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외무청 관리의 말은 전적으로 정성국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북미왕국의 존재는 어차피 밝혀야 했다.
그렇기에 기존의 계획대로 상황이 흘러갔다면 이곳 아카풀코 항을 초토화한 이후 외무청 관리를 통해 생존자들에게 이야기를 전할 계획이었다.
이 전쟁은 에스파냐 때문에 일어났다고.
그렇게 미리 알리지 않는다면 나중에 에스파냐는 북미왕국이라는 신생국가가 일방적으로 에스파냐의 해안가를 공격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외무청 관리가 제대로 된 소개도 없이 바로 이야기를 꺼냈고 이를 처음 듣는 오를란도와 사뮤엘은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싶었다.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겠소?”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외무청 관리를 쳐다보며 되묻는 오를란도의 말에 원주민 출신인 외무청 관리는 씩 웃으며 유창한 에스파냐어를 자랑하며 다시 한번 말했다.
“항복했으니 우리 북미왕국은 당신들의 안전을 보장해주겠다는 소리요.”
“북미왕국? 그건 대체 무슨...”
분명 말은 통하는데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웠기에 오를란도는 안색을 찡그렸다.
이자의 말을 생각해보면 이들은 북미왕국이라는 곳에 소속된 자들인 것 같았다.
하지만 오를란도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기에 사뮤엘을 보며 혹시 들어본 적 있느냐고 표정으로 물었고 사뮤엘은 고개를 저었다.
이에 오를란도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잠깐. 도저히 상황 파악이 안 되니 일단 질문을 좀 해도 되겠소?”
오를란도의 물음에 외무청 관리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표정관리를 하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성국은 북미왕국의 정보를 적당히 풀라고 지시했었기에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저들이 알아서 물어보는 만큼 대답해주면서 적당히 정보를 흘리면 될 것으로 생각하며.
“그러시구려.”
외무청 관리의 허락이 오를란도는 먼저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이 아카풀코를 공격한 당신들의 소속이 북미왕국이라는 단체란 말이오?”
오를란도는 아직 북미왕국이라는 이름의 정체조차 파악하지 못했기에 그리 물어보았다.
혹시 이들이 인디오로 구성된 결사단 같은 단체가 아닌가 싶어서.
이런 오를란도의 물음에 외무청 관리는 안색을 확 구기면서 불쾌하다는 듯 소리쳤다.
“단체라니! 북미왕국은 나라요!”
“아. 미안하오. 처음 듣는 이름이라 실수를 했소.”
외무청 관리가 화를 내자 곧바로 사과하는 오를란도였고 이러한 반응에 외무청 관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를란도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쯧. 무지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 무례는 그냥 넘어가겠소.”
“고맙소.”
그러면서도 오를란도의 속은 복잡해졌다.
아마 다른 때에 인디오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인디오들이 에스파냐에 대항해 부족끼리 연합하고 나라를 세웠다고 주장하는구나 하며 코웃음 쳤겠지만, 해안가 근처에 수많은 함선을 보니 그저 이름뿐인 나라 같지는 않았으니까.
이에 북미왕국의 정보가 더 필요하다고 느낀 오를란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북미왕국의 구성원은 인디오들입니까?”
오를란도의 물음에 고개를 저은 외무청 관리였고 이 모습을 지켜본 오를란도와 사뮤엘은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응? 인디오가 아니라고?’
이곳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디오라고 부른 것은 바로 신대륙을 처음 발견했던 콜럼버스였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이 대륙이 인도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대서양을 지나면 바로 인도가 나오리라 생각했고 그렇기에 카리브해의 섬들이 위치한 곳을 서인도 제도로 이름 붙이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인도인이라는 의미로 인디오라고 부른 것이다.
나중에야 이곳이 인도가 아니라 신대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오히려 아시아 지역에 있는 원래의 인도를 동인도, 이곳을 서인도라고 자신들 마음대로 이름 붙여 계속해서 불렀고 결국 이것이 서양에서는 정착해버렸다.
그 후 잉글랜드가 아메리카 대륙 동해안에 식민지를 세우면서 그곳에 사는 원주민들을 인디오의 영어식 표현인 인디언으로 불렀고.
그렇기에 서양에서는 인디오는 남미에 사는 원주민을, 인디언은 북미에 사는 원주민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에스파냐의 포로들에게 말을 배우면서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외무청의 관리였다.
또한, 누에바 에스파냐의 상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고.
