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안토니오 부왕의 말에 보좌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부왕전하. 아시아와의 무역이 끊기는 것은 물론이고 신대륙 각지에서 산출되는 은의 운송에 차질이 생길 겁니다. 문제는 부왕전하의 말씀처럼 딱히 대응할 방법이 없다는 점입니다.”
신대륙 각지에서 산출되는 은은 바다를 통해 운송된다.
헌데 북미왕국에 의해 서해안의 항구가 모조리 불타오른다면 은을 캐도 가져올 방법이 없었다.
이런 사태가 길어진다면 누에바 에스파냐에도, 본국에도 몹시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집무실 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안토니오 부왕이었고 마침 그때 행정관이 안색이 창백한 표정으로 집무실로 달려와 소리쳤다.
“부왕전하! 만사니요 항이 정체불명의 적에게 공격받았다는 소식입니다!”
행정관이 아카풀코의 북서쪽에 위치한 만사니요 항이 공격받았다는 소식을 알리자 북미왕국의 소행임을 직감한 안토니오 부왕이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행정관의 보고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보좌관이 안토니오 부왕을 바라보았다.
“어쩌지요?”
이에 안토니오 부왕은 고심하다 탁자 위에 올려진 편지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정말 이 편지에 적힌 내용과 전령의 말을 신뢰한다면 현재 우리의 무력으로 저 북미왕국을 막긴 어렵지.”
그러면서도 안토니오 부왕은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한탄했다.
‘신이 에스파냐를 버린 건가? 왜 하필 이 타이밍에 쳐들어와서...’
물론 북미왕국이 에스파냐의 상황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공격한 것은 아닐 것으로 생각한 안토니오 부왕이었다.
오를란도가 보내온 편지에 따르면 아마도 작년의 교역 선단과 충돌해서 더는 참지 못하고 쳐들어온 것으로 보인다니 말이다.
하지만 현 상황을 보자면 북미왕국은 마치 에스파냐가 취약해진 시기를 노리기라도 한 듯 절묘한 타이밍을 잡아 공격한 셈이었고 덕분에 에스파냐로선 어떻게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지요.”
“그럼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지.”
그러면서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안토니오 부왕을 보며 보좌관이 어두운 표정으로 대신 입을 열었다.
“...협상이군요. 하지만 부왕전하. 현재 본국의 정치 상황이 무척 혼란스럽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본국에 아무런 보고도 하지 않은 채 바로 저들과 협상을 한다면 분명 문제가 생길 겁니다. 특히 돈 후안이 꼬투리를 잡을 수도 있습니다.”
북미왕국은 분명 자신들이 먼저 선제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현 상황을 에스파냐의 관점에서 보자면 에스파냐가 일방적으로 공격받은 상황이었다.
헌데 제대로 맞서지도 못하고 바로 협상을 한다는 것은 문제가 생길 여지가 무척이나 컸다.
특히 섭정이 되지 못한 후안 호세가 현 섭정인 마리아나를 못마땅해하는 지금 상황이라면 더욱 말이다.
아마 이 소식이 에스파냐에 전해진다면 돈 후안은 에스파냐 전역에 고작 인디오들에게 에스파냐가 굴복했다고 소문을 퍼트릴 수도 있었다.
현 에스파냐의 실정은 현재 에스파냐의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총신의 실정이고 이는 결국 총신을 임명한 마리아나 역시 책임이 없지는 않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안토니오 부왕이 직접 북미왕국과 협상을 주도한다면 일을 마무리 지어도 후에 정치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보좌관이 이를 상기시키자 안토니오 부왕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이 사태가 장기화되면 누에바 에스파냐뿐만 아니라 본국에도 타격이 갈 텐데 시간을 끌라는 소리인가? 그럴 수는 없네.”
안토니오 부왕은 최소한의 애국심은 있었다.
자신의 부왕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에스파냐를 더욱 몰락시킬 수는 없었다.
에스파냐는 현재 적자에 허덕이고 있었다.
