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땡땡땡땡!
새벽의 적막에 휩싸였던 산 디에고 요새는 갑작스럽게 울린 비상종 소리에 깨어났다.
비상종 소리에 요새 안쪽의 자그마한 연병장으로 집합한 병사들은 대부분 아직도 잠에 취해 어리둥절한 표정이거나 아니면 갑작스럽게 잠이 깨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울리는 비상종 소리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곧 안색을 굳히며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성벽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현재 이 산 디에고 요새에서 가장 높은 직위인 사뮤엘도 있었다.
‘젠장. 갑자기 무슨 일이지? 사령관님도 없는데 설마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사뮤엘은 속으로 걱정하면서 재빠르게 성벽 위로 올라 바다를 보면서도 아직 필사적으로 비상종을 울리는 날씬한 병사에게 다가갔다.
“그만! 그 정도면 충분해!”
사뮤엘이 비상종을 울리는 날씬한 병사의 어깨를 잡으며 소리치자 그제야 병사는 시선을 돌려 사뮤엘을 바라보고 그의 얼굴을 확인한 후 표정이 밝아졌다.
“부사령관님!”
자신을 반기는 병사의 얼굴을 보면서 살짝 신경질적인 어조로 사뮤엘이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필사적으로 비상종을 친 건가?”
그러면서도 사뮤엘은 병사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별일 아니기만 해봐라. 아주 그냥...’
그때 병사가 팔을 들어 바다 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기 보십시오! 저기!”
“응?”
자연스럽게 사뮤엘은 병사의 팔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헉! 이런 미친!”
이미 아카풀코 만으로 들어오고 있는 대규모 함대의 실루엣이 보였다.
비록 역광이라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거의 스무 척에 가까운 대규모 함대였다.
거기에 각 함선의 크기가 작은 편도 아니었고.
분명 저런 대규모 함대가 올 예정이라는 소리는 듣지 못했기에 사색이 된 사뮤엘이었고 그 옆에 있던 병사는 그런 사뮤엘의 표정을 보고 저들이 예정되어있던 손님은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부사령관님. 저들은 해적...일까요?”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병사의 말에 정신을 차린 사뮤엘은 대규모 함대를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최소한 1천 톤급 갤리온과...근데 저건 뭐지? 돛이 없다? 노로 움직이는 건가? 그럼 갤리라고? 아무리 갤리라도 돛이 없다니...용도는 돌격선? 그럼 정말 해적인 건가?’
“그건 모르겠지만...어?”
선착장을 향해 다가오던 대규모 함대 중에 갤리온으로 짐작되는 범선들은 속도가 줄었고 대신 돌격선으로 짐작되는 갤리가 일제히 속도를 올리면서 선착장으로 빠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를 파악한 병사가 옆에서 소리쳤다.
“저...작은 배가 다가옵니다! 부사령관님!”
이에 사뮤엘은 잠시 입술을 깨물다가 비상종을 울리는 밧줄을 잡아채고 힘차게 비상종을 울리면서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연병장에 있는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젠장! 총원 전투 준비! 당장 화약을 가져와! 대포를 쏠 준비를 해라!”
* * *
부산한 산 디에고 요새와는 달리 선착장에 정박하고 있던 갤리온은 아직 조용했다.
애초에 갤리온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만약을 위해 배를 경비하기 위해 남은 병사들도 대부분 잠을 자고 있었고 당직을 맡고 있던 병사조차 안에서 잠을 자거나 술을 마시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으니까.
그나마 제대로 당직을 서고 있던 병사 몇몇이 가까이 있던 산 디에고 요새에서 들려오는 비상종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갑판 위로 나왔다가 예상 밖의 풍경을 보고 잠시 당황해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해가 막 떠오르는 시점에 뒤쪽에는 갤리온으로 짐작되는 커다란 함선들이 죽 늘어서 있었고 앞쪽에는 노선으로 짐작되는 함선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으니.
그렇게 병사들이 잠시 멍하니 접근하는 노선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들의 정신을 일깨워줄 폭음이 들려왔다.
펑펑펑펑!
자신들이 타고 있던 갤리온에 무척 가까이 다가온 돌격선이 예상과는 달리 속도를 늦추면서 선수포를 발사한 것이다.
