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쏴! 쏘라고! 계속해서 쏴라!”
펑펑펑!
산 디에고 요새 위에 설치되어있는 8문의 대포가 일제히 발사되었고 대포에서 나오는 새하얀 연기에 시야가 가려졌기에 자신들이 쏜 포탄이 제대로 명중했는지조차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훈련한 대로 뒤로 밀린 대포를 재장전하기 바빴다.
그리고 사뮤엘은 계속해서 병사들을 다그쳤다.
“포탄의 재장전에만 집중해! 포탄이 다 떨어질 때까지 계속 포격하라고! 알았나!”
““예! 부사령관님!””
사뮤엘은 병사들의 대답을 들으며 요새 근처에 떠 있는 괴상한 모양의 갤리를 바라보고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젠장. 뭔 놈의 배가...’
사뮤엘은 분명히 보았다.
요새에서 발사된 포탄이 날아가 갤리에 명중한 것을.
헌데 문제는 포탄이 명중해도 저 괴상한 모양의 갤리에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저 갤리들이 선착장을 공격하는 동안 요새포 역시 3번이나 발사했고 그 중 명중탄을 분명 3번 넘게 보았지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
물론 사뮤엘도 고작 대포 한 발로 단번에 저 갤리를 침몰시킬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다.
하지만 포탄을 맞으면 최소한 배에 손상은 가야 할 것이 아닌가.
헌데 저 괴상한 모양의 갤리는 배가 얼마나 단단한 것인지 포탄을 그냥 튕겨내 버렸다.
그나마 병사들은 그 모습을 포연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한 것 같았지만 사뮤엘은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저 모습을 병사들이 보면 분명 동요할 것이 확실했기에 계속해서 다그치고 있었고.
“부사령관님!”
“뭐야!”
“저기를 보십시오!”
“응?”
뒤쪽 병사의 외침에 고개를 돌린 사뮤엘이 눈앞의 광경을 보고 사색이 되었다.
지금껏 갤리만을 보내놓고 아카풀코 만 입구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갤리온이 일제히 요새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산 디에고 요새는 아카풀코 만 안쪽 구석에 위치한 선착장 근처의 해안가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선착장을 보호하고 귀중한 교역품을 잠시 보관하기 위해 지어진 요새였으니까.
다만 요새가 위치한 언덕이 해안가의 돌출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바다에서 함선들에 의해 반 포위될 여지가 있었다.
이 때문에 오각형 모양의 요새 끝부분에 삼각형의 포루를 만들어 바다에서 반 포위되더라도 최대한 요새의 화력을 투사할 수 있게 설계되었지만 작은 요새였기에 한계는 명확했다.
그렇기에 바다에서 적 함선을 견제해 줄 함선이 필요했지만 이미 침몰한 지 오래였고.
사뮤엘은 요새를 도와야 했던 갤리온들이 떠오르자 고개를 돌려 선착장을 바라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요새 옆의 선착장은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다.
더불어 정박해있던 선박들이 대부분 가라앉거나 불타오르며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고.
그런 참혹한 광경을 만들어낸 열 척이 넘어가는 갤리들이 돛도, 노도 없이 슬금슬금 이동해 요새의 한 방향을 두텁게 둘러싸는 것을 보고 사뮤엘의 인상은 더욱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사뮤엘은 해안가 한 방향을 메우기 시작한 갤리와 그 측면 방향으로 다가오는 갤리온을 보고 다시 소리쳤다.
“해적들이 이 요새를 바다에서 포위하려고 한다! 바다 방향으로 포탄을 날릴 수 있는 포대들은 모두 전투 준비를 하도록!”
“알겠습니다. 부사령관님.”
멀리서 불타오르는 선착장의 풍경을 보면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병사들이었지만 명령이 떨어지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뮤엘은 명령을 내린 후 이쪽으로 다가오는 갤리온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대체 저놈들의 정체가 뭐지? 일반적인 해적 같지는 않은데...’
에스파냐와 사이가 좋지 않고 이 정도의 함선을 동원할 수 있는 나라는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뿐이다.
다만 사뮤엘이 생각하기에 잉글랜드나 네덜란드의 함선들은 절대 아니었다.
이미 전쟁은 예전에 끝났고 현재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는 전쟁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 먼 태평양까지 저런 대함대를 보낸다?
그가 알고 있는 정보로는 절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저들이 해적 같지도 않았다.
