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정성국이 잠시 말을 흐리며 고민하고 있을 무렵 그의 귓가에 김봉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에바 에스파냐의 서해안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라는 아카풀코 항의 방어 수준이 생각보다 별로였습니다. 그러니 다른 항구들도 큰 저항은 없을 거라고 추측됩니다. 그러니 근접전을 대비해 태운 병사들을 모두 하선시킨다면 이곳 아카풀코를 점령하고 유지할 수는 있어 보입니다만...”
지급 전선에는 300명의 병사가 탑승해 있었고 인급 전선에는 200명의 병사가 탐승해 있었다.
그리고 이 병사 중 절반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예비 병력에 가까웠다.
수많은 대포를 싣고 다니는 서양의 군선과는 달리 북미왕국의 전선은 탑재된 화포의 수 자체가 적었기에 병사가 그리 많이 필요한 편은 아니었으니까.
거기에 서양의 군선들은 대포만으로 적 선박을 침몰시키려면 한세월이 걸리는 만큼 주로 근접해서 머스킷까지 사용해서 적을 줄이는 방식이었기에 그만큼 많은 선원을 태울 수밖에 없었지만, 북미왕국은 상황이 전혀 달랐으니까.
그 때문에 김봉길은 전선에 타고 있는 병사들을 일부 추려내도 상관없다고 이야기 한 것이다.
갑오 소총으로 무장한 병력 3천이면 아카풀코의 점령하고 이를 유지하는 데는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 의견에 정성국 역시 내심 동의했다.
이 시기 누에바 에스파냐의 인구수는 1천만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 인구수를 차지하는 대부분은 에스파냐인이 인디오로 부르는 원주민들이었고 실제 에스파냐인은 그 1%인 10만 정도로 추산되었다.
그런 만큼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사 수는 무척 적었다.
저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인디오를 무장시켜 병력으로 사용하지는 않을 테니까.
거기에 인디오들을 착취하는 구조 때문에 그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기에 아카풀코를 탈환하겠다고 누에바 에스파냐의 모든 병력을 동원할 수도 없었고.
그런 만큼 정성국이 예상하기에 만약 아카풀코 항을 점령하고 있다면 이를 탈환하기 위해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병력을 최대한 동원해봐야 1만이 한계라고 보았다.
머스킷으로 무장한 에스파냐 병력 1만.
분명 부담스러운 숫자였지만 갑오 소총으로 무장한 병력 3천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는 있어 보였다.
거기에 해안가에서 싸운다면 전선으로 포격 지원도 가능할테니 더 수월할테고.
이에 정성국은 고심하기 시작했다.
분명 아카풀코 항을 점령하는 것은 북미왕국의 이득이었다.
그렇다고 이 아카풀코 항을 북미왕국의 영토로 삼는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아카풀코 항의 점령을 유지할 수 있다면 종전 협상에서 더 큰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아카풀코 항을 돌려주는 대가로 더욱 많은 것을 에스파냐에게 뜯어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만큼 위험성이 컸다.
정성국이 자신만만하게 에스파냐를 공격한 것은 에스파냐는 결코 바다에서 북미왕국을 상대할 수 없을 거라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더불어 전선들이 튼튼한 만큼 인명 피해도 거의 없을 테고.
하지만 아카풀코를 점령하고 이를 유지하려 하는 순간 에스파냐와 육지에서 정면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북미왕국의 무기가 머스킷을 사용하는 에스파냐보다 우월하다 해도 숫자에서 밀리는 만큼 인명 피해가 발생할 여지가 있었다.
특히 북미왕국의 경우 인구가 적은 만큼 인명 피해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전쟁의 목적은 서양 각국에 북미왕국의 존재와 힘을 각인시키고 에스파냐와 영토 협상을 하는 것이 주목적인 만큼 제일 중요한 것은 에스파냐를 협상장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물론 아카풀코 항을 점령하고 이를 탈환하려는 에스파냐의 병력을 쓸어버린다면 곧바로 저들은 협상하려 들겠지만 그건 멕시코 서해안을 초토화하고 아카풀코를 봉쇄하기만 해도 충분히 저들을 협상장으로 불러들일 수 있었다.