폭음소리에 정신을 차린 갑판 위에 올라왔던 병사들은 그제야 갑판 밑으로 달려가면서 고래고래 소리치기 시작했다.
“일어나! 적이다! 적이 나타났다!”
선원들이 그나마 배를 경비하기 위해 남아있던 병사들을 깨우기 시작할 무렵.
콰콰쾅!
가까이에서 굉장한 폭음이 들려와 자고 있던 병사들을 깨우려는 병사를 도와주었다.
커다란 폭음이 들리자 배에 남아있던 선원들은 모두 깨어나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닌 밤중에 이게 무슨 난리인가 싶었던 것이다.
“뭐야? 갑자기?”
“글세? 화약에 불이라도 붙은 거야? 사고?”
그때 당직들이 복도에서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상! 적이 쳐들어왔다! 당장 전투 준비하라고!”
그제야 간신히 상황을 파악한 선원들이 혼란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반사적으로 포 갑판으로 달려가 포문을 열면서 슬쩍 바깥을 바라보았지만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젠장! 안 보여! 차라리 머스킷을 집고 갑판으로 올라가!”
포문을 통해 바깥의 상황을 파악하려 했지만 적이 보이지 않자 나이 든 병사가 소리쳤고 이에 병사들은 일제히 갑판으로 올라가기 시작할 무렵 다시 대포가 발사되는 폭음이 들려왔다.
펑펑펑펑!
“대포 소리다! 적이 확실해! 당장 올라가!”
대포 소리에 잠시 움찔한 병사를 향해 노병이 소리치자 다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배에 무언가 충돌한 듯 충격이 있었지만, 노병이 다시 소리쳤다.
“신경 쓰지 말고 올라가라고! 고작 대포 한두 발 맞는다고 갤리온이 어떻게 되지는 않아!”
그런 사실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당장 정신이 없었기에 두려운 표정을 지었던 병사들이 노병의 다그침에 다시 움직일 무렵.
콰콰콰콰쾅!
“끄악!”
“살려줘!”
“아아악!”
갑판 위로 올라가는 계단 옆의 포 갑판에서 엄청난 폭음과 함께 화염이 선실 복도를 가득 채웠다.
이 때문에 갑판 위로 올라가려던 병사들이 모두 나뒹굴고 즉사하거나 일부는 산채로 불에 태워지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맨 뒤에서 병사들을 다그치며 움직이던 노병은 눈앞의 참혹한 광경을 보고 덜덜 떨기 시작했다.
“이...이게...무슨...”
* * *
“흐음...”
김봉길은 잠망경을 통해 흘러가는 상황을 파악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상황은 무척이나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이는 당연했다.
가장 경계가 느슨한 시점에 일방적인 기습이었으니.
덕분에 정박하고 있던 갤리온은 그저 커다란 훈련 표적에 불과했다.
거기에 정박하고 있는 갤리온의 뒤편에서 접근하고 있는 인급 전선들이기에 반격을 당할 여지도 없었고.
그 때문인지 계획과는 다르게 조금 더 선착장에 접근한 인급 전선들이었다.
그리고 선수포를 사용해 열심히 포탄을 날려댔고.
첫 포격으로 2척의 갤리온의 선미가 박살이 났고 두 번째 포격에 대부분 갤리온의 선미가 부서졌다.
그리고 속도를 줄이면서 발사한 세 번째 포격에 모든 갤리온의 선미가 불타오르기 시작했고 선착장에 근접한 인급 전선들이 일제히 선회하면서 현 측에 있던 후장식 화포로 열심히 포탄을 발사했다.
퍼퍼퍼퍼펑!
콰콰콰콰쾅!
그렇게 계속되는 포격에 정박해있던 갤리온이 하나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끝났군. 다른 배들은 크게 의미 없고.’
갤리온을 제외하면 그렇게 커다란 배는 많지 않았기에 김봉길은 잠망경을 움직여 선착장 옆에 보이는 요새를 살펴보았다.
요새 위에는 병사들이 부리나케 뛰어다니고 있었고 대포들이 하나둘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역시 예상대로 요새에 화포가 존재하는군. 그럼 슬슬 지급 전선을 움직여야겠어.’
