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멕시코 시티의 부왕이 쓴 편지와 함께 도착한 부왕의 보좌관이 아카풀코에 도착해 오를란도에게 건네고 부왕의 뜻을 전했다.
오를란도는 북미왕국의 힘을 직접 경험했었기에 어떻게든 이번 협상을 통해 북미왕국과 전쟁을 끝내고 싶어 했다.
그런 그에게 전해진 부왕의 의중은 그를 기쁘게 했다.
오를란도가 생각하기에도 북아메리카 지역은 에스파냐에는 그리 매력적인 땅은 아니었다.
잉글랜드처럼 이주민을 왕창 보내 식민지를 건설하는 방식이라면 모를까 소수의 병사를 보내 원주민을 지배해 식민지를 건설하는 에스파냐의 방식으로는 인구가 적은 북아메리카를 통치하는 것은 비효율적이었다.
그 때문에 북아메리카에 식민지 건설이 더딘 상황이었고.
부왕은 이를 북미왕국에 넘겨주는 대신 그들의 발목에 족쇄를 채우려 했고 오를란도가 판단하기에도 그들은 이 제안을 거부하진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
북미왕국은 북아메리카 지역에 위치해 있는 나라였고 그런 나라에 북아메리카 지역 전역을 넘겨주겠다는데 거부할 리가 있겠는가.
물론 그럴 권리나 소유권을 과연 에스파냐가 가지고 있는가는 뒤로하고 말이다.
이 의견에 보좌관 역시 동의했고 덕분에 딱히 협상 계획을 짤 필요도 없었다.
굳이 밀고 당길 필요 없이 이번 전쟁이 에스파냐의 잘못임을 인정하고 그 보상으로 북아메리카 지역을 북미왕국에 넘겨 버리면 그만이니까.
괜히 협상이 길어져 봐야 멕시코 지역 서해안이 마비된 에스파냐만 손해였다.
이 때문에 하루빨리 협상이 시작되기만을 아카풀코 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오를란도와 보좌관은 마침내 아카풀코 만에 북미왕국의 함대가 보인다는 소식에 곧바로 해안가로 나갔다.
“저게...북미왕국의 선박입니까?”
보좌관은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북미왕국의 함대에서 유일하게 돛이 있는 선박을 가리키며 오를란도를 바라보았다.
이에 오를란도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오를란도의 대답에 잠시 지급 전선을 바라보던 보좌관이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확실히 저건 갤리온과 비슷해 보이는군요. 북미왕국이 그저 인디언들 부족이 연합한 국가 같지는 않군요.”
분명 보좌관은 이곳에 도착해 부왕의 뜻을 오를란도에게 전하면서도 내심 북미왕국이 정말 그렇게 강력한 국가인지 의심스러워했다.
이 때문에 절대 자신의 보고가 과장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병사들의 면담까지 주선해야 했던 오를란도가 살짝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누누이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외모만 비슷할 뿐이라고.”
하지만 보좌관은 별다른 사과 없이 가까이 다가온 북미왕국의 함대를 바라보다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오를란도를 보고 물었다.
“헌데 저들의 함대 규모가 좀 작아 보이는데? 8척의 갤리온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처음 아카풀코를 공격할 때야 그랬지만...그 후 다시 이곳에 왔을 때는 갤리 5척뿐이었습니다. 그것을 볼 때 함대를 나누었겠지요.”
오를란도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자신의 추측을 이야기하자 보좌관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했다.
“하긴...저들 입장에선 큰 저항도 없었을 테니...”
이에 이들을 호위하고 있던 사뮤엘이 불편한 표정을 지었고 오를란도는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러나 보좌관은 그들에게 신경을 쓰기보다는 북미왕국의 함대를 관찰하다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헌데 저 갤리는 정말 특이하군요. 아니지. 갤리가 맞긴 한 겁니까? 돛도 노가 안 보이는데?”
이 물음에 오를란도는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처음에야 돛이 안 보이니 노를 사용하는 돌격선으로 생각해서 갤리라 부르긴 했습니다만...이전에 저들의 선박에 올라탔을 때 살펴보니 확실히 노가 안보이더군요. 아예 노를 꺼낼 공간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흐음...”