분명 요즈음 태평양에 해적들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있기는 하지만 무슨 해적들이 저렇게 동일한 함선을 사용한단 말인가.
거기에 저들이 사용하는 엄청나게 튼튼한 갤리와 기존의 포탄과는 전혀 다른 특별한 포탄이 저들이 해적이 아닐 거라는 확신만 심어주었다.
‘대체 저놈들의 정체가 뭐지? 아무리 갤리온이 정박하고 있었다지만 그런 커다란 선박을 침몰시키는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어. 아마 저들이 사용하는 포탄 자체가 특별한 모양인데...과연 이 요새가 버틸 수 있을까?’
숫자에는 장사가 없다고 두 방향의 바다를 가득 메우고 일방적인 포격을 가했던 네덜란드의 함대에 의해 한번 무너졌던 산 디에고 요새였다.
헌데 저들의 화력은 그저 쇳덩이만 쏘아내던 네덜란드의 함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그러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사뮤엘의 안색은 나빠질 수밖에.
사뮤엘은 다시 한번 불타오르는 선착장을 바라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작 갤리의 함포 공격만으로도 저런 화력이었는데 이젠 갤리온까지 추가되었지. 거기에 저들이 사용하는 포탄은 특별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못 버틸 것 같은데 차라리 항복하면서 저들의 정체라도 파악해야 하나? 젠장! 사령관은 왜 하필 자리를 비워서!’
사뮤엘은 멕시코 시티로 떠난 사령관을 떠올리고 있을 때 뒤쪽에서 병사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어어!”
“갤리온이 선회하기 시작한다!”
이에 사뮤엘이 고개를 돌리자 어느덧 요새 근처로 접근한 갤리온들이 일제히 선회하는 모습이 보였다.
일자진을 형성하고 요새로 다가오다 일제히 선회하는 모습은 객관적으로 볼 때는 장관이었지만 에스파냐인들이 보기엔 무척이나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곧 함포사격이 시작된다는 의미였으니까.
이에 사뮤엘은 시선을 다시 눈앞의 갤리로 돌리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제대로 명중시켜도 저들에게 타격을 줄 순 없었어. 그리고 저들의 포탄은 무척이나 강력하고. 차라리 항복하는 게...’
“이...이게...이게 대체 무슨...”
그때 뒤쪽에서 들려온 탄식에 사뮤엘이 놀라 몸을 돌리자 그곳에는 이곳 아카풀코의 시장인 오를란도가 요새 위에서 멍하니 엉망이 되어버린 선착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를란도? 당신이 여길 어떻게?”
사뮤엘이 급히 오를란도에게 다가가 묻자 오를란도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포성이 들리고 선착장이 불타오르는데 전령조차 오지 않길래 요새의 상황을 파악할 겸 직접 왔네. 헌데 대체 저들은 뭔가? 단순한 해적이 아닌 듯싶은데?”
사뮤엘은 오를란도와 요새 한가운데 공터에 모여있는 무장을 한 시민들을 보고 상황을 파악했다.
자신이 갑작스러운 공격에 정신이 팔려 미처 전령을 보내는 것을 깜박했고 이 때문에 오를란도가 직접 이곳을 온 모양이었다.
더불어 싸울 수 있는 시민들까지 대동하고.
만약 저들이 단순한 해적이었다면 저 시민들이 큰 도움이 되겠지만 현재 상황으로 볼 때는 저들은 오히려 방해였다.
저들은 함포로 이 요새를 무너뜨릴 생각이었지 직접 이 요새를 점령할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였으니까.
이에 사뮤엘은 재빠르게 현재 상황을 오를란도에게 전달하려 했을 때 멀리서 포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병사들이 소리 질렀다.
“적들이 포격을 시작했다!”
“조심해!”
“우리도 당장 대포를 쏘라고!”
펑펑펑!
포성이 들리자 갤리온 쪽을 조준하고 있던 포대들도 일제히 포격을 시작했다.
덕분에 오를란도에게 차분히 설명할 시간이 없었던 사뮤엘이 오를란도에게 다가가 소리쳤다.
“저들은 단순한 해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항복을 고려하고 있구요!”
이에 오를란도는 혼란스러운 표정 대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아무리 저들의 함선이 많아 보여도 항복이라니!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이에 사뮤엘은 이미 초토화된 선착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 광경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옵니까? 고작 30분도 안 돼서 모든 선박이 모조리 초토화된 저 광경을 보고도요?”
