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로하스의 이야기가 끝나자 선장실 안은 적막만이 가득했다.
로하스는 긴 이야기를 마치고 목을 축이고 있었고 다른 에스파냐인들은 로하스의 이야기를 되새기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에 잠겼다.
물론 북미왕국이 단순히 인디언들이 연합해 세운 나라가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맞서기보다는 협상을 생각했던 것이고.
하지만 로하스가 전해준 이야기에 따르면 생각외로 강력한 나라였고 또 문명국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적막을 깨뜨린 것은 바로 보좌관이었다.
“그거 정말입니까? 북미왕국이 도자기를 만들어낸다고요?”
로하스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목기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더니 나중에 위생에 좋지 않다면서 도자기로 만든 식기를 주더이다. 물론 아시아에서 가져오는 도자기와는 달리 투박하고 단순한 모양이긴 했지만...”
로하스의 말을 끊으며 보좌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포로들에게 그런 상등품의 도자기를 줄 이유는 없겠죠. 그리고 도자기를 아시아에서 가져와서 포로에게 줄 이유도 없을 테고. 이해했습니다.”
도자기는 아시아의 특산품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때문에 막대한 부가 아시아로 흘러 들어갔고 당연히 유럽의 각국은 이 동양의 하얀 금이라고 불리는 도자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아직 유럽은 도자기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었다.
헌데 북미왕국이 도자기를 생산한다니.
‘도자기의 제조법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재 상황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힘들 테고...다만 북미왕국과 교역을 통해 도자기를 구할 수 있다면 나쁠 것은 없어 보이는데? 물론 북미왕국의 도자기가 아시아의 도자기처럼 수준이 높아야겠지만...’
그렇게 속으로 생각한 보좌관이 오를란도를 보고 이야기했다.
“이번 협상을 통해 저들과 교역의 물꼬를 트는 것도 괜찮겠군요.”
이에 오를란도도 동의했다.
“흐음...그렇지요. 어차피 이번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낼 생각이었고 북아메리카의 영토를 어느 정도 넘긴다면 결국 이웃 국가가 되는 만큼 서로 교류한다는 명목으로 북미왕국과 교역을 청한다면야...”
보좌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오를란도를 보며 물었다.
“그럼 협상은 예정대로?”
“그래야지요. 어차피 우리가 크게 손해 보지 않고 저들에게 내어줄 것은 북아메리카의 영토뿐이지 않습니까. 문제는 북미왕국의 정확한 영역인데...이보게. 로하스. 정말 북미왕국은 캘리포니아 섬을 기반으로 하는 왕국이 맞는가?”
오를란도와 보좌관은 심각한 표정으로 로하스를 바라보았다.
북미왕국의 정확한 위치는 무척 중요한 문제였다.
로하스의 말대로 북미왕국이 캘리포니아 섬에 위치한 나라이고 북아메리카 지역으로 진출하는데 아무런 관심이 없다면 북아메리카 지역을 넘긴다는 협상 카드가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으니까.
대충 사정을 파악한 로하스는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제 추측일 뿐이지요. 최소한 캘리포니아 섬의 중앙에 위치한 강 안쪽에 꽤 커다란 항구가 있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지요.”
“으음...그 항구는 어떻던가. 꽤 오래되어 보이던가?”
오를란도가 묻자 로하스는 잠시 머릿속에 새김포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흐음...생각해보면 딱히 그렇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최근에 만들어진 항구 같달까요? 그리고 3년 전 포로로 끌려가면서 보았을 때보다 더욱 커진 느낌이었고.”
로하스의 대답에 오를란도와 보좌관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으음...그럼...”
“우리의 추측대로 북미왕국의 영역은 북아메리카 내륙에 위치한 것이 맞을 겁니다. 그리고 최근에 서쪽으로 확장하여 캘리포니아 섬을 얻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그래야 현 상황이 설명됩니다. 그리고 최소한 캘리포니아 섬은 탐사대가 분명 엘도라도를 탐사하기 위해 탐사한 곳이 아닙니까. 만약 로하스의 말처럼 북미왕국이 캘리포니아 섬에 위치한 나라였다면 몰랐을 리가 없어요.”
“그렇긴 하지만...흐음...”
이것은 한정된 정보로 현 상황을 이해해야 했던 에스파냐인들의 착각에 불과했다.
에스파냐로선 조선의 유민들이 태평양을 건너 캘리포니아에 정착해 최근에 나라를 건설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으니 말이다.
