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정성국은 임시 보급항에서 아카풀코 항에서 진행되는 협상이 하루빨리 끝나길 기다리며 이곳에서 대기하는 병사들을 지휘해 이곳 임시 보급항에 여러 건물을 짓고 있었다.
언제까지 에스파냐와 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특히 현재 에스파냐의 영역인 남미에서 나오는 여러 물품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기에 결국 에스파냐와 교역을 하긴 해야 했다.
이 때문에 이미 푸른 안개에게 교역에 대한 협상을 진행하라고 일러두었고.
하지만 저들을 새김포로 오게 할 수는 없었다.
현재 새김포는 수도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외국 선박이 드나들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통바 족의 영역에 건설되어 있는 선착장을 확대하는 것도 어려웠다.
통바 족이 북미왕국에 합류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직 우두 접종도 끝내지 못한 상황에서 서양인들이 드나들었다가 전염병이 돌기라도 하면 큰 문제가 생길 테니까.
그래서 고민 끝에 저들에게 열어줄 항구로 결정한 곳이 바로 이곳 임시 보급항이다.
임시 보급항이 위치한 이곳 주변은 원주민이 없었기에 전염병이 돈다 할지라도 주변에 퍼질 위험이 적었다.
거기에 임시 보급항의 선착장과 그 주변을 목책으로 둘러싼 요새를 그냥 내버려 두기도 아까웠고.
해서 이곳을 에스파냐 상인들에게 개방하기로 하고 선착장을 확장하고 주변에 상인들이 이용할만한 여러 창고와 숙소로 사용할 건물들을 남아도는 병사들의 힘으로 빠르게 건설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선착장 주변이 부산스러워 확인해보니 파나마 항을 공격하러 떠났던 김봉길이 이끄는 지급 전선으로 구성된 함대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정성국은 곧바로 김봉길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잠시 후 김봉길이 정성국이 머무는 임시 집무실에 밝은 표정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게. 함장.”
정성국의 환영에 김봉길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정대로 파나마 항을 공격하고 돌아왔습니다. 전하.”
당당하게 대답하는 김봉길을 보고 빙그레 웃으며 정성국이 물었다.
“그래. 별일 없었고?”
“그렇습니다. 전하. 솔직히 저들의 저항이 심하지 않을까 살짝 걱정했었는데...의외로 파나마 항의 대응이 미약했습니다. 우리에 대한 정보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았고요. 덕분에 쉽게 파나마 항을 공격할 수 있었습니다. 아. 별다른 피해도 없었습니다.”
별다른 피해 없이 임무를 완수했다는 김봉길의 보고에 정성국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거 다행이군.”
“헌데 어째 이곳의 분위기가 좀 여유로운 것 같습니다만...”
아무리 전황이 좋고 이곳이 후방이라고 한들 한창 전쟁 중인 분위기라기보다는 마치 공사판 같은 분위기였기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정성국을 바라본 김봉길이었다.
“아. 일단은 저쪽에서 먼저 협상을 요청해왔네. 해서 지금은 휴전 중이지.”
정성국이 웃으면서 대답하자 김봉길은 무척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 그렇습니까? 벌써요?”
그런 김봉길의 반응에 정성국이 빙그레 웃었다.
“아마 에스파냐의 상황이 썩 좋지 않은 듯싶네.”
이에 김봉길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잠시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정성국의 의견에 동의했다.
“으음...하긴. 생각외로 저들의 저항이 적은 편이었지요. 그것을 생각해보면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군요. 어차피 저항할 여력이 없다면 최대한 빠르게 협상해서 피해를 줄이는 것도 한 방책이 될 테니까요.”
김봉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정성국 역시 고개를 끄덕이면서 오랜 항해에 피곤했을 김봉길을 배려하는 마음에 휴식을 권했다.
“뭐 그렇지. 덕분에 현재는 휴전 중이니만큼 일단 충분히 쉬도록 하게. 내가 볼 때는 이번 협상을 통해 전쟁이 마무리될 것 같기는 한데...또 모르는 일이니까.”
“알겠습니다. 일단 휴식을 취하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출동 준비를 해 두겠습니다.”