그런 만큼 굳이 아카풀코를 점령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혹시 모를 에스파냐 본국의 지원군도 부담스러웠고.
물론 지금 시기의 에스파냐는 유럽에서 아직 열강의 하나로 군림하고 있기는 했지만 급격하게 쇠퇴하는 시기였다.
동군연합이었던 포르투갈이 독립하고 네덜란드가 독립했으며 30년 전쟁으로 인해 국고는 바닥났다.
거기에 카탈루냐, 안달루시아, 남이탈리아의 속령인 나폴리 왕국, 아라곤 지역에서도 독립 전쟁과 모반이 일어나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국력을 쏟아부어야 했으니.
그런 시기였기에 정성국은 에스파냐 본국에서 병력을 지원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누에바 에스파냐는 에스파냐의 중요한 식민지인 만큼 또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아카풀코 항을 점령한다면 좋은 협상 카드가 되긴 하겠지만 어차피 마닐라 갤리온 무역만 못 하게 막아도 에스파냐의 타격이 큰 만큼 우리가 원하는 대로 협상을 할 수밖에 없을 거야. 그런데 굳이 아카풀코를 점령해서 가뜩이나 독하기로 유명한 에스파냐의 군대와 정면으로 싸울 필요는 없지. 아무리 우리가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고 해도 육지에서 붙는다면 피해를 전혀 보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뭐 전쟁을 결정해놓고 피해 없이 이기겠다는 게 도둑놈 심보긴 한데 기존 계획이라면 가능할 것 같으니...’
정성국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다.
“물론 함장의 말처럼 이곳을 점령하고 충분히 유지할 수는 있을걸세.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에스파냐의 병력이 이곳으로 몰려들 테고 이를 막다가 인명 피해가 꽤 많이 발생할걸세. 그건 우리가 원하는 바가 아니지.”
정성국의 이야기에 김봉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조금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허면 저들이 항복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별다른 이득은 없겠군요. 그렇다고 항복한 저들을 몽땅 북미왕국으로 끌고 갈 수도 없구요.”
김봉길의 말에 정성국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씩 웃으면서 말했다.
“그럴 리가. 살려주는 대신 목숨값은 내야 하지 않겠나?”
* * *
“으으으...”
“살려줘....”
눈앞에 보이는 참혹한 병사들의 모습과 들려오는 신음에 사뮤엘과 오를란도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사뮤엘의 주장에 의해 급히 백기를 들어 올리려 했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에 산 디에고 요새를 반 포위한 적들이 다시 한번 일제히 포격을 시작했고 그 포격 중 일부가 요새 끝부분에 자리한 포루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커다란 폭음과 함께 포루 일부가 무너져버렸고.
그 위에서 열심히 포를 장전하고 있던 병사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보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 이후로 적의 포격이 멈췄다는 사실이었지만 사뮤엘의 심정은 참담했다.
‘젠장. 먼저 백기를 올리고 오를란도를 설득했다면 이런 피해를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의 선택과 결단이 늦었기에 이런 피해를 당하였다는 생각에 사뮤엘은 입술을 깨물다 소리쳤다.
“뭐하나! 저들을 일단 옮겨! 이미 전투는 끝났다!”
“예.”
사뮤엘의 명령에 병사들이 조심스럽게 무너진 포루에서 신음하고 있는 병사들을 구조하기 시작했다.
이를 잠시 바라보고 있을 때 오롤란도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고작 포격 한 번에 요새 일부가 무너지다니. 대체 저들은 어떤 함포를 사용하길래 저렇게 화력이 막강한 거요?”
이에 사뮤엘은 자신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낸들 알겠습니까. 애초에 저들의 정체도 모르는 판국에. 그나마 항복 의사를 밝혔고 저들이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니 곧 알게 되겠지요.”