그런 판단을 내린 김봉길이 부함장에게 명령했다.
“노란 깃발을 올리게.”
“알겠습니다. 함장님.”
김봉길의 명령에 부함장은 움직였고 곧 김봉길이 탄 지급 전선에 노란 깃발이 오르자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모든 지급 전선이 돛을 접고 증기기관을 이용해서 조심스럽게 산 디에고 요새를 바다에서 둘러싸기 위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인급 전선은 열심히 포탄을 쏘아댔고 어느덧 선착장에 정박하고 있던 선박 대부분이 불타오르다가 침몰하기 시작했다.
그때쯤 선착장 옆에 보이는 요새에서 화포가 발사되는 폭음이 들리면서 포탄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 * *
선착장 옆에 존재하는 요새에서 화포가 발사되고 포탄이 인급 전선으로 날아왔다.
그리고 그 포탄 중 하나가 이정운 함장이 타고 있는 인급 전선의 상부 구조물에 명중했다.
퍽!
순간의 충격에 선원들이 움찔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이정운 함장은 일부러 가소로운 듯 크게 웃었다.
“하하하. 전에 에스파냐의 해군과 교전할 때도 느꼈지만 이자들의 화포는 참 약하단 말이야? 안 그런가?”
이 배에 타고 있는 병사들은 모두 전투 경험이 있었다.
작년 새남포를 오가는 정기선을 호위하다 에스파냐의 교역 선단과 마주쳐 교전해 결국 저들을 모두 침몰시킨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도 포탄을 몇 발 맞았었지만 별다른 피해는 없었고.
그렇기에 포탄을 맞은 충격에 배가 흔들리자 잠시 움찔한 병사들은 곧 이정운 함장의 너스레에 다들 피식 웃으면서 불안감을 떨쳐냈다.
그런 분위기를 파악한 이정운 함장은 다시 잠망경에 눈을 가져다 댔다.
‘저게 서양놈들이 주로 짓는다는 요새라는 건가? 성에 비하면 좀 낮아 보이는데...포격에 대비해서 저렇게 두껍게 지었다지?’
이정운 함장은 시야에 들어온 산 디에고 요새를 보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산 디에고 요새에 관해선 이미 들을 정보는 다 들었다.
기존의 높은 성벽은 화포에 의해 쉽게 무너졌기에 화약 무기가 만연한 서양에서는 저런 낮고 두꺼운 요새를 주로 짓는다고 했다.
거기에 구조적으로 포탄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요새 모양을 별 모양으로 설계함에 따라 생각외로 무척 단단한 편이라고.
‘하지만 생각보다 요새가 작은 만큼 화포의 수가 많지 않다. 저 화포만 침묵시킨다면 그저 좀 단단한 훈련 표적지에 불과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정운 함장은 뒤쪽에 부함장에게 소리쳤다.
“부함장! 지금 기함의 깃발은?”
“노란 깃발입니다! 지급 전선들이 전진하고 있습니다!”
부함장의 대답에 이정운 함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이제부턴 요새를 공격하겠다는 거군. 좋아! 우리도 요새를 공격한다! 미리 이야기 한 대로 최대한 저들의 화포 근처를 노려서 포격하도록!”
“알겠습니다!”
* * *
정성국은 지급 전선의 선장실에서 호위대원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정성국이 보기엔 의미도 없고 너무 과한 보호 같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이 친정을 결정한 이상 감수해야 할 부분이었다.
이에 정성국은 시선을 돌려 호위대장의 보고를 들었다.
“그래. 선착장에 정박하고 있던 선박 대부분은 침몰시켰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적의 전선으로 짐작되는 갤리온 6척을 모두 침몰시켰고 그 후 선착장에 정박해있는 선박 대부분을 공격해 불태우고 침몰시켰습니다.”
“그럼 슬슬 산 디에고 요새를 공격하러 움직이는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전하.”
“알겠네. 다른 보고 사항이 생기면 바로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전하.”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산 디에고 요새를 무너뜨리고 나면 다음은 아카풀코 항 전체를 불태워버리는 것만 남는데...뭐 산 디에고 요새를 무너뜨리는데 시간이 꽤 걸릴 테니 그사이에 민간인들은 알아서 도망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