사뮤엘이 가리킨 선착장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는 오를란도였다.
“끄응...”
“그리고...”
그때였다.
콰콰콰콰쾅!
요새 주변에서 발생한 엄청난 폭음과 흔들림에 사뮤엘도 오를란도도 그리고 병사들도 다들 혼란에 빠졌다.
“대체 이게 무슨...”
“설마 요새가 무너진 건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사뮤엘은 혹시 요새가 무너진 것은 아닌지 확인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요새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다만 요새 주변의 지형 곳곳이 엉망이 되어버린 것을 확인한 사뮤엘은 확신했다.
‘확실해. 저들의 포탄은 폭발한다.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버텨봐야 의미가 없어. 개죽음이다. 차라리 병사들의 목숨이라도 살려야 해.’
그렇게 결단을 내린 사뮤엘이 오를란도를 보고 소리쳤다.
“지금 저 광경을 보고도 병사들과 시민들에게 저들과 맞서 싸우라고 이야기할 생각입니까? 이대로 가다간 끝장입니다! 차라리 병사들과 시민들의 안전이라도 확보해야 합니다!”
사뮤엘의 주장에 오를란도는 잠시 바다에 가득한 적 함선을 바라보다가 힘없이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알겠네. 백기를 올리게.”
* * *
“뭐? 백기?”
정성국은 선장실에 들어온 김봉길이 올린 보고를 듣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포격이 멎었기에 무슨 일이 있겠구나 싶었지만, 저들이 백기를 올렸다니.
이에 김봉길은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
“모든 전선에서 포격이 시작되고 주변에서 포탄이 터지자 버텨봐야 의미 없다는 것을 저들도 느낀 모양입니다. 곧바로 요새에서 백기가 올라오면서 저항을 멈췄습니다.”
“허어...”
정성국의 감탄에 김봉길은 계속해서 보고를 이어나갔다.
“서양에서 백기가 협상이나 항복의 의미로 쓰인다고 전하께서 미리 이야기해주셨기에 일단 이쪽에서 검은 깃발을 들어 올려 포격을 중단했습니다만...그 전에 발사된 포탄이 요새 일부에 직격, 포루 한곳이 무너졌습니다.”
그러면서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은 김봉길에게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했다.
“흐음...그거야 뭐...바로 반응할 수도 없고 후장식 화포의 장전이 빠른 편이니 어쩔 수 없지. 그나마 첫 탄에 명중시키지 못한 게 다행이라고 봐야 하냐?”
정성국의 우스갯소리에 오히려 김봉길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저렇게 큰 표적을 첫 탄에 맞추지 못한 것이 문제지요. 병사들을 더욱 훈련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하하하.”
정성국은 현 상황이 만족스러웠기에 웃었다.
산 디에고 요새에서 항전하던 에스파냐 병사들이 백기를 들어 올림에 따라 이번 전투는 북미왕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으니까.
그때 김봉길의 목소리가 정성국의 귓가에 들려왔다.
“전하. 일단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만...어쩔까요?”
이에 정성국은 김봉길을 보며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을 열었다.
굳이 에스파냐인들이 살기 위해 백기를 들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공격할 수는 없었다.
아예 서양인들과 사생 결단을 낼 것이 아니라면야.
“저들이 항복의 의사를 보였으니 일단 이야기를 해봐야지. 이것으로 전투를 끝내는 것도 우리 쪽은 나쁠 것이 없고. 이쪽에서 가만히 있으면 저들이 알아서 오려나?”
정성국이 고개를 갸웃할 때 김봉길이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남은 배가 과연 있을까 싶습니다만...”
이에 정성국 역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것도 그렇군. 그럼 이쪽에서 에스파냐어가 가능한 외무청 관리를 보내도록 하게. 물론 백기가 서양에서 항복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협상을 의미하기도 하니까. 뭐 상황을 생각해보면 항복의 의미로 백기를 들어 올린 것 같지만 말이네.”
김봉길 역시 정성국의 의견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되물었다.
“헌데 저들이 항복한다면...이후는 어떻게 합니까? 애초에 기존 계획은 아카풀코 항의 초토화였잖습니까? 저들이 항복했으니 아카풀코 항을 점령하실 계획이십니까?”
“글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