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이번 원정 함대의 첫 번째 목표는 바로 아카풀코 항이었다.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는 수도 멕시코 시티의 외항이라고 할 수 있는 베라크루즈 항이다.
멕시코 만에 접해있는 이 베라크루즈 항은 누에바 에스파냐 제일의 항구였다.
다만 이런 베라크루즈 항은 북미왕국이 공격할 방도가 없었다.
베라크루즈 항을 공격하겠다고 남미를 빙 돌아 3만 km를 항해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럴 능력도 없었고 그럴 의사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항구이자 누에바 에스파냐 서해안에 존재하는 아카풀코 항이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카풀코 항은 누에바 에스파냐의 경제에 두 번째로 중요한 항구였는데 이는 전적으로 마닐라와의 무역 때문이었다.
마닐라와 아카풀코를 오가는 갤리온 무역으로 에스파냐의 아시아 무역이 이루어졌고 1573년 아카풀코 항은 마닐라 무역의 독점은 인정받게 되면서 아카풀코의 가치는 더 높아졌다.
그렇기에 이 아카풀코만 제대로 초토화하기만 해도 누에바 에스파냐뿐만 아니라 에스파냐 본국에도 타격을 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카풀코를 계속해서 봉쇄한다면 누에바 에스파냐의 아시아 무역이 당분간 불가능해지고 자연스럽게 에스파냐가 구축한 유럽과 누에바 에스파냐, 아시아로 이어지는 무역 시스템이 어그러지니 누에바 에스파냐가 버티긴 어려우리라 판단했다.
* * *
아카풀코 항은 임시 보급항에서 동남쪽으로 약 1350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3일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고 원정 함대가 아카풀코 항 인근에 도착한 시각은 아직 해가 뜨기 직전의 어두운 새벽이었다.
정성국은 선실에서 애써 눈을 붙이고 있었지만, 호위대장이 선실을 두드리는 소리에 곧바로 일어났다.
“기침하셨습니까. 전하.”
“아아. 도착한 건가?”
“그렇습니다. 전하.”
“그럼 나가봐야겠군.”
호위대장의 보고에 정성국은 정신을 차릴 겸 선실에 있는 물병을 들고 안에 있는 물을 모두 마신 후 예전 강평화가 만들어 정성국에게 건네준 화려한 장식의 단총 두 자루가 매어진 가죽 벨트를 허리에 차고 그 위에 황금 수실로 장식된 검은 외투를 걸쳤다.
그리고 정성국은 선실을 나서 갑판 위로 향했다.
이미 갑판 위는 무척이나 북적이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전하.”
“아아. 도착했다면서?”
“그렇습니다. 전하. 잠시 후 아카풀코 항이 보일 겁니다.”
김봉길의 대답에 정성국은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조금씩 붉어지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아직 해가 뜨진 않았군?”
“그렇습니다. 전하. 하지만 아카풀코 항에 도착할 때쯤이면 해가 뜨기 시작할 겁니다. 우리는 해를 등지고 공격하게 될 테니 나쁠 것은 없지요.”
그러면서 씩 웃는 김봉길이었고 정성국 역시 역광이 원정 함대에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전투 준비는?”
“이미 전투 준비는 다 완료했습니다. 이제 막 지급 전선에 방어판을 세우는 중이었습니다.”
정성국이 갑판 위를 둘러보니 병사들이 방어판을 설치하고 있었다.
다만 평소와는 달리 방어판을 설치하고 그 방어판 뒤에 병사들이 갑오 소총을 들고 그대로 대기하고 있었다.
덕분에 평소와는 달리 무척 혼잡해 보였다.
“꽤 혼잡하군.”
그러면서 정성국이 방어판 뒤에 서 있는 병사를 바라보자 김봉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물론 저들 병사들이 실제 총을 사용할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만...혹시 모르는 일이니까요.”
김봉길의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잠시 병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부디 예상대로 일이 잘 풀려 저들이 실제로 총을 사용할 필요가 없기를 말이다.
“그렇긴 하지. 작전은 계획대로 진행할 생각이지?”
“그렇습니다. 전하. 아카풀코 만으로 진입해 먼저 정박해있는 선박들을 공격하고 후에는 산 디에고 요새를 무너뜨리고 그 후에 항구 전체를 공격할 생각입니다.”
아카풀코 항은 아시아 무역의 관문이었고 이곳을 드나드는 선박에는 값비싼 물품들이 실려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수많은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해적들이 아카풀코 항에 관심을 가졌다.
이 때문에 에스파냐는 항구에서 오는 배와 화물을 보호하기 위해 요새를 지었고 이 요새 이름이 바로 산 디에고 요새였다.
