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뭐? 협상 제의를 했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경하드립니다.”
“허어...”
정성국은 임시 보급항 안쪽에 건설된 자신의 임시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가 이정운 함장이 이끄는 함대가 임시 보급항으로 돌아왔다는 보고에 날짜를 계산해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빨리 돌아왔기에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 급히 이정운 함장을 불러들였고 곧 이정운 함장이 정성국의 집무실로 들어와 고개를 숙이며 아카풀코 항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이를 듣고 정성국은 오히려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지 이건? 함정인가? 에스파냐가 고작 몇 대 맞았다고 바로 협상을 제의한다고?‘
정성국이 이정운 함장이 전한 말을 듣고 처음으로 떠올린 것은 바로 협상을 빌미로 시간을 끌며 함대를 이동할 시간을 버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에스파냐가 원주민 국가로 추정되는 북미왕국에 고작 몇 대 맞았다고 바로 백기를 들어 올리며 협상을 제의한다니.
아무리 제대로 타이밍을 노려 뒤통수를 후려갈겼다고 해도 그게 가능한가 싶었으니까.
하지만 이정운 함장의 보고와 그가 건네준 부왕의 친서를 외무청 관리가 대신 읽어주자 저들이 원하는 것이 종전 협상임을 파악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정성국은 에스파냐와 전쟁을 결정하면서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북미왕국의 무기라던가 에스파냐의 현 상황을 고려한다면 아무리 북미왕국의 체급이 작다지만 충분히 해볼 만했다.
그렇기에 전쟁을 결정한 것이고.
다만 에스파냐의 체급이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었기에 피해를 줄이기 위해 어떻게든 바다에서만 상대하려 했다.
그렇게 에스파냐를 압박해서 결국 저들을 협상장으로 끌어들여 이번 전쟁의 궁극적인 목적인 영토 협상을 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고 저들이 백기를 들어 올리고 종전 협상을 원하고 있으니 이미 목표를 절반 이상 달성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정성국은 기쁜 표정보다는 오히려 당황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고작 선제공격을 감행한 후 2주 만에 에스파냐가 협상을 제의하리라고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아무리 현재의 에스파냐가 한창 쇠퇴하고 있다고는 하나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원조 아니었던가.
정성국은 당황하면서도 머릿속으로 생각을 이어나갔다.
’아카풀코 항과 멕시코 시티 간의 거리를 생각해보면 아카풀코 항이 공격받았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부왕이 협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건데...이걸 어떻게 판단해야 하나? 에스파냐의 상황이 많이 안 좋나? 정체불명의 적이 나타나 공격했는데 반격은 생각하지 못하고 바로 백기를 들어 올릴 정도로?‘
정성국은 분명 전생의 역사를 대략 알고 있었기에 이 시기 에스파냐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지금 에스파냐의 왕은 일명 바보 왕이라고 불렸던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왕인 카를로스 2세였으니까.
그렇기에 에스파냐가 자신들과의 전쟁을 길게 끌지는 못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에스파냐의 이런 신속한 반응은 정성국이 보기에도 의외였다.
이러한 에스파냐의 반응은 그만큼 에스파냐의 상황이 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나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아니면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이 굉장히 겁이 많거나 유능할 수도 있지. 하지만 아무리 부왕이 겁이 많다고 해서 곧바로 이렇게 협상을 제의한다? 주변의 신하들도 있을 텐데? 결국, 부왕이 유능하고 거기에 자존심보다 실리를 내세우는 성향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 괜히 길게 끌어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판단에 바로 협상을 결정했다면...그건 좀 무서운데?‘
아무리 정성국의 기억력이 대단하다지만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이 어떤 사람인지 알 도리는 없었다.
다만 작년에 에스파냐 포로들에 의해 본국에서 새로운 부왕이 임명되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을 뿐.
헌데 그 부왕이 생각보다 냉철하고 계산이 빠른 사람인 것 같았다.
이에 정성국은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나쁠 것은 없다는 판단이 들어 슬쩍 미소를 지었다.
’나쁠 것은 없지. 오히려 협상에 있어서는 호재다. 에스파냐의 상황이 그렇게 나쁘다면 더 몰아붙여서 이득을 극대화할 수 있고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이 냉철하고 계산이 빠르다면 고작 명목상의 영토에 집착하진 않겠지.‘
이번 원정의 목표는 에스파냐에 북미왕국의 힘을 보여주고 영토 협상을 통해 제대로 된 국경선을 긋는 것이다.
그리고 정성국이 생각하고 있는 북미왕국과 에스파냐의 국경선은 전생의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선과 비슷했다.