“그래. 부탁하지.”
* * *
정성국이 기다리고 있던 푸른 안개와 함께 아카풀코로 이동했던 함대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정성국은 곧바로 선착장으로 나왔다.
선착장은 몹시 붐볐다.
병사들도 아카풀코로 향했던 함대가 막 도착했다는 소식에 하던 일을 멈추고 최대한 빨리 소식을 듣기 위해 선착장으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병사들도 알음알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스파냐와 협상 중이고 이 협상이 잘 진행된다면 전쟁이 끝난다는 것을.
그러니 협상단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한시라도 빨리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이렇게 모여든 것이다.
이에 호위대장은 인상을 찌푸리며 병사들을 해산시키려 했지만, 정성국이 제지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굳이 병사들을 빡빡하게 통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정성국이 호위대원들과 함께 선착장으로 이동하자 병사들이 허겁지겁 물러나며 길을 터주었고 곧바로 선착장으로 들어서는 지급 전선을 향해 이동했다.
그리고 지급 전선이 정박하고 처음으로 내리는 푸른 안개를 확인하고 곧장 그에게 다가갔다.
“오셨습니까? 장인어른.”
자신을 보고 미소짓는 정성국을 보고 푸른 안개는 주변을 한번 살펴보더니 부복하며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전하! 전하의 명령을 받아 에스파냐와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습니다! 우리 북미왕국을 공격했던 에스파냐는 북미왕국의 위엄에 굴복했고 결국 우리 북미왕국에 사죄하며 우리와 평화롭게 지내기를 간청했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갑작스러운 푸른 안개의 외침에 정성국이 살짝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호위대장이 먼저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전하! 승전을 감축드리옵니다!”
그러자 정성국 주변에 있던 호위대원들도 따라 외쳤다.
““승전을 감축드리옵니다!””
그러자 드디어 전쟁이 끝났음을 파악한 주변의 병사들이 기쁨의 함성을 외치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우리가 이겼다!”
“주상 전하 천세!”
“북미왕국 천세!”
그제야 정성국은 푸른 안개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눈치채고 피식 웃으며 부복해있는 자신의 장인을 일으켜 세웠다.
“굳이 이러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조용한 목소리로 푸른 안개에게 이야기하는 정성국을 보고 푸른 안개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보아하니 병사들이 이번 협상을 꽤 궁금해하는 눈치라서 말입니다. 병사들이 저렇게 승전을 기뻐하며 북미왕국과 전하를 연호하는데 한 말씀 하시지요?”
이에 정성국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보고 연호하는 병사들에게 손을 한번 들어주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더욱 열광하며 정성국을 바라보고 환호했다.
정성국은 그런 병사들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본 뒤 푸른 안개를 보고 말했다.
“일단 들어가시지요.”
* * *
“이게 그 협정 내용이 담긴 조약문입니까?”
“그렇습니다. 전하.”
“흐음...”
정성국은 푸른 안개가 건네준 조약문을 꼼꼼히 읽어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장인어른. 북미왕국에 유리한 부분이 생각외로 많군요.”
그 말에 푸른 안개는 미소지으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전하. 저들과 협상해보니 저들은 북미왕국을 꽤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습니다. 거기에 전쟁이 길어지는 것도 원치 않았고요. 덕분에 이러한 협상이 가능했습니다.”
“그렇군요. 헌데 국경선을 기준으로 북쪽의 권리를 모조리 넘기다니...저들이 반발하지는 않았습니까?”
“전혀요.”
푸른 안개의 대답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정성국이었다.
그리고 푸른 안개는 협상 중에 저들이 어떤 말을 했는지 자세하게 설명했다.
“허. 그게 정말입니까?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들먹였다고요? 거기에 유럽 모든 국가가 인정하고 있는 조약이라고 했고?”
푸른 안개의 말을 다 듣고 정성국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유명무실해진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들먹였다는 이야기는 북미왕국이 유럽의 사정을 잘 모를 것이라 짐작하고 대놓고 속이려 했다는 뜻이었으니까.