“그래. 그럼 자네에게 맡기도록 하겠네.”
“알겠습니다. 전하.”
일단 정성국이 친정을 하는 만큼 이번 원정의 총사령관은 정성국이었지만 함대를 운용하는 것은 김봉길에게 전적으로 맡길 수밖에 없었다.
이에 정성국은 대략적인 작전 목표 정도만을 세웠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세부적인 작전 계획과 함대 운용은 모두 김봉길을 비롯한 함장들이 머리를 맞대고 세운 계획이었다.
* * *
산 디에고 요새의 성벽 위의 화롯불 근처에서 에스파냐 병사 둘이 온기를 쬐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하아...심심하다.”
살집이 넉넉한 커다란 덩치의 병사가 투덜거리자 함께 근무하고 있던 날씬한 체구의 병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새벽 근무는 어쩔 수 없지.”
“아니. 평소에는 적당히 넘어갔잖아? 근데 요 요새 들어 이렇게 난리냐고. 빌어먹을.”
덩치의 말대로 이전까지만 해도 새벽 근무는 망루에 근무하는 병사 한 명을 제외하면 대부분 성벽 안에 마련된 쉼터에서 적당히 잠을 자면서 시간을 때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한 달 전부터 갑자기 경계는 제대로 서라는 명령이 내려왔고 덕분에 새벽 근무를 서야 하는 병사들의 불만은 엄청나게 늘어났다.
이에 날씬한 병사가 마치 너만 알고 있으라는 분위기로 슬쩍 입을 열었다.
“몇 달 전에 이미 돌아왔어야 하는 마닐라 교역 선단이 아직 소식이 없어서 그렇다고 하더라.”
하지만 덩치는 날씬한 병사의 말에 오히려 짜증을 냈다.
“그거하고 우리가 성벽에서 근무해야 하는 것하고 무슨 연관이 있는 건데?”
이에 날씬한 병사는 멋쩍은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마 위쪽에선 태평양에 다시 해적이 돌아다니는 것 아닌가 걱정하는 눈치던데?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새벽에 눈을 부릅뜨고 바다를 쳐다봐야 하는 처지가 된 거고.”
3년 전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마닐라에서 출발한 교역 선단이 도착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누에바 에스파냐에는 이런저런 소문이 퍼졌는데 그중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되는 소문이 바로 해적들이 다시 태평양에 출몰했다는 소문이었다.
이를 언급하자 덩치는 콧방귀를 뀌었다.
“이런 미친. 고작 소문 때문에 우리가 이런 뺑이를 쳐야한다고? 엘 드라코가 살아 돌아오기라도 했을까 봐? 아무튼, 겁은 많아서...”
엘 드라코.
잉글랜드의 전설적인 해적인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에스파냐인들이 부르는 호칭이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살아있을 때만 해도 에스파냐인들은 그를 악마로 여기며 치를 떨었지만 이미 죽은 후였기에 농담처럼 언급하자 날씬한 병사는 웃음소리가 조용한 요새에 퍼질까 봐 큭큭거렸다.
“큭큭큭. 그러니까. 그 엘 드라코조차 이곳 아카풀코 항을 공격하진 못했는데 말이지.”
그러면서 곧 교대시간이 다가오는 만큼 시간을 때우기 위해 덩치가 음담패설을 입에 담을 때쯤 날씬한 병사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 야!”
음흉하게 웃으면서 입을 털던 덩치는 날씬한 병사의 반응에 어리둥절했다.
“그러니까 마담이...응? 왜?”
“저거...저길 봐봐!”
“응?”
날씬한 병사가 다급하게 손을 들어 바다를 가리키자 덩치는 자연스럽게 그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헉!”
그리고 덩치는 자신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막 해가 뜰 시점이라 역광 때문에 선박의 외향이나 깃발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다만 커다란 선박이 줄지어 아카풀코 만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것도 한두 척이 아닌 최소 10척은 넘어 보이는 대규모 함대가.
이에 눈이 커진 덩치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저게...저게 다 몇 척이지?”
그 말을 듣고 날씬한 병사가 슬쩍 보면서 소리쳤다.
“못해도 10척은 가볍게 넘어 보이는데? 설마 저런 대규모 함대가 올 예정이라는 소리 못 들었지?”
“못 들었지!”
그렇게 덩치가 소리치자 문득 날씬한 병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설마 해적인가?”
이에 덩치는 날씬한 병사에게 버럭 소리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해적선이 저렇게 클 리가 없어! 거기에 대부분 비슷한 선박 같은데? 두 종류의?”
“그럼...저지대 놈들인가? 설마 또?”