그런 만큼 눈앞의 에스파냐인이 자신들을 보고 인디오라고 물은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외무청 관리가 고개를 저은 것이다.
그리고 원주민 출신인 외무청 소속의 관리들은 서양인들이 왜 이 대륙에 사는 원주민들을 인디오나 인디언으로 부르는지 파악하고 꽤 불쾌해하기도 했고.
그런 외무청 관리의 반응에 당황한 오를란도가 급히 되물었다.
“잠시만요. 그럼 도대체 북미왕국은 어디에 존재하는 나라인 겁니까?”
북미왕국의 대략적인 위치를 묻는 오를란도의 질문에 외무청 관리는 순순히 대답했다.
“누에바 에스파냐의 북쪽에 있는 나라라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북쪽?”
“그렇소.”
외무청 관리의 대답에 오를란도와 사뮤엘은 서로를 바라보며 혹시 아는 것이 있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둘 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오를란도가 외무청 관리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럼 인디언이란 소리요?”
이에 외무청 관리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대답했다.
“뭐 당신들의 관점에서라면...뭐. 굳이 따지자면 인디언에 가깝겠지.”
“으음...”
북아메리카 지역에 이곳까지 저런 대규모 함대를 보낼 정도로 강성한 국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기에 오를란도와 사뮤엘은 동시에 신음을 흘렸다.
그런 그들에게 외무청 관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 땅이 인도도 아닌데 그런 호칭을 고수하는 당신들을 이해하지는 못하겠소. 다만 이미 그런 표현이 당신들 사이에서 일반화되었다고 하니 딱히 무어라 하지는 않겠소. 그러나 최소한 우리는 인디오나 인디언으로 부르지는 말아주었으면 좋겠구려.”
이는 외무청 소속 원주민들의 생각이기도 했지만, 정성국의 지시이기도 했다.
저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인디오, 인디언과 같은 인종이라는 사실을 알려 이 대륙의 원주인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과 동시에 호칭에서는 차이를 두어 저들이 가진 인디언을 향한 편견에 빠지지 않는 것.
이 때문에 외무청 관리가 은근슬쩍 이야기한 것이다.
이에 오를란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목줄이 잡힌 상황이었기에 괜히 이들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었다.
“허면 당신들을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당신들이 스스로를 에스파냐인으로 부르는 것처럼 우리는 북미왕국인, 줄여서 북미인으로 불러주었으면 좋겠군.”
“북미인이라...알겠소.”
오를란도가 외무청 관리가 발음한 대로 북미인이라는 단어를 되새기고 있을 무렵 사뮤엘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는 북미왕국의 정체도 궁금했지만, 그보다는 처음 외무청 관리가 한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보다 아까 한 말 중에 우리가 먼저 해적질을 했다는 게 무슨 뜻인지 궁금합니다만...”
이에 외무청 관리는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요. 에스파냐가 먼저 우리 북미왕국의 영해를 침범하고 우리의 선박을 선제공격했소. 3년 전에도 그랬고 작년에도 그런 일이 발생했지.”
사뮤엘은 외무청 관리의 말에 기겁해서 손을 내저었다.
자신들이 먼저 저들을 건드렸다니.
북미왕국의 존재 자체를 몰랐는데 무슨 수로 이들을 건드린단 말인가.
“그럴 리가요! 무언가 착각한 것 아닙니까?”
“우리 에스파냐는 북미왕국의 존재조차 모르는데 그게 가능할 리가!”
“아니. 이미 우리를 공격했던 자들을 포로로 잡아 그들의 소속을 확인했소. 그들은 에스파냐의 군인이라고 하더군.”
격하게 반발하는 두 에스파냐인의 반응이 무색하게 외무청 관리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절대 자신들의 착각이 아니라고.
에스파냐가 먼저 선제공격한 것이 확실하다고.
이 대답에 사뮤엘과 오를란도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 돼...”
그런 둘을 바라보며 외무청 관리가 쐐기를 박았다.
“3년 전에 있었던 일은 관대하게 넘어가려 했소. 허나 비슷한 일이 작년에 다시 발생했고 이에 북미왕국은 더는 참지 않기로 했소. 그리고 이번 공격은 그 시작이고.”
외무청 관리의 말을 듣고 침을 삼키며 오를란도가 입을 열었다.
“시작이라면...”
이에 외무청 관리가 단호한 어조로 선언했다.
“앞으로 누에바 에스파냐의 서해안은 모조리 불타오를 것이오.”
