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117화 (117/850)

117화

그렇게 결정을 내린 푸른 안개가 입을 열자 오를란도는 내심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결국은 제대로 된 영토 협정을 맺자는 거구려. 나쁘진 않소. 이번 일도 어찌 보면 에스파냐가 우리 북미왕국의 영역을 몰랐기에 벌어진 사태이니 말이외다.”

푸른 안개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오를란도가 활짝 웃으면서 맞장구쳤다.

“그렇지요! 그러니 이 기회에 에스파냐와 북미왕국의 영역을 명확히 한다면 이런 충돌은 없겠지요!”

그렇게 웃는 오를란도를 보고 푸른 안개는 미소를 지으면서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하지만...이 국경선은 썩 마음에 들지 않는구려. 꽤 복잡해 보이기도 하고.”

“그럼?”

“적당히 국경선을 조정해서 좀 간단하게 만들었으면 하는데...이 지도는 우리의 지도와는 조금 다르구려.”

그러면서 탁자에 놓인 지도를 톡톡 건드리는 푸른 안개였다.

그런 푸른 안개의 반응에 오를란도는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지도가 다르다구요?”

“그렇소. 우리가 파악한 지형과 이 지도는 좀 다르구려. 헌데 이 자리에서 영토 협상을 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해 지도를 준비하지 못했으니...일단 오늘 협상은 여기까지 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내일 다시 협상을 하도록 하지요.”

거짓이었다.

애초에 푸른 안개는 영토 협상을 원했으니 당연히 북미왕국의 지도를 준비해두었다.

다만 이들의 엉성한 지도를 확인하고 나니 굳이 저들이 모르는 북미 서해안의 지형이 그려진 지도를 보여줄 필요는 없겠다 싶었기에 일단 시간을 끈 것이었다.

그리고 협상을 미루자는 푸른 안개의 요청에 오를란도는 잠시 고민했지만 푸른 안개의 반응을 보아하니 배상금 대신 영토를 주겠다는 에스파냐의 제안 자체는 받아들인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적당히 국경선을 조정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으음...알겠습니다. 아무래도 갑작스러운 이야기인 만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그럼 내일 다시 협상을 진행하도록 하지요.”

오를란도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푸른 안개도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다시 뵙지요. 아. 로하스. 할 이야기가 많을 테니 함께 가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 * *

“이건...”

오를란도뿐만 아니라 뒤쪽에 서 있던 보좌관과 사뮤엘도 탁자에 놓인 지도를 강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더불어 로하스까지 지도에 무척 관심을 보였고.

다만 그들은 곧 맥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들이 알고 싶었던 것은 베일에 가려져 있던 북미왕국의 정확한 영역이 그려진 지도였는데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에는 전혀 나와 있지 않으니까.

“이게 우리 북미왕국에서 파악한 멕시코 지역의 지도입니다.”

원래 준비했던 지도는 북미 지역 전체가 그려져 있는 지도였지만 저들에게 제대로 된 북미 지역, 정확히는 북미 서해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고 이 협상에서 중요한 것은 국경선이었기에 원래 준비했던 지도를 적당히 잘라 다시 그렸다.

덕분에 기존의 북미 지역까지 그려져 있는 지도가 아닌 멕시코 지역의 지도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 지도를 살펴보던 에스파냐인들은 표정이 기묘해졌다.

이 지역을 실제로 통치하고 있는 에스파냐의 지도와 저들이 파악한 지형을 그렸다는 지도가 미묘하게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들이 이 협상장에 저 지도를 가져온 것을 생각하면 저들은 자신들의 지도가 옳다고 주장할 것이 확실했기에 협상이 골치 아파질 것으로 생각했고.

“으음...확실히 우리의 지도와는 다르군요.”

지도를 유심히 살펴보고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는 오를란도를 보고 푸른 안개는 미소를 지었다.

“이 지도를 가져온 이유는 바로 양국이 파악한 지형이 다른 만큼 국경선을 리오그란데 강을 기준으로 삼았으면 해서입니다. 그게 간편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다른 기준선은 북위 31도로 정하도록 하지요.”

“으음...”

푸른 안개의 말처럼 에스파냐의 지도와 북미왕국의 지도는 미묘하게 달랐기에 에스파냐가 제시한 국경선은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었다.

이 때문에 국경선을 편하게 나누기 위해 위도를 기준으로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들려온 푸른 안개의 제안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지도가 조금 다르다 해도 지형과 위도를 가지고 나누는 만큼 말이다.

