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아카풀코 항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은 포성이 멎자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산 디에고 요새 근처로 몰려들었다.
그런 사람들의 눈에 보인 광경은 산 디에고 요새 근처 해안가에 쌓인 수많은 상자와 그 상자들을 인디오로 보이는 자들이 열심히 조그마한 보트에 실어 자신들을 공격한 것으로 추정되는 갤리온에 나르고 있는 광경이었다.
이에 에스파냐인들은 직감했다.
자신들이 졌다고.
다만 약탈당하는 대신 오를란도 시장이 협상해서 재물을 건네주는 것으로 협상을 한 모양이라고.
그 짐작이 맞았는지 해안가에 쌓여있던 수많은 상자가 모두 사라지자 오를란도 시장 옆에 있던 인디오가 시장과 무어라 이야기한 후 보트를 타고 갤리온으로 이동했다.
잠시 후 아카풀코 만에 대기하고 있던 대규모 함대가 일제히 선회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대규모 함대가 질서정연하게 아카풀코 항에서 멀어지는 것이 보이자 사람들은 이제 모든 일이 끝났구나 싶었고.
그걸 확인해주듯 한 병사가 소리쳤다.
“저...저들이 퇴각합니다!”
그 외침에 몰려있던 사람들과 병사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살았다!”
“오를란도 시장의 협상으로 적들이 물러났다!”
“우와와!”
* * *
오를란도는 점점 작아지는 대규모 함대의 뒷모습을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산 디에고 요새에는 꽤 많은 은을 보관하고 있었으니까.
슬슬 마닐라로 교역 선단을 보낼 시기가 되어 신대륙 각지에서 캔 은이 이곳 아카풀코로 모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은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어차피 항복한 이상 약탈당해 사라질 재물로 저들과 협상해 약탈을 막고 에스파냐인들의 목숨을 구했으니 남는 장사라고 보았다.
물론 보관하고 있던 은을 고스란히 내어준 것이니 나중에 부왕에게 질책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오를란도가 생각하기엔 자신의 선택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자신했다.
더불어 협상하는 동안 저들과 대화하며 북미왕국의 정보를 조금이나마 더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고.
그리고 협상을 하며 느낀 것은 북미왕국의 구성원이 인디언들이라고 해서 무시하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저들의 주장처럼 저들을 북미인으로 보고하는 것이 좋겠어. 괜히 인디언이라고 보고해봐야 오히려 직접 경험하지 못한 멕시코시티에서는 오판할 수도 있으니.’
능숙하게 자신과 협상하던 인디언, 아니 북미인을 떠올리고 고개를 저은 오를란도의 귀에 사뮤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이에 정신을 차린 오를란도가 아카풀코 만 입구 밖으로 나가 북쪽으로 선회하는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뭘 어쩌겠는가. 저들이 2주를 주었으니 그 안에 몸을 빼야지.”
“그렇겠지요.”
대답하면서도 씁쓸한 미소를 짓는 사뮤엘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병사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함이었다고는 하나 결국 적들에게 항복했고 덕분에 자신들의 목숨값으로 귀중한 은을 고스란히 저들에게 내어주었으니까.
더불어 2주 안에 그동안 지켜왔던 아카풀코 항에서 도망쳐야 했고.
그 때문에 가라앉은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사뮤엘의 귀에 오를란도의 말이 들려왔다.
“그보다 북미왕국이라니...단순히 인디언 부족들이 뭉친 것 같지는 않은데...”
이에 사뮤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인디오고 인디언들이고 미개하긴 매한가지였으니까.
그런 이들이 뭉쳐 나라를 세워봐야 방금 자신들이 경험한 북미왕국이 될 순 없다고 생각한 사뮤엘이었다.
“그렇겠지요. 미개한 인디언들 따위가 아무리 뭉쳐봐야...”
“그리고 저들이 말한 에스파냐의 선제공격. 그것이 좀 걸리네. 포로들이 자신들을 에스파냐의 군인이라고 이야기했다라...혹시 짐작 가는 것이라도 있는가?”