리오그란데강과 북위 31도를 기준으로 국경선을 긋고 국경선 위쪽의 에스파냐가 가지고 있던 모든 권리를 넘겨받을 생각이었다.
에스파냐가 정말 자신들이 떠드는 것처럼 실제 북아메리카 지역을 어느 정도 장악하고 있다면 절대 허락할 리 없겠지만 북미왕국이 원하는 대로 국경선을 긋는다 해도 에스파냐가 실질적으로 포기해야 하는 것은 기껏해야 푸에블로 족을 식민 통치하고 있는 뉴멕시코의 산타페 지역이나 플로리다의 산아구스틴 지역 정도만 포기하면 되는 문제였기에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 외에 전생의 애리조나 남부와 멕시코 북부의 경계의 몇몇 마을과 약간의 선교지 정도는 에스파냐가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으리라 판단했고.
정 반발한다면 적당히 국경선이야 조정하면 그만이니.
애당초 북위 31도를 기준으로 국경선을 그은 것도 정성국의 편의에 따라 그은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한참 정성국이 머리를 굴리며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의아한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던 이정운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아. 미안하네. 에스파냐의 반응이 조금은 예상외라서 그렇다네. 그래도 꽤 강대한 제국인데 이렇게 신속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고 해야 할까?”
그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정성국의 반응에 이정운 함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확실히 그렇습니다. 저들의 의사결정이 몹시 신속한 모양입니다.”
이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럼 우리도 신속하게 결정을 해야겠지. 일단 자네가 직접 아카풀코 항으로 가서 이번 협상을 받아들이겠다고 전하게. 그리고...으음...”
저들이 협상장에 앉겠다고 한 이상 바로 협상을 진행하는 것이 북미왕국에도 좋았기에 협상을 맡길만한 인물을 떠올려보았지만 아쉽게도 현재 정성국이 데려온 외무청 관리들은 단순히 통역사로 데려온 하급 관리들뿐이었다.
이들에게 협상의 전권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그렇다고 정성국이 직접 협상에 나설 수도 없었기에 혀를 찼다.
’아마 지금쯤이면 외무청의 고위 관리가 에스파냐의 포로를 대동하고 출발했을 것 같긴 한데...‘
외무청의 고위 관리들은 대추장들이었고 이들은 워낙 일이 많았기에 함께 출발하기보다는 조금 뒤늦게 따라오기로 했다.
이에 정성국은 이정운 함장을 보며 입을 열었다.
“당장은 협상에 나설 인물이 없으니 정식 협상은 지금으로부터 2주 후 아카풀코 해안의 지급 전선 위에서 하자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전하.”
이정운 함장이 정성국의 명령에 급히 집무실을 나가자 정성국은 호위대장을 바라보며 추가로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호위대장. 자네는 교대로 출항할 예정이었던 함대를 일단 대기시키고 인급 전선 한 척을 일단 통바 족의 영역으로 급파하게. 아마 지금쯤이면 외무청에서 협상을 맡을 대추장이 도착했을 것 같기는 한데...만약 없다면 새김포까지 가서 바로 데리고 오도록.”
“알겠습니다. 전하.”
* * *
정성국이 외무청 관리를 노심초사 기다리고 있을 무렵 선착장에서 보고가 들어왔다.
보급품을 운송하던 인급 전선을 타고 외무청의 고위 관리와 에스파냐가 도착했다고.
이에 정성국은 곧바로 외무청의 관리를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집무실에 도착한 얼굴을 보고 당황했다.
“어? 장인어른께서 왜?”
푸른 안개는 그런 정성국의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강녕하셨습니까. 전하.”
이에 정성국은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푸른 안개의 어깨를 잡고 일으키면서 당황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설마 이번 에스파냐와의 협상을 장인어른께서 맡으실 생각입니까?”
이에 푸른 안개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이번 협상을 맡은 배경을 이야기했다.
“그렇습니다. 전하. 제가 이번 협상을 맡는 것이 적합하다고 다른 대추장들 역시 동의했습니다. 최소한 이번에 데려온 에스파냐인은 제가 왕의 장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이지요.”
정성국은 이번 협상을 외무청장인 조용한 곰이나 웅크린 늑대가 맡지 않을까 예상했었는데 자신의 장인인 푸른 안개가 오자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푸른 안개의 말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었다.
왕의 장인으로 알려진 푸른 안개가 직접 나선다면 북미왕국이 그만큼 이번 협상을 신경 쓴다는 것을 알릴 수도 있었고.
거기에 원주민인 푸른 안개가 왕의 장인이라는 것이 에스파냐에 알려진다면 북미왕국은 결국 원주민들이 세운 나라로 판단할 테니 말이다.
