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정성국이 탄 지급 함선을 기함으로 인급 전선 13척이 해안가를 따라 북상하면서 보이는 선착장을 모조리 공격하기 시작했다.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
이곳에서 보기 힘든 커다란 선박이 10척이 넘게 몰려와 공격하는데 무슨 수로 막겠는가.
특히 아카풀코의 북쪽에 존재하는 항들은 그렇게 큰 편도 아니었기에 당연히 제대로 된 요새도 없었고 항구를 방비하는 갤리온도 없었으니 말이다.
거기에 정성국이 탄 지급 함선을 제외하면 모두 인급 함선이었고 이 인급 함선은 돛이 없었기에 멀리서는 갤리로 오인하기 쉬웠다.
덕분에 북미왕국의 함대를 인근의 해적으로 착각한 에스파냐인들은 살기 위해 저항을 포기하고 도망쳤고 덕분에 북미왕국의 함대는 별다른 저항 없이 손쉽게 항구를 박살 낼 수 있었다.
그렇게 순조롭게 아카풀코 북쪽의 모든 항구를 공격한 함대는 방향을 돌려 임시 보급항으로 향했다.
* * *
“뭐? 아카풀코 항이 공격받았다고?”
누에바 에스파냐의 현 부왕인 안토니오 데 톨레도이 살라자르는 멕시코 시티의 자신의 집무실에서 자신의 보좌관과 이야기하는 도중에 찾아온 행정관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에 행정관은 안토니오 부왕에게 다가가 아카풀코 항에서 보내온 편지를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부왕전하. 방금 아카풀코 항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안토니오 부왕은 행정관이 건네준 편지를 급히 읽기 시작했고 그 옆에서 보좌관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카풀코 항이 공격받았다고요?”
하지만 안토니오 부왕은 보좌관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꽤 긴 편지를 집중하며 읽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을 했다.
“이게 대체 무슨...”
그런 안토니오 부왕의 반응에 보좌관은 저 편지에 관한 내용이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부왕전하? 왜 그러시는지...”
하지만 안토니오 부왕은 보좌관의 말을 무시하고 행정관을 바라보며 명령을 내렸다.
“이 편지를 가져온 전령을 이곳으로 데리고 오게.”
“알겠습니다. 부왕전하.”
안토니오 부왕의 명령에 행정관이 급히 집무실을 나섰고 보좌관은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안토니오 부왕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소식이기에?”
이에 안토니오 부왕은 자신이 읽었던 편지를 보좌관에게 건네주었다.
“읽어보도록 하게.”
보좌관은 내용이 궁금했기에 냉큼 빠르게 편지를 읽었고 다 읽고 나서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이게 뭔 황당한...”
안토니오 부왕은 그런 보좌관의 반응을 보고 실소했다.
“나도 황당하네. 갑작스럽게 북미왕국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등장해서 먼저 에스파냐가 공격했다는 이유로 아카풀코 항을 공격하다니...이게 대체 무슨 황당한 소리란 말인가?”
이에 보좌관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문득 생각이 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 전령도 전령이지만 지금 멕시코 시티에 아카풀코 지역의 총사령관이 와 있습니다. 그도 부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래? 그럼 그러도록 하게.”
* * *
집무실의 분위기는 심각했다.
당연했다.
북미왕국이라는 정체불명의 적에게 아카풀코 항이 공격받았고 선박은 모조리 침몰했으며 결국 항복해 아카풀코 항에서 보관하고 있던 100만 페소에 가까운 은이 사라졌으니 분위기가 좋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잠시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이런 사태가 발생했기에 아카풀코 지역의 사령관인 마일로도 험악한 표정이었고.
그때 행정관이 전령을 데리고 집무실로 도착했다.
안토니오 부왕은 전령을 보자마자 대뜸 입을 열었다.
“이 편지. 정말 오를란도가 쓴 편지가 맞나?”
이에 전령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부왕전하.”
전령의 대답에 집무실은 탄식이 가득했다.
혹시나 하였는데 정말 아카풀코가 공격받았다니.
그리고 100만 페소의 은을 적에게 강탈당했다니.