이에 오를란도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무렵 푸른 안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우리가 파악해 그린 지도와 에스파냐의 지도가 차이는 있습니다만...이 두 기준이라면 큰 문제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기야 한데...”

오를란도가 슬쩍 뒤쪽에 있는 보좌관을 바라보았지만, 보좌관 역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 생각했던 국경선과는 조금 달랐기에 몇몇 마을은 포기하거나 옮겨야 했지만, 그 정도는 이미 각오했었고.

그보다는 명목상의 영토를 넘겨 큰 손해를 보지 않고 북미왕국과 전쟁을 끝내는 협상을 맺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더불어 남쪽의 국경선을 어떻게 정하건 간에 북아메리카 지역을 북미왕국이 넘겨받기로 했으니 최소한 북미왕국과 잉글랜드의 마찰은 예정되어있으니.

보좌관의 동의에 오를란도는 다시 한번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도록 하지요. 비록 지도가 조금 다르다 하더라도 리오그란데 강과 북위 31도를 기준으로 한다면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허면 이 국경선을 기준으로 북쪽의 북아메리카 지역의 모든 권리를 북미왕국에 넘기겠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한 배상은 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를란도의 말에 푸른 안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렇지요. 이 정도면 에스파냐가 우리 북미왕국을 두 번이나 공격한 것과 이 때문에 우리 북미왕국에 에스파냐를 공격하기 위해 함대를 동원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는 충분한 듯싶소. 아. 그리고 북미왕국에 머무는 포로의 몸값도 포함해서 말이오.”

“드디어!”

푸른 안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쪽에서 로하스가 감격에 가득 찬 탄식을 애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모습을 미소지으며 바라보던 오를란도는 슬쩍 푸른 안개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지요. 이번 협상에서 우리 에스파냐가 이렇게 북미왕국에 성의를 보인 만큼 북미왕국도 우리를 조금은 배려해 주었으면 합니다만...”

사기를 쳐놓고도 성의를 보였다고 이야기하는 오를란도를 보고 참으로 못 믿을 자들이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차고 있던 푸른 안개는 이자가 무엇을 원하는가 싶어 입을 열었다.

“배려? 원하는 것이 있소?”

“북미왕국의 항구를 에스파냐의 선박이 이용할 수 있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더불어 교역도 했으면 좋겠고.”

오를란도의 말에 푸른 안개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북미왕국의 항구를 개방해달라?”

“그렇습니다.”

북미왕국의 항구를 모두 개방해달라는 뜻이라면 당연히 고려할 가치도 없는 제안이었지만 오를란도의 말은 그런 뜻 같지는 않았기에 잠시 생각하다가 푸른 안개가 물었다.

“혹시 교역 선단 때문에 그러는 거요?”

푸른 안개의 말에 오를란도는 잠시 푸른 안개 뒤쪽에 서 있는 로하스를 힐끗 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로하스에게 이미 들었나 보군요. 그렇습니다. 태평양을 횡단하는 것은 무척 고단한 항해인지라 태평양을 횡단한 후 도착하는 캘리포니아 섬에서 휴식을 취하며 배를 수리해야 합니다. 헌데 근처에 북미왕국의 항구가 있다면 그곳을 이용하고 싶습니다만...”

“흐음...”

오를란도의 요청에 푸른 안개는 고심에 빠졌다.

북미왕국으로서도 에스파냐와의 교역은 필요했다.

그렇기에 이번 협상을 통해 교역의 물꼬를 틀 생각이었고.

하지만 그러한 교역은 무척 제한적으로 시행할 생각이었다.

아직 북미왕국의 의학이 정성국이 원하는 수준에 도달하지도 못했고 북미왕국의 모든 백성에게 우두를 접종하지도 못해 불안했기 때문이다.

이런 정성국의 생각을 잘 알고 있는 푸른 안개로서는 오를란도의 요청이 꽤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오를란도는 로하스를 통해 알게 된 새김포를 생각하는 것 같은데 현재 새김포는 북미왕국의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그런 새김포를 저들에게 개방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 요청이 에스파냐에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냥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에 이 요청을 거부하면서 에스파냐와 교역을 청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해서 고심 끝에 푸른 안개는 결정을 내리고 오를란도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합시다. 교역 선단이 태평양을 횡단한 후 도착하는 곳이 북위 39도 인근이라지요? 당신들이 멘도시노 곶이라고 부르는?”

