐인과 접촉이 빈번한 만큼 괜찮은 것 아닙니까? 오히려 추마시 족이 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한데...”
그러면서도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 고민인 정성국이었다.
내가 미래를 아는데 곧 푸에블로 족이 전염병으로 인해 떼죽음을 당한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리고 이미 미래가 바뀐 만큼 확실하지도 않았고.
정성국이 기억하는 푸에블로 반란의 주원인은 에스파냐가 강요한 종교 문제 때문이지만 그것은 기폭제일 뿐이지 그 이전에 푸에블로 족의 급격한 인구 감소 역시 주요한 원인이기도 했다.
경신 대기근이 발생하는 1670년은 조선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기상 이변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러한 기상 이변은 푸에블로 족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고 이 지역에는 극심한 가뭄으로 인한 식량난이 발생하고 거기에 전염병까지 발생해 푸에블로 족 전체 인구의 80%가 이 시기 사망하면서 급격하게 인구가 감소한다.
물론 이 당시 전염병은 식량난 때문에 푸에블로 족의 면역이 떨어져 발생한 것으로 생각되는 만큼 이번에는 전염병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때쯤이면 푸에블로 족은 북미왕국에 이미 합류해있을 테고 만약 아직 합류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기근이 발생했는데 그것을 방관할 정성국은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식량은 넘쳐나고 있었고.
덕분에 식량을 보관할 창고 건설이 문제가 될 정도였다.
이 때문에 재작년부터 개발청이나 관리청, 행정청에서는 새한강 인근을 개간하는 인력을 줄이자고 요청했었지만, 정성국은 오히려 더 많은 식량 생산이 필요하다며 일축했다.
그 결과 현재 새한강에서 나오는 식량만으로도 북미왕국 전체 인구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북미왕국에 합류한 부족들에게 농사법을 전파하고 종자를 열심히 퍼트렸기에 마을 곳곳에서도 자체적으로 식량을 어느 정도 생산하고 있었으니 식량은 정말 넘쳐났다.
이 넘쳐나는 식량을 보관하기 위해 곳곳에 식량 창고를 짓고도 부족해 작년부터는 빈 배로 돌아가는 지급 기범선으로 구성된 이주 선단에는 식량을 가득 실어 포로나이 항으로 보내고 있었다.
그런 상황인 만큼 푸에블로 족의 영역에 가뭄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북미왕국에서 식량을 지원해줄 테니 굶어서 면역력이 떨어지지는 않을 테고 원 역사와 달리 전염병이 돌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 전염병이 천연두라는 확신도 없었고.
그렇기에 굳이 추마시 족을 제치고 푸에블로 족부터 우두 접종을 시켜야 하는가 싶긴 했다.
다만 만약을 생각해야 하는 정성국은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에 순서를 바꾸는 것이 좋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그의 귓가에 행정청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전하. 인원을 일부 돌려 푸에블로 족도 우두 접종을 시행하겠습니다. 더불어 위생 교육도 철저하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빙그레 웃는 행정청장을 보고 정성국 역시 고민을 그만두고 미소지을 수밖에 없었다.
“고맙네.”
“아닙니다. 전하.”
고개를 숙이는 행정청장을 따뜻한 눈길로 잠시 바라보던 정성국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연구청장.”
“말씀하시지요. 전하.”
“새나주에 석유가 발견되었다고 하네. 그러니 이 석유의 운송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새나주까지는 철도를 깔아야 해.”
정성국의 명령에 연구청장은 곧바로 대답했다.
이미 작년에 기차가 선보이고 나서 어느 정도 진행이 된 사항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노선은 거의 정해졌고 개발청 기술자들과 연구원들이 실제로 노선을 따라 이동하면서 다시 한번 지형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리고 나선 뭐...”
연구청장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을 줄이고 그의 옆에서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 개발청장을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정성국의 시선도 개발청장을 향했고 개발청장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 부분은 예정된 공사이기에 이미 인력을 빼두었습니다.”
개발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만족했다.
“그거 다행이군. 알겠네. 알아서 진행하도록 하게.”
정성국의 대답에도 개발청장은 한숨을 내쉬면서 하소연을 시작했다.
“하지만 현재도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전하. 이런 상황에서 3년 안에 플로리다에 병사들을 보내려면 최소한 2년 안에 텍사스 지역까지 길을 정비하고 중간에 병영 마을을 건설해야 하는데...솔직히 어렵습니다.”
“끙...”
정성국이 뭐라고 말을 하지 못하자 이것을 기회라고 생각한 개발청장은 더욱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현재 인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전하. 일단 새한강 유역을 개발하는 인력을 모두 빼고 어차피 북미왕국 마을 곳곳에서 식량을 생산하는 만큼 새한강 인근 논밭에 배정된 인원도 모조리 빼서 투입한다면 그나마 가능할 거라 봅니다만...”
이에 정성국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절대 용납할 수 없네. 식량 생산은 계속 늘려나가야 해.”
곧 있을 기상 이변 때문이 아니더라고 식량 생산은 계속해서 늘려나가야 한다고 판단한 정성국이었다.
만약 북미왕국의 인구가 넘쳐나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북미왕국의 인구수는 아직 50만이 살짝 못 미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북미 지역은 더럽게도 넓었고.
북미왕국이 북미 지역을 힘으로 장악하고 싶다고 해서 그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물론 천천히 인구를 늘려나가면서 발전한다면 가능은 하겠지만 이미 북미 동해안에는 잉글랜드가, 북쪽엔 프랑스라는 경쟁자가 있는 상황이라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그나마 이번에 에스파냐의 모든 권리를 가져옴에 따라 훗날 에스파냐가 프랑스에 루이지애나를 그냥 넘겨주는 미래는 막았고 덕분에 먼 훗날 잉글랜드가 프랑스에 미시시피강 동부 지역을 넘겨받아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는 미래는 막았다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저들은 에스파냐가 넘겨준 북미 지역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식민지를 개척하려 들 테니까.
그런 만큼 북미 지역을 빠르게 장악할 필요가 있었고 이는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넘쳐나는 식량을 무기로 최대한 원주민들과 우호적으로 교류해 원주민들을 최대한 끌어들여야 했다.
이를 고려해 단호하게 거절한 정성국을 보고 개발청장은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인력이 너무 부족합니다. 거기에 또 병사를 모집할 테니 정말 힘이 넘치는 젊은이들은 죄다 군사청으로 몰려갈 테고요. 또 에스파냐와의 교역 때문에 선박을 대량으로 건조하고 뱃사람들까지 모집할 것 아닙니까.”
“흠...”
확실히 인력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기에 안색을 찡그린 정성국을 보고 조용한 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과 협상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협상? 멕시코 지역의 원주민을 일꾼으로 데려오자?”
“그렇습니다. 전하. 그저 국경선 근처의 원주민들을 고용하는 형태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정성국도 그 생각은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다만 북미왕국에 대한 정보가 에스파냐에 넘어가는 것을 최대한 막기 위해 고려하지 않았을 뿐이지.
만약 저들이 북미왕국이 생긴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인구수도 채 50만이 안 된다는 사실을 파악했다면 이렇게 쉽게 협상을 제의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 때문에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어느 정도는 위험을 감수해야겠다고 생각한 정성국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별수 없군. 아카풀코로 외무청 관리를 보내 협상을 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전하.”
고개를 끄덕이는 조용한 곰을 보며 정성국은 속으로 생각했다.
‘혹시 모르니 새로 얻은 지역에 파견되는 기술자들이나 병사들의 입단속을 단단히 시켜야겠네. 그래도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