“그리고 정말 로하스의 말처럼 캘리포니아 섬에 북미왕국이 자리 잡고 있다 하더라도 어차피 우리가 내밀 수 있는 카드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크게 고민할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저들이 내륙으로 세력을 넓히길 응원해야겠지요. 그래야 저들의 발목을 잡을 수 있으니까요.”
보좌관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오를란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군요. 그럼 예정대로 협상을 진행하지요.”
* * *
“로하스와 대화하며 당시의 상황을 파악한 결과 우리 에스파냐의 과실이 있었음을 인정합니다.”
휴식 시간이 끝나고 푸른 안개가 다시 병사들과 함께 선장실로 들어와 자리에 앉자 오를란도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에 푸른 안개는 속으로 살짝 당혹스러워하며 오를란도를 바라보았다.
“이번 전쟁의 원인이 에스파냐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겠다는 뜻이오?”
“그렇습니다. 인정합니다.”
다시 한번 확인했지만 오를란도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푸른 안개는 속으로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분명 에스파냐의 과실을 인정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순순히 자신들의 책임임을 인정한다고? 대체 왜?’
예상외의 오를란도의 대답에 푸른 안개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오를란도를 응시하고 있을 때 다시 오를란도가 입을 열었다.
“다만 에스파냐는 북미왕국의 존재를 몰랐습니다. 그렇기에 에스파냐가 의도적으로 북미왕국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하고 싶군요, 그저 우리 교역 선단의 항로가 북미왕국의 영역과 겹쳐 불필요한 충돌이 발생했을 뿐입니다.”
오를란도의 말이 끝나자 계속 침묵할 수 없는 처지인 푸른 안개가 단호하게 에스파냐에 압박을 가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문제는 그 불필요한 충돌이 두 번이나 발생했고 이 때문에 결국 우리 북미왕국이 칼을 뽑아야 했다는 것 아니겠소?”
푸른 안개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오를란도는 살짝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그러니 예전에 있었던 두 번의 충돌에 대한 보상과 현재 북미왕국에 잡혀있는 포로들에 목숨값, 그리고 이번에 북미왕국이 함대를 동원한 것에 대해 충분한 보상을 하도록 하지요.”
충분히 보상하겠다는 오를란도의 말에 푸른 안개는 저들의 속셈을 어느 정도 짐작했다.
그가 파악하기로는 에스파냐의 재정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그런데 충분한 보상을 하겠다니.
대체 무엇으로 말인가.
거기에 정성국이 짐작하기를 저들의 부왕은 생각보다 유능하고 계산이 빠른 자라고 했었다.
그렇기에 북미 지역의 권리를 넘겨달라는 요구도 충분히 받아들일 거라고 말이다.
이것을 반대로 생각하면 저들이 먼저 북미 지역을 넘겨주는 대가로 이 전쟁을 끝내자고 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정성국의 추측대로라면 에스파냐로선 자존심이 조금 상할 뿐이지 크게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이에 푸른 안개는 자신이 추측한 저들의 속셈이 맞나 확인하기 위해 슬쩍 입을 열었다.
“보상이라...로하스에게 듣자니 당신들은 나라 간에 전쟁에서 불리한 쪽이 배상금을 내고 전쟁을 마무리하기도 한다지요? 그럼 배상금은 얼마나 낼 작정이오? 아카풀코 항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그대들은 은이 꽤 많은 것 같던데?”
푸른 안개가 은근슬쩍 은을 언급하며 배상금으로 은을 원하는 기색을 보이자 오를란도와 보좌관의 안색이 살짝 흐려졌다.
그것을 확인한 푸른 안개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직감했고.
오를란도는 곧바로 안색을 가다듬고 애써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비록 오해이긴 했지만, 우리 에스파냐가 먼저 북미왕국의 선박을 2번이나 먼저 공격했고 이 때문에 북미왕국에서 대규모 함대를 동원했으니 한두 푼의 배상금만으로는 보상하기 어렵다는 판단입니다. 해서 우리 에스파냐의 영토 일부를 넘길 생각입니다.”
오를란도의 말에 속으로는 자신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기뻐하면서도 겉으로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오를란도를 바라보는 푸른 안개였다.
“영토? 에스파냐의 영토를 말이오?”
