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이정운 함장은 작년에 운 좋게 정기선을 호위하던 중에 에스파냐의 교역 선단과 교전해 공을 세웠고 덕분에 이번 5척의 인급 전선으로 구성된 함대의 총 책임자가 되었다.
이에 이정운 함장은 무척이나 의욕적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함장 정도 되면 어느 정도 정보를 공유하고 상황 판단도 가능하기에 제대로 된 해전은 없으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거기에 아카풀코 항 북쪽의 해안가는 이미 초토화했기에 딱히 할 일도 없었고.
그나마 이정운 함장이 다행으로 생각하는 것은 다른 함대보다 먼저 출항한다는 점이었고 덕분에 아카풀코 항을 공격할 기회를 얻었다는 점이었다.
‘어차피 인급 전선의 항속 거리를 생각한다면 아카풀코 공격이 마지막으로 공을 세울 기회다. 아카풀코 항까지 공격하고 나면 에스파냐인들이 협상을 요청할 때까지 그저 위협할 겸 돌아다니는 것이 전부지.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해.’
이 때문에 이정운 함장은 화포장들을 불러 몇 번이고 당부했다.
정신 단단히 차리라고.
“첫 번째 목표는 산 디에고 요새다. 분명 저들은 요새를 비웠을 테니 그냥 훈련 표적에 불과하겠지. 하지만 명심해라. 그 요새를 단번에 무너뜨려 저들에게 우리 북미왕국의 힘을 보여줘야 한다. 특히 저번과는 달리 이번 공격은 인급 전선 5척만으로 공격하는 만큼 요새를 단숨에 무너뜨리려면 제대로 명중시켜야 한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바로 대답하는 화포장들을 쭉 훑어본 이정운 함장이 낮은 목소리로 슬쩍 강조했다.
“만약 이번에도 저번 교전처럼 명중탄이 적다면 이후에 훈련 강도를 더욱 올릴 생각이다. 명심하도록.”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한 화포장들이 사색이 되었다.
첫 탄에 명중시키지 못한다면 대놓고 갈구겠다는 뜻이었기에 속으로는 울상을 하며 병사들을 단단히 준비시켜야겠다고 생각한 화포장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함장님!”
그렇게 이정운 함장 덕분에 인급 전선 5척으로 구성된 함대는 아카풀코 항으로 이동하는 중에도 포격 훈련을 하며 독기가 잔뜩 올라 아카풀코 근처에 도착했다.
그리고 에스파냐인들과 약속한 2주가 되기까지 근처를 돌아다니면서도 계속해서 강도 높은 포격 훈련을 해서 명중률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했고.
마침내 에스파냐인들과 약속한 2주의 시간이 지나자 이정운 함장은 함대에 명령을 내렸다.
단숨에 아카풀코 만 안으로 들어가 먼저 산 디에고 요새를 무너뜨리라고.
그동안 이정운 함장에게 시달렸던 병사들은 독기를 품고 곧 시작될 포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훈련 지옥을 경험하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첫 탄에 명중시켜야 해!’
‘최소한 두 번째 탄 안에 포탄의 태반을 요새에 꽂아 넣어야지!’
화포장들이 긴장하면서 표적이 보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2주 만에 다시 도착한 아카풀코 항을 망원경을 통해 바라보고 있던 이정운 함장의 표정은 기묘했다.
무언가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싶은 표정.
그때 견시수가 확인해줬다.
“함장님! 산 디에고 요새에 아주 커다란 백기가 걸려있습니다!”
네가 본 게 맞다고.
이정운 함장은 마지막으로 전공을 세울 기회가 사라졌음을 직감하며 한숨을 내쉬며 망원경에서 눈을 뗐다.
그러자 옆에 대기하고 있던 부함장이 이정운 함장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예정대로 공격할까요?”
이정운 함장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들이 백기를 들어 올린 이상 그럴 수는 없지. 일단 저들이 왜 백기를 들어 올렸는지부터 알아봐야겠지. 자네는 일단 함대에 대기 신호를 보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함장님.”