전 왕이었던 필리페 4세 시절 30년 전쟁에서 막대한 전비를 소모했고 각지에 반란이 일어나 이를 제압하기 위해 다시 군을 동원했었으니.
그런 상황에서 이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지 않고 본국으로 떠넘기는 순간 사태는 장기화될 것이다.
당연히 그동안 에스파냐의 수입은 급감할 테고 에스파냐의 몰락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고 생각한 안토니오 부왕이었다.
그리고 안토니오 부왕은 이 몰락에 일조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차라리 본국에서 문제를 제기한다면 책임을 지고 부왕자리에서 물러나면 그만이었지.
그런 안토니오 부왕의 결정에 보좌관과 마일로는 그의 애국심에 존경을 표하며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안토니오 부왕은 그 모습을 보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내 결정을 이해해줘서 고맙군.”
“아닙니다. 부왕전하.”
“그럼 이제 협상에 관한 이야기를 하세. 문제는 일단 저들과 협상을 해야 한다는 건데...가능할까?”
이에 보좌관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분명 아카풀코 항에서 오를란도와 협상을 했었으니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모든 항구에 전령을 보내 북미왕국의 함대를 발견하면 백기를 들어 올리고 협상할 의사를 표현하면 될 것 같습니다만...”
“흠...”
보좌관의 말에 안토니오 부왕이 고개를 끄덕일 때 옆에서 듣고 있던 마일로가 첨언했다.
“아카풀코 항은 2주의 시간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만큼 2주 후에는 다시 북미왕국의 함대가 아카풀코로 오지 않겠습니까?”
“아! 그렇군! 그때 협상을 하자고 제의할 수 있겠어!”
“그렇습니다. 부왕전하.”
이에 안토니오 부왕이 마일로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럼 바로 오를란도에게 편지를 보내도록 하지. 그는 한번 북미왕국과 협상을 해 보았으니 그에게 일단 협상을 맡기도록 하지. 그리고 따로 내가 북미왕국의...뭐 나라라고 했으니 국왕인가? 아무튼, 그에게도 친서도 보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부왕전하.”
마일로가 고개를 숙이자 안토니오 부왕은 옆에 있던 자신의 보좌관에게도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 다른 항구에도 연락을 보내게. 이 문장이 그려진 깃발을 달고 접근하는 대규모 함대가 보이면 일단 백기를 들어 올리고 누에바 에스파냐는 당신들과 협상할 의사가 있다고 말일세.”
그러면서 편지 중간에 있는 삼태극 문양을 가리키자 보좌관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부왕전하.”
“자. 그럼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도록 하게. 저들이 항구를 공격하기 전에 서해안의 모든 항구에 알려야 하네. 어차피 협상하기로 했으니 최대한 피해를 줄여야지.”
안토니오 부왕의 재촉에 마일로와 보좌관이 집무실을 나섰다.
그러자 한적해진 집무실 안에서 안토니오 부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갑자기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 * *
정성국이 함대를 이끌고 임시 보급항에 도착했을 때 임시 보급항은 무척이나 북적였다.
기존의 임시 보급항을 방어하던 경비대 1천 명에 김봉길이 지휘하는 함대의 지급 함선에 타고 있던 해군 1천 명 정도가 임시 보급항에서 대기하고 있는 상태에서 정성국과 함께 움직였던 함대가 도착한 셈이었으니.
이 때문에 정성국은 임시 보급항에 도착하자마자 남아도는 병사들을 지휘해서 임시 보급항을 확장했다.
동시에 정성국과 함께 임시 보급항에 도착했던 함대를 다시 3개 함대로 나누었다.
5척의 인급 전선으로 구성된 2개 함대는 번갈아 가면서 누에바 에스파냐의 서해안을 공격하게 했다.
물론 이번에 아카풀코 항을 기준으로 북쪽은 완전히 초토화했지만 누에바 에스파냐가 항구를 재건할 수도 있었기에.
