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정성국은 게으른 곰과 헤어진 후 새나주의 행정청에서 머물며 새나주의 현황을 살피고 혹시 무슨 문제가 없는지 세심하게 살폈다.
동시에 정성국이 새나주에 들렀다는 소식에 요쿠츠 족의 추장들이 새나주로 몰려들었고 잠시 시간을 내서 그들과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의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고.
여러 요청 가운데 정성국이 가장 난처했던 요구가 바로 광부들의 보수를 낮추어 달라는 요쿠츠 족 추장들의 요청이었다.
광산의 일은 무척이나 힘들었기에 광부를 모집하기 위해 많은 보수를 지급했는데 작년 새나주 동쪽에 은광지대가 생겨나면서 요쿠츠 족의 젊은이들이 죄다 그쪽으로 빠져나갈 기세라고 한다.
이에 정성국은 꽤 의아한 표정이었는데 광부의 보수를 높이 책정한 이유가 자유로운 원주민이 과연 고된 광부 일을 할까 싶어 채산성이 악화하는 것을 감수하고 그리 설정했기 때문이다.
헌데 알고 보니 광산에서 일하는 것이 보수가 괜찮고 농사일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기에 차라리 광산에서 일하며 1년 중 절반은 돈을 벌고 절반은 그냥 쉬려고 광부를 선택하는 원주민들이 꽤 많다고 한다.
이에 일단 요쿠츠 족 추장들을 달래고 광산에서 일하는 인원을 제한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채산성을 생각하면 보수를 줄이는 것이 맞지만 확실히 광부들의 일이 힘든 것은 사실이었기에 보수를 줄였다가는 광부로 지원하는 사람들이 사라질테니까.
그 외에도 요쿠츠 족 추장들이 요청한 자잘한 내용 중 당장 처리할 수 있는 부분은 처리하고 그 외에는 새김포로 보내는 보고서를 정성국이 직접 써서 보내기로 했다.
동시에 외무청 관리를 만나 게으른 곰이 지적해 준 문제를 거론하며 예정대로 작년에 북미왕국이 에스파냐의 해군을 이겼다는 소문을 퍼트리되 그 소문을 듣고 저들이 당장 에스파냐를 적대하는 것은 최대한 막고 일단 시간을 끌어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새나주에서 하루 정도 머물면서 당장 할 일은 다 했다고 판단한 정성국은 곧장 말을 타고 다시 통바 족의 영역으로 돌아갔다.
* * *
“어? 오셨습니까? 새나주엔 잘 다녀오셨습니까? 전하.”
김봉길은 선착장에서 정성국을 보고 인사했다.
정성국은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생각보다 이곳에서 새나주가 꽤 멀더군. 덕분에 시간을 맞추느라 힘들었지.”
“하하하. 그렇습니까? 뭐 전하께서 오실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거나 전하께서 타실 배 한 척 남겨둘 생각이었는데...”
김봉길은 뭐 그것 때문에 고생했느냐는 표정이었지만 정성국은 고개를 흔들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내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에 다녀온 새나주일세. 그 때문에 작전 계획이 미뤄지면 안 되지. 거기에 자네들이 물자를 내려놓는 동안 임시 보급항도 둘러보고 병사들의 상태나 물자도 파악하는 등 점검을 하려면 특히나.”
정성국의 말에 김봉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선착장 주변을 둘러보고 입을 열었다.
“뭐 전하께서 일찍 임시 보급항에 도착하시면 나쁠 것은 없죠. 어차피 물자는 다 실은 듯하고...전하께서 탑승하시면 바로 출항할 수 있습니다.”
이에 정성국은 흡족해하면서 발걸음을 옮기며 김봉길에게 물었다.
“그래. 헌데 물자는 많이 옮겼나?”
“그렇습니다. 전하. 최대한 물자를 실어나르기 위해 선원조차 최소한으로 태운 상황이니까요.”
“그래? 그럼 병사들은...”
이에 히죽 웃으면서 답하는 김봉길이었다.
“임시 보급항을 건설하느라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겠죠. 설마 이것 때문에 아직 추위가 가시기 전에 움직이신 겁니까?”
정성국은 피식 웃으면서 지급 전선 위에 올라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애초에 임시 보급항이 건설되는 곳은 남쪽이라 꽤 따뜻할 텐데?”
이에 김봉길이 잠시 임시 보급항의 기후를 떠올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긴 하더군요.”
그런 김봉길의 반응에 정성국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기후를 생각하면 여름이 되기 전에 저들을 협상장으로 끌어들이는 게 맞아. 아니면 꽤 힘들어질 거야.”
이에 김봉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래 보이긴 합니다만...과연 에스파냐가 우리의 생각대로 협상장에 나오는가가 관건이지요. 외무청의 보고서를 보니 이곳 원주민을 사람 취급조차 안 하는 놈들인데 과연 협상장에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김봉길이 살짝 안색을 굳히며 말했지만, 정성국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하지 말게. 첫 단추만 제대로 낀다면 저들은 우리와 협상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날 걸세. 우리와 협상하지 않는다면 누에바 에스파냐의 서해안이 계속해서 불타오를 텐데 버틸 수 있겠나? 거기에 필리핀 총독부와의 무역도 끊길 텐데?”
외무청의 보고서를 통해 에스파냐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접했던 김봉길은 그건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그건 그렇군요. 명이나 청처럼 해금령을 쓰지는 못하겠군요.”
이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물자는 어느 정도 옮겼나?”