“그리고 외무청 관리를 불러오게.”
* * *
“이 함대를 책임지고 있는 이정운 함장이오.”
“아카풀코 항의 시장인 오를란도입니다.”
요새에 걸려있는 백기를 확인한 이정운 함장은 일단 함대에 대기 신호를 보내고 외무청 관리를 보트에 태워 아카풀코 항으로 보내 백기를 든 이유를 파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외무청 관리는 보트를 타고 아카풀코 항으로 접근했고 그곳에서 이미 대기하고 있던 오를란도를 만났다.
오를란도는 2주 전 북미왕국이 물러나자 곧바로 멕시코 시티에 전령을 보낸 이후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런 오를란도에게 부왕의 명령이 담긴 편지가 전령을 통해 도착했고 이를 읽어본 오를란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북미왕국과 맞서봐야 좋을 것은 없어 보였으니까.
다만 협상이 어찌 될지는 모르는 만큼 일단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임시로 대피시킨 후 자신은 사뮤엘과 몇몇 병사들과 함께 이곳 아카풀코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산 디에고 요새에 멀리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백기를 달아두고.
그리고 약속된 2주가 지나기 무섭게 아카풀코 만 입구에 무언가가 보인다는 병사의 보고에 북미왕국의 함선임을 직감하고 전에 북미왕국과 협상을 했던 산 디에고 요새 인근의 해안가에 나왔고.
그렇게 오를란도는 다시 북미왕국의 외무청 관리와 만났고 요청했다.
저 함대의 총 책임자에게 전해야 할 내용이 있다고.
이에 외무청 관리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이고 오를란도와 호위의 명목으로 따라붙은 사뮤엘을 데리고 인급 전선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인급 전선에서 오를란도와 사뮤엘은 자신을 뚱하게 쳐다보고 있던 이정운과 만났다.
“그래.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나에게 전해야 할 말이 있다고?”
미처 배를 다 둘러볼 여유도 주지 않고 대뜸 외무청 관리를 통해 자신을 소개한 후 바로 본론에 들어가는 이정운이었다.
이에 오를란도는 나쁠 것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바로 본론이라...좋습니다. 멕시코 시티의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 전하께서 북미왕국과의 오해를 풀고자 협상을 제의하셨습니다.”
“오해?”
외무청 관리의 통역을 듣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 이정운 함장을 보고 오를란도는 내심 긴장하면서도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렇습니다. 분명 우리 누에바 에스파냐는 북미왕국을 선제공격할 의사가 없었으니까요.”
“흐음...”
이정운 함장이나 외무청 관리는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기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그런 저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오를란도가 내심 쾌재를 부르면서도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는 북미왕국의 존재를 몰랐기에 벌어진 안타까운 비극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비극 때문에 더 큰 비극이 발생한 셈이고요. 이 때문에 부왕께서는 협상을 제의하셨습니다.”
“끙...”
오를란도의 말이 끝나자 이정운 함장은 난처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애당초 자신은 나라 간의 협상을 결정할만한 권한이 없었기에.
그 때문에 이정운 함장은 오히려 옆에서 통역하는 외무청 관리를 바라보며 혹시 당신은 권한이 있지 않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외무청 관리는 그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은 그저 통역일 뿐, 아무런 권한이 없음을 표현했다.
이정운은 출항 전 정성국에게 아무런 언질을 받지 않았기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북미왕국의 최종 목표는 결국 에스파냐를 이 신대륙에서 몰아내는 것이 아닌 최대한 압박을 가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영토 협정을 맺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정운 함장이었기에 답은 정해져 있었다.
공격을 멈추고 이들의 제의를 최대한 빨리 임시 보급항에 있는 정성국에게 전해야 한다는 것.
“좋소. 다만 난 지금 이 자리에서 누에바 에스파냐와 협상을 결정할만한 위치가 아니니 일단 위쪽에 보고하도록 하지.”
이정운의 대답에 오를란도와 사뮤엘의 안색은 밝아질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오를란도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요청했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기다리도록 하지요. 그리고 덧붙이자면 협상이 결정될 때까지는 자비를 베풀어주셨으면 합니다만...”