물론 나중에야 제대로 된 정보가 알려지겠지만 당장은 왜곡된 정보로 영토 협상에서 명분을 챙길 기회였다.
다만 푸른 안개를 걱정하는 마음에 당부했다.
“아...이해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장인어른. 다만 위험하니 절대로 지급 전선을 벗어나지 마십시오.”
자신을 걱정하는 사위의 모습에 푸른 안개는 인자하게 웃었다.
“하하.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그런 푸른 안개를 보고 호위대장을 통해 따로 푸른 안개에게 호위 대원을 붙여야겠다는 생각을 한 정성국이 일단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럼 대략적인 상황은 이렇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진행된 작전들의 설명과 더불어 아카풀코를 불태우려 출항했던 함대가 가져온 협상 소식과 부왕의 편지를 보여주자 이를 유심히 살펴본 푸른 안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흐음...예상외군요. 이렇게 손쉽게 에스파냐가 협상을 제의할 줄은.”
그러면서도 정성국을 보고 감탄스러운 표정을 짓는 푸른 안개였다.
정성국이 이번 전쟁은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누누이 이야기했었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또 에스파냐가 이렇게 빨리 협상을 제의할 것이라곤 미처 예상치 못한 푸른 안개였다.
특히 에스파냐 포로들에게 말을 배우며 그들에게 에스파냐의 정보를 파악한 외무청 관리들은 이번 전쟁이 절대 쉽지만은 않으리라고 생각했었고.
헌데 이런 일방적인 결과가 나오자 정성국이 새삼 대단해 보일 수밖에.
그런 푸른 안개의 표정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정성국이 한쪽에서 지도를 가져오면서 말했다.
“그렇지요. 그만큼 저들의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뜻일 수도 있으니 나쁠 것은 없다고 봅니다.”
이에 푸른 안개는 정신을 차리고 정성국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겠지요. 그럼 정확한 전하의 의중을 듣고 싶습니다.”
푸른 안개의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무실 탁자 위에 북미지역의 지도를 펼쳐놓고 미리 정성국이 표시해두었던 국경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 선을 기준으로 북쪽을 우리 북미왕국의 영토로 만드는 것이 목적입니다. 정확히는 이곳에 에스파냐가 가지고 있는 모든 권리를 넘겨받는 것이지요. 이 표현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해했습니다. 전하. 그래야만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반발을 무마할 수 있겠지요.”
“정확합니다.”
자신의 속내를 정확히 파악한 푸른 안개를 보고 정성국이 미소짓고 있을 때 푸른 안개가 한참 동안 지도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흐음...쉽지 않겠군요. 일단 에스파냐인들은 이 북미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이에 정성국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충분히 협상 가능하리라 봅니다. 앞으로 북쪽으로 확장하지 못한다는 것과 북미지역에 개척한 산타페와 산아구스틴만 포기하면 되는 문제니까요. 그 외에 자잘한 마을들은 뭐...그리고 이 국경선은 필요하다면 조금씩 수정해도 괜찮습니다. 대략적인 기준선일 뿐이에요.”
실질적으로 에스파냐가 포기해야 하는 것은 이미 북미지역에 개척한 두 도시 외에는 없었기에 푸른 안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알겠습니다. 전하. 최대한 전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협상을 진행해나가겠습니다.”
“아. 그리고 저들이 반발한다면 플로리다반도는 포기해도 좋습니다.”
그러면서 정성국은 플로리다반도 위에 수직으로 선을 하나 그었다.
이를 보고 푸른 안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차피 이곳을 저들에게 넘겨받는다 하더라도 당분간은 방치할 수밖에 없겠군요.”
정성국은 푸른 안개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지도에서 텍사스 지역을 손으로 짚었다.
“그렇지요. 최소한 이 텍사스 지역에 제대로 된 조선소를 만들고 배를 충분히 건조하기 전에는 방치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당장 이곳 동해안에 자리 잡은 잉글랜드의 남하까지 생각하면 이곳은 오히려 에스파냐의 영토로 남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니 저들이 우리의 제안에 반발하면 슬쩍 물러나는 척하면서 이곳은 포기하세요. 그럼 저들이 포기하는 것은 산타페와 자잘한 마을 뿐이니 그 정도면 별다른 불만은 없을 겁니다. 그 마을도 문제를 삼는다면 적당히 국경선을 조정하면 될 테구요.”
그 정도면 에스파냐도 별 무리 없이 받아들일 거로 생각한 푸른 안개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플로리다반도를 손으로 짚으면서 물었다.
“허면 플로리다지역은 영영 포기하실 생각이십니까?”
이에 정성국은 씩 웃으면서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일단은 맡겨두었다가 나중에 가져오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