이에 안토니오 부왕은 다시 한번 전령을 보고 부디 아니라고 대답해주길 바라면서 질문했다.
“허어...그럼 여기에 적힌 것이 정말 사실이라고?”
“그렇습니다. 부왕전하.”
하지만 전령은 단호하게 대답했기에 안토니오 부왕은 결국 현 상황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저 한숨을 내쉬었다.
“허어...”
그때 아카풀코 지역의 사령관인 마일로가 험악한 표정으로 전령을 보고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사뮤엘이 저들에게 항복한 것이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전령의 대답에 마일로는 자신을 대리해 아카풀코에 남아있던 사뮤엘을 떠올리며 탄식을 토했다.
“이런 빌어먹을. 고작 갤리온 8척에 겁을 먹고 항복했다고? 아직 마닐라로 교역 선단이 떠나지 않았으니 갤리온이 6척이나 있었을 텐데?”
이에 전령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 갤리온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침몰했습니다.”
“끙...”
전령의 대답에 마일로가 힘이 빠진 표정을 짓자 전령이 부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저들은 막 해가 뜰 무렵 아카풀코 만으로 들어와 정박해있던 갤리온부터 공격했고 결국 산 디에고 요새는 혼자서 갤리온 8척과 갤리 13척의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한 설명에 마일로는 잠시 상황을 생각해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상황이었다면 저항해봐야 의미가 없었으니까.
“후우...어차피 저항해봐야 못 버텼겠군.”
전령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때까지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안토니오 부왕이 전령에게 말을 걸었다.
“일단 그건 넘어가도록 하고. 정말 아카풀코를 공격한 자들이 서양 해군이 아니라 북미왕국이라는 처음 듣는 이름의 나라가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부왕전하. 저들의 배에 달린 깃발은 처음 보는 독특한 문양이었고, 우리와 협상하던 북미인들의 모습은 우리 같은 서양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겉모습만 생각하자면 인디오들과 비슷했지요.”
오를란도가 보내온 보고서에도 생김새 자체는 인디언들과 비슷해 보였다고 적혀있었다.
다만 실제 협상해본 결과 인디언과 겉모습만 비슷할 뿐이라고 몇 번이고 강조해서 적혀있었고.
“흐음...”
이를 상기한 안토니오 부왕이 잠시 생각에 잠겼을 때 옆에 있던 보좌관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갤리온을 타고 왔으며 함포를 사용했단 소린가?”
“갤리온 뿐만 아니라 갤리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선박에 함포가 달려있었고요. 그리고 그 함포로 무척이나 특이한 포탄을 사용했습니다.”
“특이한 포탄?”
고개를 갸우뚱하는 보좌관을 보고 전령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포탄이...폭발했습니다.”
“응?”
“뭐라고?”
전령의 대답에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집무실에 있던 3인이 모두 전령을 바라보았지만, 전령은 부르르 떨면서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포탄이 폭발했습니다. 덕분에 정박해있던 갤리온 6척이 10분 만에 모조리 침몰했고 선착장에 정박해있던 대부분 선박이 침몰하는데도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허어...”
믿기 힘들 정도의 보고였기에 다들 전령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때 전령이 계속해서 자신이 보았던 광경을 회상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산 디에고 요새에 포격을 가했을 때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포탄이 떨어진 요새 주변 지형 곳곳이 패여 있더군요. 그 때문에 급히 사뮤엘 부사령관이 저항은 크게 의미가 없다면서 백기를 들어 올리라고 했습니다만 그 전에 다시 적들이 포격을 가했고 포탄이 요새에 명중해 요새 일부가 무너졌습니다.”
전령의 이야기에 마일로가 믿기 어렵다는 듯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고작 단 두 번의 포격만으로 요새 일부가 무너졌다고? 그거 확실한가?”
이에 자신은 절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결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전령이었다.
“확실합니다. 정확히는 첫 탄은 요새에 명중하지도 않았으니 고작 한 번의 포격만으로 요새 일부가 무너진 셈이죠.”
“그런...”