푸른 안개의 그러한 반응에 오를란도는 북미왕국이 흥미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동시에 보좌관에게 손짓했고 보좌관은 품 안에서 한 장의 지도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이 지도를 푸른 안개는 꽤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기존의 북미왕국에서 봐왔던 지도와는 꽤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특히 멕시코 지역과 북미 동해안 지역은 꽤 비슷하게 그려져 있었지만, 북미 서해안 지역은 북미왕국에서 봐왔던 지도와는 전혀 달랐다.
자신들 북미왕국의 영역은 섬으로 그려져 있었고 그 외의 북미 서해안 쪽은 그저 공백으로 남아있었다.
‘확실히 이들은 아직 북미 지역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군.’
푸른 안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오를란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북미왕국이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해서 이 신대륙은 우리 에스파냐의 영토로 공인받았습니다. 이는 유럽의 대부분 나라가 인정하고 있지요.”
“...”
푸른 안개는 갑자기 유명무실해진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들먹이는 오를란도를 보고 에스파냐가 이번 협상에서 북미 지역을 넘길 생각을 하고 있구나 싶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만약 자신들이 지배하고 있는 에스파냐의 영역을 넘겨줄 생각이었다면 굳이 저 유명무실한 조약을 언급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푸른 안개는 노련했기에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기 위해 애써 무표정한 얼굴을 하면서 오를란도를 바라보았고.
오를란도는 무표정한 푸른 안개의 얼굴을 보고 자신이 신대륙을 에스파냐의 영토로 규정하자 푸른 안개가 화가 난 것으로 생각해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잽싸게 말을 이어나갔다.
“아. 그렇다고 현재 북미왕국의 영역까지 우리 에스파냐의 영토로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애초에 토르데시야스 조약 자체는 이 신대륙을 에스파냐의 영토로 규정하고 있습니다만...북미왕국은 예전부터 이곳에서 살고 있던 원주민들로 이루어진 나라이니 북미왕국의 영역은 예외로 둬야겠지요.”
“...”
오를란도의 말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한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 안개의 행동에 괜히 긴장한 오를란도는 헛기침을 하면서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크흠. 아무튼, 그러한 북미왕국의 영역을 제외한다면 그 외의 지역은 모두 우리 에스파냐의 영토인데...이 영토 일부를 북미왕국에 넘기는 것이라면 이번 사태에 대한 보상으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오를란도의 말이 끝나자 푸른 안개는 신음을 흘리며 잠시 자신은 고민 중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흐음...”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맹렬하게 계산하기 시작했다.
‘지적할 것이 많긴 한데...굳이 우리가 저들에 대해 잘 안다는 정보를 알릴 필요가 있나 싶군. 일단 모르는 척하면서 저들이 우리에게 넘길 영토를 확인하고 대응하도록 할까?’
생각을 끝낸 푸른 안개가 퉁명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일단 들어나 봅시다. 우리에게 넘길 영토는 어디요?”
푸른 안개의 대답에 오를란도가 빙긋 웃으면서 탁자에 놓인 지도를 짚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 선을 경계로 북쪽을 모두 북미왕국의 영토로 인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땅이 북미왕국의 영토라는 것을 유럽에 널리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이번 사태에 대한 보상으론 차고 넘칠 것이라고 봅니다만...”
오를란도가 그은 선은 정성국이 푸른 안개에게 이야기 한 선과는 조금 달랐지만 비슷했다.
정성국이 리오그란데 강과 북위 31도 선을 기준으로 선을 나누었다면 이들은 국경선 동쪽은 리오그란데 강 북쪽의 영역도 포함하되 국경선 서쪽의 가장 북쪽까지 올라온 국경선도 북위 30도 선에 위치했다.
정말 저들의 주장대로 이 땅을 정말 자신들의 땅이라고 생각했다면 과연 이렇게 넓은 영역을 타국에 넘길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이 제안에 따르면 에스파냐가 포기하는 것은 산타페와 산아구스틴만 포기하는 것이고 그 두 도시를 포기하는 대신 북미왕국을 잉글랜드와 부딪치게 만들 수 있으니 에스파냐로선 딱히 커다란 손해도 아니었다.
이를 파악한 푸른 안개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흥. 플로리다를 넘기고 북미 지역이 북미왕국의 영토임을 유럽에 널리 알리겠다니...노골적으로 우리 북미왕국이 유럽의 여러 나라와 신대륙을 놓고 부딪치길 원하는군...이렇게 된 이상 전하께서 처음에 이야기했던 대로 국경선을 긋는 것이 최선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