대체 무슨 동력으로 움직이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참으로 신기한 배라고 생각하며 한참을 바라보고 있을 때 보좌관의 귓가에 오를란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보트가 오는군요.”
이에 보좌관은 시선을 돌려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조그마한 보트를 보고 물었다.
“저 선박 위에서 협상한다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그럼 이제 협상을 하러 가시지요.”
* * *
“어? 자네는!”
보트를 타고 북미왕국의 함대 중 갤리온으로 짐작되는 선박에 올라탄 오를란도와 보좌관, 그리고 그들을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따라붙은 사뮤엘은 북미왕국 병사들의 안내를 받아 갤리온 뒤쪽의 선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선장실 안에 있던 한 에스파냐인을 보고 오를란도와 사뮤엘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을 알아보는 오를란도와 사뮤엘을 보고 에스파냐인은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눈시울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크윽...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를란도 시장님. 사뮤엘 부사령관.”
“자네!”
“로하스! 살아있었군!”
오를란도와 사뮤엘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다가가려 하자 선장실 벽 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북미왕국의 병사로 보이는 이들이 나서서 그들의 접근을 막았다.
그제야 이곳이 협상장임을 깨달은 오를란도와 사뮤엘이 움찔했을 때 선장실 한가운데 놓여있는 커다란 탁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중년 사내가 일어나 손을 들어 북미왕국의 병사들을 제지하며 입을 열었다.
“회포는 나중에 풀도록 하지요. 따로 시간을 내어 줄 테니.”
그러면서 자신들을 보고 미소 짓는 중년 사내를 보고 자신들의 실수를 깨달은 오를란도와 사뮤엘이 급히 뒤로 물러나며 사과했다.
“아...”
“이거 미안합니다. 결례를 용서해주시지요.”
오를란도가 중년 사내를 보고 사과하자 그는 웃으면서 오를란도에게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아닙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일단 앉으시지요.”
“배려에 감사합니다.”
오를란도는 이런 중요한 협상을 앞두고 자신이 실수했다는 생각에 안색이 살짝 굳어지면서 눈앞에 보이는 의자에 착석했다.
오를란도가 자리에 앉자 그의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던 중년 사내도 의자에 앉았고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반갑습니다. 본인은 북미왕국의 외무청 관리이자 이번 협상의 총 책임을 맡은 푸른 안개라고 하오.”
“푸른 안개라...반갑습니다. 본인은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의 대리로 이번 협상을 총 책임지게 된 오를란도라고 합니다.”
그렇게 통성명이 끝나고 잠시 서로를 응시하며 선장실 내부에 적막이 가득했을 때 아쉬운 것이 많은 오를란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북미왕국에 요청사항이 있습니다. 이번 협상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잠시 공격을 멈춰주었으면 합니다만...”
아카풀코 항에서 북미왕국을 기다리는 동안 누에바 에스파냐의 서해안이 정체불명의 함대에 공격받고 있다는 소식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해서 일단 이번 협상을 하는 도중만이라도 저들의 공격을 잠시 멈추길 원한 오를란도가 푸른 안개의 눈치를 살피며 이야기했다.
이에 푸른 안개는 흔쾌히 이 요청을 승낙했다.
어차피 대부분 항구를 모조리 불태운 지 오래였으니까.
“아...물론이오. 우리 북미왕국 역시 이 대륙에 무의미한 피가 흐르는 것을 원치 않는 만큼 이번 협상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잠시 휴전을 선언하오.”
이러한 푸른 안개의 대답에 선장실 안에 있던 에스파냐인들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오를란도는 푸른 안개에게 슬쩍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렇습니까? 자비에 감사합니다.”
이에 푸른 안개는 얼굴에 미소를 지우고 무표정한 얼굴로 오를란도를 응시하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소. 이는 우리가 에스파냐에 베푸는 자비인 만큼 이를 악용하지는 마시오.”
“알겠습니다.”
한 마디로 협상을 질질 끌면서 반격을 준비할 생각은 말라는 뜻이었고 이를 알아들은 오를란도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협상을 질질 끌고 반격을 하고 싶어도 현재 에스파냐는 그럴 능력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 오를란도의 표정을 살핀 푸른 안개는 그가 충분히 자신의 말뜻을 알아들었다고 판단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먼저 이번 전쟁의 원인은 전적으로 에스파냐에 있소. 이를 인정하오?”