“흠...”
오를란도의 요청에 이정운 함장은 잠시 고민했지만, 북미왕국의 목표를 잘 알고 있는 만큼 협상에 해가 될 수 있는 행동은 최대한 자제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좋소. 다만 협상이 완료될 때까지 선착장의 재건은 불허하오. 만약 당신들이 선착장을 재건하려 든다면 우리는 반격으로 생각하고 공격하겠소.”
조건부 허락이었지만 이를 듣고 안색이 밝아진 오를란도와 사뮤엘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건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께서 보내는 친서입니다.”
그러면서 오를란도는 품에서 봉인된 편지를 꺼냈고 이정운 함장은 일단 저들의 왕이 보낸 편지라는 말에 정성국에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 편지를 건네받았다.
그렇게 자신들이 북미왕국과 협상해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어낸 오를란도는 밝은 표정으로 인급 전선에서 내렸고 그 모습을 보고 허탈해진 이정운 함장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부함장을 보고 명령했다.
“후우...뱃머리를 돌려라. 임시 보급항으로 최대한 빠르게 이동한다.”
“...알겠습니다. 함장님.”
* * *
“이곳이로군.”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총 함장님.”
김봉길은 지급 전선의 갑판 위에서 마침내 도착한 파나마 항을 바라보았다.
파나마 항은 꽤 큰 편이었고 그 때문인지 정박하고 있는 선박들도 꽤 많았다.
그리고 북미왕국의 함대를 보고 몹시 부산스러웠고.
특히 갤리온으로 짐작되는 정박해 있던 커다란 배 2척이 급히 닻을 올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를 보고 김봉길이 그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기 저 배들은 갤리온 같군.”
“알겠습니다. 첫 번째 목표로 삼겠습니다. 바로 공격할까요?”
이에 김봉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저들이 반격할 틈을 주지 말자고.”
“알겠습니다.”
김봉길의 명령에 이 지급 전선의 함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있던 부함장을 통해 명령을 내렸다.
김봉길이 타고 있던 지급 전선에 붉은 깃발이 올라오자 함대가 일제히 빠른 속도로 파나마 항의 선착장에 다가가기 시작했고 100m 정도 남았을 무렵 일제히 돛을 접고 기관으로만 움직이며 선회했다.
이를 보고 포격을 짐작한 갤리온 위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이 김봉길에게까지 들릴 정도라 피식 웃었다.
퍼퍼퍼퍼퍼펑!
선회가 끝나자 곧바로 포격이 시작되었다.
콰콰쾅!
그리고 지급 전선으로 구성된 함대의 일제 포격에 갤리온 한 척이 포탄에 맞아 갑판 위가 엉망이 되는 것이 보였고 이를 보고 김봉길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하면 된다니까? 전에 보인 추태는 다 훈련이 부족해서 그런 거야. 이제부터 훈련 강도를 더 높여야겠어.”
열심히 갑판 밑의 포 갑판에서 포를 쏘는 병사들이 들었다면 기겁할만한 소리를 하는 김봉길이었고 유일하게 그 말을 들었던 지급 전선의 함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퍼퍼퍼퍼퍼펑!
다시금 포격이 시작되었고 몇 발의 포탄이 폭발해 갑판 위가 박살이 나 있던 갤리온에 틀어박혔고.
콰콰콰쾅!
포탄이 터지면서 갤리온 안의 화약이 유폭되었는지 커다란 굉음과 함께 침몰해버렸다.
그리고 남은 갤리온 한 척은 간신히 선착장을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지급 전선의 포격에 결국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침몰당했다.
그 광경을 보고 다른 선박들은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려 애를 썼지만, 지급 전선에서 포탄이 틀어박히는 족족 터져나가자 결국 선원들이 포기하고 배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파나마 항 주변은 불타오르는 연기만이 가득했고 순조롭게 임무를 완수한 김봉길은 웃으면서 명령을 내렸다.
“자. 이제 돌아가도록 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