이 말에 사뮤엘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짐작이 가는 것이 하나 있었기에.
“음...저들이 3년 전에도 공격을 받았고 작년에도 공격을 받아 결국 대응에 나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생각해보니 3년 전에 로하스 함장이 이끄는 교역 선단이 행방불명 되었고 작년에는 니콜라스 함장이 이끄는 교역 선단이 행방불명 되었지요. 그 때문에 태평양에 해적이 설치는 것이 아닌가 해서 사령관이 직접 멕시코 시티로 향했고요.”
사뮤엘의 말에 오를란도는 바로 이거였구나 싶어 탄식을 토했다.
“아! 그렇군! 분명 북미왕국은 북쪽에 있다고 했지!”
이에 고개를 끄덕인 사뮤엘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렇지요. 그리고 교역 선단은 캘리포니아 섬에 도착한 이후 남하하는 항로를 이용하고요. 제 추측이 맞는다면 아마 그곳에서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합니다. 결국, 북미왕국을 공격했다는 에스파냐 군인이라는 존재는 바로 그들이 아닐까 합니다.”
사뮤엘의 이야기에 동감한 오를란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대체 그들은 왜 건드려서 이 사달을 일으켰단 말인가.
“끙...대체 왜 공격을 한 거지? 니콜라스 함장은 몰라도 로하스 함장은 꽤 신중한 인물 아닌가?”
이에 사뮤엘이 조심스럽게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주었다.
“이건 제 예상이긴 합니다만...아마도 교역 선단에 실린 물품 때문에 다가오는 선박에 민감하게 대응을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라도 정체불명의 선박이 캘리포니아 섬 해안가에 보인다면 경계할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오를란도는 오히려 다른 부분에 집중했다.
“아...잠깐만. 그럼 북미왕국의 영토가 캘리포니아 섬이란 소린가?”
사뮤엘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모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탐사대도 두 번이나 보내 캘리포니아 섬에 엘도라도가 존재하는지 찾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100년 넘게 캘리포니아 섬 인근을 항해했지만, 지금까지 충돌이 없었지요.”
“그럼...?”
의아한 표정을 짓는 오를란도를 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연 사뮤엘이었다.
“아마 북미왕국은 북쪽의 내륙 국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 탐사대가 찾지 못했겠지요.”
사뮤엘의 답변에 오히려 제정신이냐는 표정을 짓고 그를 바라본 오를란도였다.
“내륙 국가? 내륙 국가가 저런 대함대를 보유한다고?”
이에 그것 외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면서 어깨를 으쓱한 사뮤엘이었다.
현 상황을 보고 끼워 맞추는 식이었지만 어쩌겠는가.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데.
“내륙 국가였다가 최근에 영역을 확장했겠지요. 그리고 북아메리카 서해안, 그러니까 캘리포니아 섬 동쪽의 바다에 접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저런 대함대를 키워냈다? 그건 좀 비약이 심한 것 같은데. 거기에 저기 저건 갤리온과 너무 흡사하기도 하고.”
“물론 비약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선 설명이 되지 않으니 어쩌겠습니까.”
“끙...”
확실히 사뮤엘의 추측으로밖에 현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에 끙끙대는 오를란도를 보고 사뮤엘은 고개를 저으며 저들의 정체를 추측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아무튼, 일단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멕시코시티에 전령을 보내는 겁니다. 동시에 다른 항구에도.”
“아. 그렇지! 누에바 에스파냐의 서해안을 모조리 불태우겠다고 했었으니...”
그러면서 앞으로의 일이 상상이 가는지 말을 흐리는 오를란도를 보고 사뮤엘 역시 어두운 얼굴로 그 말을 받았다.
“괜히 무의미하게 저항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만...”
“후우...”
* * *
“그렇게 좋으십니까?”
김봉길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정성국을 보고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이에 정성국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은 25톤이잖아? 저거 그냥 녹여서 북미왕국의 화폐로 찍어내기만 해도 650만 원에 가까운데 좋을 수밖에 없지. 이거 생각보다 짭짤한데?”