이에 오를란도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과 함께 바로 입을 떼려다 잠시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런 모습에 오를란도 뒤에 서 있던 보좌관이 살짝 당황했다.
원래는 바로 에스파냐의 잘못임을 인정할 계획이었으니까.
헌데 오를란도가 머뭇거리자 왜 저러나 싶었던 것이다.
그때 오를란도가 조심스럽게 푸른 안개를 보고 입을 열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자마자 이런 요청을 해서 미안합니다만...잠시 휴식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저기 있는 로하스와 대화할 시간을 주었으면 합니다.”
“휴식?”
갑작스러운 휴식 요청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푸른 안개를 보고 오를란도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일단 북미왕국의 주장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에스파냐로선 에스파냐가 북미왕국을 먼저 공격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자리에는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만큼 그와 잠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오를란도는 푸른 안개 뒤에 서 있던 로하스를 바라보았다.
이에 푸른 안개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 요청을 허락하는 것이 나쁠 것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다시 한번 요청을 받아줌으로써 저들에게 마음의 빚을 지울 수도 있고 어차피 오늘 이 자리를 통해 모든 협상을 끝낼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로하스를 데려온 이유가 바로 저들과 만나게 해서 그가 알고 있는 북미왕국의 부정확한 정보를 알려 협상에서 이득을 취할 속셈이었고 이 때문에 오늘 협상을 적당히 진행하고 회포를 풀게 해준다는 명목으로 자리를 주선할 생각이었으니.
계산을 끝낸 푸른 안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음...알겠소. 그럼 잠시 시간을 드리리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푸른 안개.”
“아닙니다. 그동안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테니 이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시지요.”
그러면서 푸른 안개와 그를 호위하던 병사들이 선장실에서 나갔다.
그렇게 선장실에는 에스파냐인만 남게 되자 로하스는 눈물을 글썽이며 오를란도와 사뮤엘에게 다가와 그들을 부둥켜안았다.
잠시 뒤 로하스가 어느 정도 진정되었을 때 사뮤엘이 먼저 로하스에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건가? 설마 자네 혼자만 살아남은 것은 아니겠지?”
이에 로하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북미왕국에 꽤 많은 에스파냐인이 포로로 잡혀있네. 300명이 넘어.”
“300명? 그렇게 적다고?”
분명 포로의 수가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북미왕국과 충돌했던 교역 선단의 규모를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하고 있던 사뮤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로하스가 대답했다.
“수많은 에스파냐인이 주님의 곁으로 갔다네.”
그런 로하스를 보고 사뮤엘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색을 굳히며 물어보았다.
“...설마 저들이 포로를 인신 공양한 것은 아니겠지?”
인신 공양이라는 말에 로하스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비록 저들의 겉모습이 인디오와 비슷해 보이지만 저들 북미왕국은 문명국일세. 우리가 저들에게 포로가 된 후 비록 자유는 잃어버렸지만 지내는 데는 큰 불편함은 없었네. 그저 북미왕국과 충돌했을 때 너무 강력한 저들의 화력에 충성스러운 에스파냐 병사들이 수장되었을 뿐이네.”
로하스의 말에 그 화력을 직접 경험해보았던 오를란도와 사뮤엘이 머릿속에서 북미왕국의 함대와 맞서 싸우다 수장된 에스파냐 병사들을 떠올리며 침음을 삼켰다.
“으음...”
그때 뒤쪽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보좌관이 끼어들었다.
“에스파냐를 위해 죽은 병사들이 무척 안타깝긴 합니다만...죽은 자들에 대한 애도는 나중에 하도록 합시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북미왕국의 정보이지요. 로하스 함장이지요? 일단 당신이 파악한 북미왕국의 정보를 모두 이야기해주었으면 합니다.”
오를란도와 사뮤엘은 살짝 불쾌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베일에 가려진 북미왕국의 정보는 무척 중요했기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로하스를 바라보았다.
이에 로하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이 파악하고 있는 북미왕국의 정보를 이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제가 파악한 북미왕국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