더불어 원주민들을 동원해 대량으로 배를 건조할 수도 있었으니 멕시코 지역 서해안을 돌아다니면서 누에바 에스파냐에 압박을 가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장기전을 대비해 남은 3척의 인급 전선은 통바 족의 영역으로 올려보내 아직 남아있는 보급 물자를 가져오도록 했고.
남은 지급 전선 한 척은 이곳 임시 보급항에 머물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로 했다.
정성국이 생각하기에는 이미 아카풀코를 기준으로 북쪽의 항구와 선박들이 모조리 불타올랐기에 굳이 방어를 위해 지급 전선을 남겨둘 필요는 없어 보였지만 호위대장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 * *
로하스는 갑판 위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주변의 풍경을 관찰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생각보다 역동적이군. 그리고 기존의 원주민들과는 전혀 다르고. 이 항구는 3년 전에 얼핏 보았던 바로 그 항구 같은데...어째 더 커진 것 같군.’
로하스는 잠시 보급을 위해 들린 새김포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로하스는 비록 광산촌에서만 지냈다지만 현재 북미왕국에 무언가 중요한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것도 에스파냐와 관계된.
그동안 광산촌에서 말을 배우던 외무청 관리 대부분이 자리를 비웠으니 당연히 그렇게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광산촌에 사는 에스파냐인들은 모두 북미왕국과 에스파냐가 충돌한 것이 아닌가 걱정했다.
그러한 짐작에 로하스나 후엔, 니콜라스 등은 더욱 안색이 나빠졌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경험했던 북미왕국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기에 과연 누에바 에스파냐가 북미왕국을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니콜라스가 전해준 최근 본국의 사정은 한숨만 나왔으니까.
이 때문에 광산촌의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다.
정말 이들의 예상대로 에스파냐와 북미왕국이 충돌하게 되면 조국의 앞날뿐 아니라 자신들의 미래도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덕분에 로하스나 후엔이 광산촌을 추스르는 데 여념이 없을 무렵 북미왕국에서 로하스를 불러냈다.
통역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이를 듣고 로하스는 의아하긴 했다.
외무청 관리들은 이미 유창하게 에스파냐어를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광산촌을 나갈 기회였을뿐더러 자신이 통역을 맡는다는 소리는 달리 말하면 에스파냐 인과 접촉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이에 후엔이나 니콜라스도 동의하며 광산촌은 신경 쓰지 말고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당부했고.
그렇게 3년 만에 광산촌을 나와 외무청 관리와 병사들의 감시 속에 북미왕국의 신기한 배를 타고 이동한 로하스는 포로로 잡혔을 때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북미왕국의 분위기를 파악하느라 정신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때 그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그렇게 재미있게 보시는가?”
“어? 푸른 안개!”
로하스가 고개를 돌리자 막 정기선에 올라탄 푸른 안개가 로하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로하스는 오랜만에 본 푸른 안개를 보고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푸른 안개.”
“그렇군. 오랜만일세.”
작년까지는 푸른 안개가 에스파냐어를 배우기 위해 광산촌을 드나들었지만, 로하스가 푸른 안개의 정체를 알고 그를 통해 북미왕국의 왕을 설득하려 한 이후로 푸른 안개는 광산촌을 방문하지 않았었다.
이 때문에 오랜만에 만난 푸른 안개를 보면서도 슬쩍 그의 눈치를 살피는 로하스였다.
“헌데 푸른 안개가 이 배에는 어찌?”
이에 푸른 안개는 대수롭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나 역시 이 배를 타고 자네와 함께 이동할 생각이네.”
그런 푸른 안개의 반응에 로하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그렇군요. 헌데 정확한 목적지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흐음...”
로하스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푸른 안개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래. 자네도 어느 정도 상황을 알아두는 것이 좋겠지. 우리가 향하는 곳은 남쪽일세. 이번 전쟁을 앞두고 남쪽에 건설한 임시 보급항.”
로하스는 푸른 안개의 말을 듣자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전...쟁이요?”
그런 로하스의 반응을 보고 푸른 안개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북미왕국은 이미 에스파냐와 전쟁을 선포했다네.”
푸른 안개의 말에 로하스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신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