전령의 대답에 마일로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옆에서 그를 듣고 있던 안토니오 부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결론을 내렸다.
“정말 이 보고가 사실이라면 저항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었겠어. 어차피 요새가 무너지고 약탈당할 바에야 그냥 넘기는 대신 목숨이라도 건지는 게 맞겠지. 오히려 그 사뮤엘이라는 친구의 선택이 정확한 선택이었군.”
안토니오 부왕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마일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요.”
그리고 안토니오 부왕은 안색을 굳히며 마일로를 쳐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것보다 우리가 먼저 선제공격을 했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누에바 에스파냐의 서해안을 모조리 불태워버리겠다고 하는데? 이거 어떻게 생각하나? 막을 수 있을까?”
안토니오 부왕의 질문을 듣고 마일로는 잠시 보고서의 내용과 전령이 전해준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다시 한번 계산해보고 고개를 저었다.
“어려울 겁니다. 그나마 가장 견고한 아카풀코 항조차 얼마 못 버텼으니까요. 그러니 다른 항구들은 별다른 저항도 어려울 겁니다.”
비관적인 대답에 안토니오 부왕은 한숨을 내쉬며 보좌관을 바라보았다.
“허. 서해안에 혹시 저들을 막을 만한 선박은 없지?”
이에 보좌관은 고개를 저었다.
“아카풀코 항에 있던 갤리온 6척은 모조리 가라앉았고...파나마 항에 2척의 갤리온이 있긴 합니다만...”
말을 흐리는 보좌관이었지만 그 뒤에 붙을 내용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저들의 대규모 함대를 막지는 못하겠군. 그렇다고 베라크루즈 항의 갤리온을 이동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를 어쩐다...”
그러면서 무척이나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짓는 안토니오 부왕이었다.
그 표정을 보고 보좌관이 슬쩍 입을 열었다.
“차라리 본국에 지원 요청을 하는 것이...”
하지만 안토니오 부왕의 표정은 딱히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바랄 걸 바라야지.”
현재 에스파냐의 국왕은 카를로스 2세였다.
그는 필리페 4세와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페르디난트 3세의 딸이자 그의 조카딸인 마리아나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아들이었다.
정확히는 합법적인 결혼을 통해서 태어난 아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이 시기 합스부르크 왕가는 유산의 배분으로 인해 재산이 흩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근친혼을 일삼았다.
그렇게 시작된 합스부르크 왕가의 근친혼의 폐해로 인해 필리페 4세의 자식들은 모두 단명했다.
덕분에 작년에 고작 4살인 카를로스 2세가 왕이 되었고.
당연히 카를로스 2세의 어머니인 마리아나가 섭정이 되었다.
그러나 마리아나는 섭정으로서 에스파냐의 국정을 도맡을 정도의 능력이 없었다.
그렇기에 총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문제라면 마리아나가 총신으로 지목한 예수회 출신 오스트리아인인 니데르드가 썩 유능하진 않다는 점이었다.
더불어 필리페 4세의 사생아인 후안 호세는 자신이 섭정으로 지목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노해 마리아나와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거기에 아직 포르투갈의 독립 전쟁이 지속 중인 상황에서 필리페 4세의 딸인 마리 테레즈와 결혼한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대한 상속권을 주장하고 있었기에 현재 에스파냐는 내부와 외부 모두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원을 요청해봐야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는 안토니오 부왕이었다.
그리고 막상 본국에서 지원을 해주고 싶어도 딱히 지원할 방법이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본국에서 함대를 누에바 에스파냐의 서해안까지 이동시키기도 쉽지 않았고 그렇게 이동해봐야 과연 이 보고서에 적힌 북미왕국의 함대를 상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고.
이 때문에 아예 본국의 지원을 포기한 안토니오 부왕이 잠시 고민하다 답이 없음을 깨닫고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건 답이 없군. 차라리 저들이 누에바 에스파냐를 점령하려 들었다면 모를까 해군을 이용해 누에바 에스파냐의 서해안을 봉쇄해 버린다면 타격이 너무 커. 우리가 딱히 대응할 방법도 마땅치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