그러면서도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는 정성국을 보고 김봉길이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어...그럼 다른 항구도 불태우지 말고 약탈이나 할까요?”
그 소리에 정성국은 미소를 지우며 고개를 저었다.
“에이. 그럴 수는 없지. 이번은 저들이 먼저 항복했으니 어쩔 수 없이 받아준 거고...거기에 아마 다른 항구는 털어봐야 저 정도로 은이 많지는 않을 거야. 아카풀코 항이니까 가능했던 거겠지.”
재물이 좋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재물에 눈이 멀지는 않겠다는 정성국의 반응에 김봉길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선장실로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알겠습니다. 전하. 그럼 예정대로 함대를 둘로 나누겠습니다.”
“그러도록 하게.”
누에바 에스파냐의 서해안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가 아카풀코 항이었다면 그다음으로 중요한 항구는 바로 파나마 항이었다.
문제라면 파나마 항은 생각보다 멀다는 점이었다.
파나마 항은 이곳 아카풀코 항에서도 동남쪽으로 약 2700km는 더 항해해야 했으니까.
거기에 임시 보급항에서 아카풀코 항까지의 거리는 약 1300km.
즉 파나마 항을 공격하고 돌아올때는 무려 4000km를 항해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이 때문에 파나마 항의 공격은 기범선인 지급 전선으로만 하기로 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함대를 둘로 나누어 파나마 항을 공격할 지급 전선으로 이루어진 함대는 바로 임시 보급항으로 돌아가 재정비한 후 파나마 항으로 이동하기로 했고, 정성국이 타고 있는 이 지급 전선을 제외한 나머지 인급 전선들은 천천히 누에바 에스파냐의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면서 해안가를 공격하기로 말이다.
“헌데 전하. 파나마 항의 원정은 무엇보다 장기 항해가 중요한 만큼 지급 전선에 타는 병사들의 숫자를 좀 줄일까 합니다만...”
김봉길이 생각하기에 어차피 저들의 저항이 그리 거셀 것 같지도 않았고 딱히 병사들을 누에바 에스파냐의 땅을 밟게 할 계획도 없었기에 식량만 축내는 병사들을 임시 보급항에 내려놓고 원정에 떠나겠다고 건의했다.
이에 정성국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게. 어차피 파나마 항 원정의 총 책임자는 자네니까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하게. 다만 병사들의 수가 적어지는 만큼 절대로 적들이 근접하게 내버려 두지는 말고. 알겠나?”
김봉길은 정성국의 당부에 씩 웃으며 자신감을 보였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저들이 다가오기도 전에 모조리 수장시킬 수 있습니다.”
김봉길의 자신감을 보고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만 믿겠네. 그리고 절대로 병사들을 육지로 상륙시키지 말게. 만약 이번처럼 저들이 협상을 원한다면 저들을 배로 불러들여서 협상해. 그곳의 모기는 무척이나 골치 아프니 말일세.”
파나마 지역은 지리적인 입지 조건 때문에 에스파냐인들이 확실하게 장악하려 했지만, 말라리아 때문에 에스파냐인들이 죽어 나가자 포기하고 느슨하게 원주민들을 통치하며 항구만 이용하고 있었다.
말라리아는 아직 약도 없었기에 다시 한번 당부하는 정성국의 말에 김봉길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전하.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부디 옥체 보중하십시오.”
비록 정확한 지도가 있다고는 하나 제대로 된 해도도 없는 상황에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파나마 항까지 가야 했다.
그런 만큼 이 원정의 총 책임자는 가장 노련한 선장인 김봉길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그는 이 배에서 내려 다른 지급 전선을 탈 예정이었기에 마지막으로 정성국에게 인사하러 온 것이다.
“그래. 자네도 조심하도록 하게. 건투를 빌겠네.”
그렇게 인사한 김봉길은 보트를 타고 다른 지급 전선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곧 정성국이 타고 있던 지급 전선을 제외한 나머지 지급 전선 7척이 일제히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전속력으로 항해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잠시 바라보던 정성국이 곧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부함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예정대로 해안가를 따라 북진하면서 보이는 선착장을 모조리 파괴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