사뮤엘의 말에 오를란도가 고개를 끄덕이며 어느새 포격을 그치고 가만히 대기하고 있는 선박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항복 의사를 밝혔다고 저렇게 질서 정연하게 대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단순한 해적은 아닌 것이 확실하군.”
이 말에 사뮤엘은 강하게 분통을 터트렸다.
“저런 통일된 함선을 사용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데 무슨 놈의 해적! 분명 다른 국가의 해군이 확실합니다!”
하지만 오를란도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헌데 난 오히려 그게 더 의아하군. 이곳까지 해군을 보낼 여력이 되는 국가가 섬나라 놈들과 저지대 놈들을 빼면 존재하긴 하나? 부사령관은 짐작이 가는 나라라도 있소?”
이에 사뮤엘은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려 저 멀리 갤리온에서 출발한 하얀 깃발을 뱃전에 꽂고 이곳으로 노를 저어 접근하는 보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짐작 가는 나라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곧 저들의 정체를 알게 되겠지요.”
* * *
뱃전에 하얀 깃발을 꽂은 보트가 요새 근처 해안가에 접근했을 때 사뮤엘과 오를란도가 직접 그들을 맞이하러 요새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점차 가까워지면서 보트에 탄 사람들의 얼굴이 보일 정도가 되자 둘 다 멍청한 표정을 짓다가 서로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인디오? 제가 보기엔 저들은 인디오 같은데...제가 잘못 본 거죠?”
부디 오를란도가 고개를 끄덕이기를 바란 사뮤엘이었으나 오를란도는 무척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봐도 인디오들 같은데? 비록 복식은 전혀 다르지만...”
이에 사뮤엘은 다시 한번 보트를 확인했지만, 보트에 탄 모든 사람이 인디오로 보이자 그의 안색은 점차 심각해졌다.
사뮤엘이 곧바로 백기를 들어 올리면서 저항을 멈춘 것은 어떻게든 병사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내심 저들이 서양 세력의 해군이라고 생각했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저 멀리 보이는 선박들은 아무리 봐도 갤리온과 너무 흡사했으니까.
그렇기에 최소한 항복하면 목숨은 건질 것이라는 판단하에 백기를 들어 올린 것이다.
헌데 자신들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자가 인디오라면 상황이 달랐다.
에스파냐인과 인디오의 관계는 좋을 수가 없었으니까.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정말 인디오들이라면 과연 우리를 살려줄까? 차라리 저들을 인질로 삼아야 하나?’
그렇게 사뮤엘의 속이 복잡해질 무렵 보트가 해안가에 도착했고 그곳에 탄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적당히 감추고 먼저 나선 오를란도였고 사뮤엘은 뒤늦게 이 뒤에 따라붙었다.
그렇게 이동해 가까이 다가선 양측은 잠시 아무런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에스파냐인들은 이들의 정체도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속이 복잡할 수밖에 없어서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고 북미왕국의 외교청 관리는 당연히 저들이 먼저 말을 꺼내리라고 생각했기에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된 침묵에 견디지 못한 외무청 관리가 먼저 헛기침을 하며 에스파냐어로 저들에게 말을 걸었다.
“백기를 들어 올린 것은 항복의 의미가 맞소?”
“아...”
유창한 에스파냐어에 오를란도와 사뮤엘은 내심 이들이 인디오라고 확신하며 탄식을 토해냈다.
인디오들에게 항복하다니.
동시에 이들에 대한 궁금증이 치밀어올랐지만 일단 대답부터 한 오를란도였다.
“그렇습니다. 다만 저항할 수 있음에도 항복한 만큼 안전을 보장해주었으면 합니다만...”
그러면서 슬쩍 앞에 나선 인디오의 눈치를 살피는 오를란도였다.
이에 외무청 관리가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이오. 비록 우리 북미왕국이 에스파냐의 선제 공격에 대한 대응으로 누에바 에스파냐의 서해안 항구를 모조리 불태우려고 대함대를 이끌고 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항전할 뜻이 없는 자들까지 해칠 정도로 경우가 없지는 않으니까."
“예?”
“뭐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