거기에 이미 종교개혁으로 교황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상황인데 유럽 모든 국가가 인정하는 조약이라니.
‘작정하고 속이려 했구나...웃긴 건 우리에게 사기 치면서 넘겨주려고 했던 것이 정작 우리가 원했던 북미 지역이라는 게 참...’
정성국이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푸른 안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습니다. 전하. 만약 전하께 자세하게 듣지 못했다면 속아 넘어갔을 것입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에스파냐는 이 북미 지역을 우리 북미왕국에 떠넘길 생각이었으니 결과가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만...”
그러면서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흐리는 푸른 안개였다.
이를 보고 정성국은 생각을 멈추고 푸른 안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잘 하셨습니다. 괜히 우리가 저들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릴 필요는 없지요. 다만 당시 상황이 그랬다면 저들은 우리가 북미 지역을 장악하면서 잉글랜드와 싸우길 바란 모양이군요. 상황을 보아하니 문구를 어떻게 정하든 우리 북미왕국이 북미 지역의 권리를 확보했다는 것을 유럽 내에 널리 알릴 테고 말입니다.”
정성국의 추측에 푸른 안개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딱히 믿을만한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푸른 안개의 반응에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들였다.
“뭐 외교관이야 국가의 이득을 우선하는 존재이니...헌데 이건 뭡니까? 산아구스틴의 에스파냐 병사는 3년 후에 철수한다?”
조약문에는 이번 사태에 대한 보상으로 북위 31도와 리오그란데 강 이북의 에스파냐가 가지고 있는 모든 권리를 1666년 5월 7일 자로 북미왕국에 모두 넘기고 1년 안에 기준선 북쪽에 있는 모든 에스파냐인이 철수할 거라고 적혀 있었다.
단 산아구스틴에 주둔한 에스파냐의 병사들은 3년 후에 철수한다고 적혀 있었기에 이를 의아하게 여긴 정성국이 묻자 푸른 안개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처음 저들은 곧바로 산아구스틴에 주둔한 병사들을 철수시킬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빈 자리를 잉글랜드가 차지하게 될 테고 이 지역의 권리를 넘겨받은 우리 북미왕국이 이를 용납하지 않을 테니 자연스럽게 우리 북미왕국과 잉글랜드가 다툴 것으로 생각한 모양입니다.”
저들의 속셈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에 정성국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요. 헌데 왜?”
“전에 전하께서 이르시기를 이곳의 해적이 꽤 극성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요. 아. 설마?”
푸른 안개가 정성국을 보고 씩 웃었다.
“예. 그것을 명분으로 당장 북미왕국과의 거리가 있기에 산아구스틴에 병사를 파견하기 어려우니 3년간은 에스파냐의 병사가 이곳을 지켜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대답에 정성국의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저들이 받아들였습니까?”
“처음에야 거절했습니다만...만약 에스파냐의 병사가 철수하고 해적들이 이곳을 점거해 주변을 노략질한다면 에스파냐에도 좋을 것은 없지 않냐는 말에 고민하다 승낙하더군요.”
아마 플로리다 지역을 고스란히 북미왕국에 인계한다 하더라도 남하하는 잉글랜드와 마찰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에 이 제안을 받아들인 듯싶었다.
더불어 지금까지와는 달리 잉글랜드인의 남하를 적당히 방관할 테고.
그래야 나중에 산아구스틴을 북미왕국에 인계한 후 잉글랜드와 마찰이 생길 테니 말이다.
그것을 짐작한 정성국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3년이라...”
3년 안에 캘리포니아에서 플로리다까지 병사를 보내야 한다니.
조금은 막막했다.
단지 병사를 보내는 것뿐만 아니라 그곳에 병사들을 주둔시키려면 물자까지 꾸준히 보내야 하는 만큼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소한 3년 안에 텍사스 지역에 그럴듯한 항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쉽지는 않겠지만...그래도 어떻게든 해내야지. 최대한 빨리 텍사스에 항구를 만들고 선박을 건조해서 플로리다뿐만 아니라 루이지애나도 장악해야 하니...그나마 프랑스 놈들이 남하하기 전에 진출할 수 있어서 다행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