1615년 네덜란드의 함대에 의해 아카풀코가 쑥대밭이 되고 이 산 디에고 요새조차 박살이 난 적이 있었다.
지금 자신들이 서 있는 산 디에고 요새는 그 이후에 다시 복구한 요새이고.
이를 떠올린 날씬한 병사의 말에 덩치가 움찔했다.
“아니 이미 독립한 저지대 놈들이 대체 왜...”
망연자실한 덩치를 보고 날씬한 병사가 안절부절못하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어쩌지?”
이에 덩치는 문득 요새가 조용하다는 것을 느끼고 버럭 소리쳤다.
“젠장. 망루에 근무하는 새끼는 또 쳐 자나 보네! 일단 비상종을 울려!”
“아...알았어!”
덩치의 말에 날씬한 병사는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갔고 곧 비상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땡땡땡땡땡!
동시에 한적한 산 디에고 요새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 * *
“허어...여긴 정말 아름다운 곳이구나. 거기에 천혜의 항구이기도 하고.”
“그렇습니까?”
정성국은 방어판에 부착된 잠망경을 통해 아카풀코 만의 초승달 모양의 새하얀 백사장을 보고 상황에 맞지 않게 감탄사를 토했다.
전생에서 아카풀코가 꽤 유명한 휴양지였다는 것을 떠올린 정성국이 다시 한번 해안가를 바라보았다.
그의 기억처럼 해안가를 따라 고층 건물들이 죽 늘어선 대신 원주민들이 사는 집으로 추정되는 건물들이 보였다.
그리고 선착장 근처에 에스파냐 느낌이 물씬 나는 2층 주택이 몰려있었고.
정성국은 이를 보고 잠시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애써 떨쳐냈다.
‘일단 정박해있는 선박을, 그리고 저기 보이는 산 디에고 요새를 공격할 테니 그때 원주민들은 최대한 도망쳤으면 좋겠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정성국은 잠망경을 움직여 아카풀코 해안가 한쪽에 마련된 커다란 선착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군함으로 보이는 갤리온 6척과 그 외의 범선들이 꽤 많이 보였다.
정성국은 이를 확인하고 잠망경에서 물러나며 김봉길에게 말했다.
“저곳에 갤리온이 6척 정박해있군. 확인하고 바로 공격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전하.”
정성국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김봉길은 잠망경을 조작해 갤리온의 위치를 파악한 후 뒤쪽에 있는 부함장에게 소리쳤다.
“인급 전선들에 신호를 보내게!”
“알겠습니다. 함장님!”
김봉길의 명령에 따라 가운데 돛대 위의 망루에 서 있던 병사가 빨간 깃발을 흔들었다.
빨간 깃발은 작전계획에 따라 인급 전선의 돌격을 의미하는 깃발이었다.
아무래도 대략적인 아카풀코 만의 지리는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해도가 없었기에 먼저 작은 인급 전선부터 보내기로 되어있었다.
더불어 인급 전선은 포의 사각이 없었기에 돌격하면서 사격을 할 수도 있었고.
정성국은 방어판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인급 전선이 일제히 나아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을 속으로 한탄했다.
‘다음에 원정에 참여할 땐 무조건 왕실 전함부터 만들어야지. 인급 전선처럼.’
그때 호위대장이 정성국에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전하. 이제 개전을 시작했으니 약조하신 대로 갑판 밑으로 내려가시옵소서.”
이에 정성국은 슬쩍 시선을 회피하며 입을 열었다.
“상황을 보니 이곳에 있어도 크게 위험할 것 같지는 않은데 이곳에 남아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어떤가?”
“어차피 함대 운용은 김봉길 함장이 맡아서 하기로 되어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차피 방어판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 굳이 남아계실 이유가 있습니까?”
이에 정성국은 방어판 뒤에 서 있는 병사들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 병사들도 위험을 무릅쓰고 방어판 뒤에 서 있는데 내가 들어가는 것은 좀...”
정성국의 변명에 호위대장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전하. 이러실 작정이셨습니까?”
“크흠.”
괜히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리는 정성국에게 김봉길이 다가와 호위대장을 도왔다.
“전하. 안전을 생각해서라도 들어가시지요. 선장실에라도 가 계십시오.”
“끙...”
아무래도 배 위에선 함장의 말을 따라야 한는 법이라 정성국이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김봉길이 쐐기를 박았다.
“전 무엇보다 전하의 안전을 우선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만큼 계속 이곳에 계신다면 이 지급 전선은 이곳에서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알았네. 알았어.”
결국, 정성국은 김봉길과 호위대장의 합동 공격에 손을 들고 발걸음을 옮겨 뒤쪽의 선장실로 들어갈 때 멀리서 후장식 화포가 발사되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