그 선언을 듣고 오를란도와 사뮤엘은 동시에 탄식했다.
“맙소사...”
“신이시여...”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를란도와 사뮤엘은 자신들을 북미왕국으로 지칭하는 이 인디언들, 아니 북미인들의 힘을 확실히 경험했으니까.
자신들의 대포는 저들의 함선에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고 저들의 대포는 포탄이 터지면서 커다란 피해를 줬다.
그런 저들을 과연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그나마 누에바 에스파냐의 서해안에 존재하는 항구 중에서 가장 방비가 좋다는 아카풀코 항조차 결국 버티지 못하고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항복한 상황인데.
이를 상기한 오를란도가 어떻게든 막아보려 입을 열었다.
“무언가 착오가 있을 겁니다. 만약 제가 그들과 대면할 수 있다면...”
하지만 외무청의 관리는 오를란도의 말을 단호히 끊어버리고 자신이 이곳에 상륙한 목적을 상기시켰다.
“됐소. 그보다는 당신들의 처지부터 걱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아...”
오를란도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고 사뮤엘은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우리를 어찌할 생각입니까?”
이미 북미왕국이 전쟁을 선언한 이상 최악의 경우는 포로로 끌려갈 수도 있었다.
이에 잔뜩 긴장한 둘을 잠시 바라본 외무청의 관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우리 북미왕국은 에스파냐에 맞서 전쟁을 선언했고 당신들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우리에게 항복한 만큼 전쟁이 끝날 때까지 북미왕국으로 끌려가 포로로 지내야 하겠지.”
“아...”
외무청 관리의 말에 탄식을 토하는 오를란도와 옆에서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움켜쥐는 사뮤엘이었다.
그런 이들의 반응을 확인한 외무청 관리가 표정을 바꾸어 씩 웃으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북미왕국의 에스파냐 포로들도 만날 때마다 협상하자고, 자신의 목숨값을 지불할테니 풀어달라고 아우성인 판에 당신들을 포로로 끌고 가봐야 더 시끄러워질 것 같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들의 목숨값을 협상하도록 하지.”
“예?”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외무청 관리를 멍하니 쳐다보는 두 에스파냐인이었다.
* * *
“얼마? 100만 페소?”
일단 대략적인 협상을 마친 외무청 관리가 정성국에게 보고하기 위해 다시 지급 전선에 돌아와 보고했고 이를 듣고 정성국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고작 항복한 포로들의 목숨값으로 100만 페소는 너무 과했으니까.
100만 페소라면 무게로만 계산해도 은 25톤에 가까웠고 이곳 신대륙에서 매년 캐는 은이 50톤에 가까운 것을 고려해보면 고작 포로들의 목숨값치고는 확실히 과했다.
이에 외무청 관리는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전하. 자신들의 목숨값과 아카풀코 항의 안전을 위해 기꺼이 100만 페소의 은을 지불하겠다고 하더군요.”
“아카풀코 항의 안전?”
“그렇습니다. 어차피 항복한 이상 우리 북미왕국의 병사들이 아카풀코 항을 약탈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 같더군요.”
이 시기에 약탈은 승자의 권리였다.
그렇기에 오를란도는 어차피 약탈당해 사라질 재물을 가지고 자신들의 목숨값과 이곳 아카풀코 항의 안전을 협상한 것이다.
외무청 관리는 이를 짐작했지만, 정성국이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것이 병사들의 안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과연 정성국이 아카풀코 항의 약탈을 선택할까 싶었다.
차라리 주민들을 소개하고 그냥 불태워버리면 모를까.
해서 기꺼이 협상한 것이다.
그 내막을 다 듣고 정성국은 외무청 관리의 수완에 감탄하면서도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었기에 이를 언급했다.
“잠깐. 설마 계속해서 저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협상은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전하. 저 역시 북미왕국의 계획을 알고 있는데 어찌 그런 협상을 하겠습니까. 그렇기에 저들의 목숨값으로 100만 페소를 받고 나면 일단 물러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2주간은 이 아카풀코 만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을 거라고 명시했고요.”
“그 안에 피난을 가라?”
“그렇습니다. 전하.”
“흐음...나쁘진 않네.”
정성국이 외무청 관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때 외무청 관리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아카풀코 만 안으로 들어오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2주간은 만 바깥쪽에서 입구를 봉쇄하면 그만이지요.”
“허.”
어느새 능구렁이가 다 된 외무청 관리를 보며 허탈하게 웃는 정성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