“그렇습니다.”

“그 멘도시노 곶에 조그마한 무인 항구를 만들어두겠습니다. 그리고 교역 선단이 그곳을 이용하는 것을 허락하겠습니다.”

푸른 안개의 대답은 오를란도가 원한 대답과는 거리가 있었기에 살짝 당황했다.

“으음...”

“단 그 항구를 이용하는 것은 오로지 교역 선단뿐입니다. 다른 선박이 함부로 우리의 영해에 들어오는 것은 허락할 수 없습니다.”

푸른 안개의 대답에 에스파냐인들의 안색이 무척이나 굳어졌다.

“이번 협상을 계기로 우리 에스파냐와 북미왕국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거라 믿었는데...북미왕국의 생각은 조금 다른가 봅니다?”

살짝 찌푸린 얼굴의 오를란도의 질문에 푸른 안개를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우호라...물론 우리 북미왕국도 에스파냐와 우호적인 관계를 원하지만 그건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소?”

싸우고 악수 한번 했다고 화기애애하게 지낼 수야 있겠느냐는 푸른 안개의 말에 오를란도의 표정은 굳어졌다.

“으음...”

“그리고 천천히 교류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거라 믿소.”

이에 오를란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교류라니? 북미왕국은 교류할 길을 막아버렸잖습니까?”

그런 오를란도를 보고 푸른 안개는 피식 웃었다.

“내가 대답한 것은 교역 선단이 머물 항구에 관한 이야기였을 뿐이오.”

푸른 안개의 대답에 오를란도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나 역시 교역을 통해 나라 간의 교류를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잘 알고 있소. 허니 일단은 항구를 하나 정해서 일정 기간 방문을 허락할 테니 그곳에서 교역을 진행하는 것으로 합시다.”

“아...알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지요.”

에스파냐로선 썩 만족스러운 제안은 아니었지만, 아예 교역이 막힌 것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당장 에스파냐가 북미왕국에 원하는 것은 도자기를 비롯해 유럽에 가져가 팔만한 교역품인지라 이 정도로도 충분했고.

오를란도가 동의하자 그때부터는 서로 원하는 물품과 수량을 정하느라 협상을 했다.

협상은 꽤 길어졌다.

특히 로하스가 에스파냐인에게 흘린 북미왕국의 정보를 통해 원하는 것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에스파냐는 북미왕국의 도자기와 선박, 화포, 그리고 저들이 사용한다는 속사가 가능한 머스킷을 원했지만, 그것을 북미왕국이 허락할 리는 없었고 결국 도자기 외에는 얻지 못했다.

다만 북미왕국에서도 다른 것은 몰라도 머스킷 정도는 나중에 내어줄 수 있다는 여지는 남겼기에 그나마 불만을 삼킬 수 있었던 에스파냐인들이었다.

더불어 교역에 관한 길었던 협상이 끝난 후 열린 연회에서 나온 음식과 술이 담긴 자신들의 취향에 딱 맞는 금박을 입힌 화려한 도자기를 보고 에스파냐인들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워했다.

지금까지는 중국의 도자기를 최고로 치긴 했지만, 북미왕국의 도자기도 그와 비견할만했다.

거기에 중국의 도자기와는 달리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디자인이었기에 유럽에 가져가면 무척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그렇게 연회를 통해 곧 시작될 북미왕국과의 교역을 기대한 에스파냐는 남은 협상을 최대한 북미왕국의 편의를 봐주면서 진행해주었고 그렇게 모든 협상은 마무리되었다.

결국, 1666년 5월 7일 지급 전선의 위에서 북미왕국 협상단의 대표인 푸른 안개와 에스파냐 협상단의 대표인 오를란도가 훗날 아카풀코 조약이라고 부르는 한글과 에스파냐어로 적힌 2부의 조약문에 서명하면서 북미왕국과 에스파냐의 전쟁은 북미왕국이 아카풀코를 공격한 지 6주 만에 종결되었다.

여담으로 나중에 이 아카풀코 조약이 에스파냐에 의해 유럽에 알려지자 이 시기 유럽의 패권을 장악하고 신대륙에도 한발 걸치고 있던 프랑스는 에스파냐가 갈 데까지 갔다고 비웃은 반면 잉글랜드는 북아메리카에 새롭게 등장한 북미왕국을 경계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