“이곳에 쌓인 물자 절반 가까이 옮겼습니다.”
겨울 내내 여러 선박을 동원해 꽤 많은 물량을 이곳에 옮겼었다.
그런 물량의 절반 가까이를 옮겼다는 보고에 정성국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호오. 그나마 다행이군.”
이에 김봉길은 웃으면서 정성국의 결정을 칭송했다.
“아무래도 뒤늦게 건조된 인급 전선 4척이 합류했고 전하의 결단으로 북미왕국에서 운용하는 정기선 대부분이 차출되었으니 가능했습니다.”
김봉길이 정기선을 거론하자 정성국은 쓴웃음을 지었다.
배가 부족했기에 북미의 해안가를 오가는 정기선을 한 척만 남기고 모두 차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개전 시기를 조금 늦춰 이주 선단을 동원하자는 의견도 있었고.
물론 그때까지 기다리면 물자의 운송은 원활해지겠지만 아무리 해전만 치른다 하더라도 한여름의 멕시코 기후를 생각하면 썩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아 이를 거절한 정성국이었다.
“정기선은 이번 운송을 끝으로 슬슬 돌려보내야지. 안 그랬다간 북미왕국에 타격이 클 거야.”
이에 김봉길이 시선을 돌려 최근에 건조된 인급 전선들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도 뒤늦게 추가 건조된 인급 전선이 있으니 아무래도 선박에 여유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정성국 역시 함께 인급 전선을 바라보며 일정을 맞추기 위해 갈려나 간 최주명과 조선소의 직원을 떠올리며 잠시 쓴웃음을 짓고 김봉길에게 명령했다.
“그렇지. 아. 이제 슬슬 출항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전하.”
* * *
정성국은 지급 전선의 갑판 위에서 빠르게 흘러가는 바하 칼리포르니아 반도의 풍경을 바라보며 무척이나 황량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이곳의 기후 자체도 건조 기후였고 대부분이 사막이나 스텝 기후다 보니 흙먼지가 날리거나 짧은 풀과 작은 관목 등이 심어진 허허벌판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이를 보며 정성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곳을 확보해야 하나?’
전생에서 이곳은 캘리포니아 반도라는 이름과는 달리 미국의 땅이 아닌 멕시코의 땅이었다.
그렇기에 정성국도 굳이 이곳에 관심은 없었고.
헌데 외무청이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포로로 잡힌 에스파냐인들은 북미왕국이 캘리포니아 섬을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보고를 올렸다.
그리고 이곳 역시 그들이 생각하는 캘리포니아 섬에 해당되고.
정성국이 원하기만 한다면 이를 명분으로 삼아 이곳도 가져올 수 있다는 소리였다.
어차피 협상할 때 포로로 잡힌 에스파냐인을 통역사로 내세우면 자연스럽게 그러한 정보가 에스파냐에 흘러 들어갈 테니 말이다.
‘문제는 이곳을 가져오는 것이 우리에게 이득이 될지 아닐지 알 수가 없으니...’
정성국이 기억하기로 바하 칼리포르니아 반도에는 딱히 대단한 자원이 묻혀있지도 않고 대부분이 황무지에 가까웠기에 개발하기도 쉽지 않았다.
인력과 돈을 투자한다면야 모를까 가뜩이나 땅덩이는 넓고 인구수가 적은 북미왕국으로서는 굳이 저곳에 그럴듯한 도시를 건설할 메리트가 적었달까.
이에 잠시 흘러가는 황무지의 풍경을 바라보던 정성국은 결정을 내렸다.
‘땅이야 넓을수록 좋으니 일단 확보하는 쪽으로 가되 너무 목메지는 말자.’
* * *
정성국은 마침내 도착한 임시 보급항을 보고 곧 전쟁이 시작된다는 생각에 내심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파악한 김봉길이 정성국에게 다가와 그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말을 걸었다.
“보십시오. 전하. 임시 보급항 치고는 꽤 잘 만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군.”
정성국의 딱딱한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김봉길은 손을 들어 선착장 뒤쪽에 목책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기 보십시오. 저게 물자를 보관하고 전하께서 지내실 지역입니다. 건물과 병영을 목책으로 잘 둘렀지요.”
“꽤 튼튼해 보이는군.”
이에 김봉길은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지요? 예정대로 된다면야 채 반년도 쓰지 않을 선착장과 요새이긴 합니다만...전하께서 이곳에 머물며 상황을 살핀다는 소리에 병사들이 열심히 노력한 결과입니다. 전하.”
“그래?”
김봉길의 말에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슬쩍 웃는 정성국이었다.
이를 느끼고 김봉길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하. 전하는 북미왕국의 정신적인 지주이십니다. 그런 전하가 고작 에스파냐를 상대하는 일로 긴장하신다면 병사들에게도 영향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예전에 이주 선단으로 에스파냐 놈들을 상대해 보니 별것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마음 편히 먹으십시오.”
김봉길은 정성국이 에스파냐의 일전을 앞두고 두려워한다고 생각해 내가 해봐서 아는데 신공을 펼쳐가면서 정성국이 가진 두려움을 해소해주려 했다.
이에 정성국은 전생의 기억이 떠올라 피식 웃으면서 김봉길을 바라보았다.
애당초 정성국은 북미왕국이 에스파냐를 상대로 패배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에스파냐는 북미왕국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기에 이번 공격은 에스파냐가 생각지도 못한 기습에 가까울 테니 제대로 반응조차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거기에 두 차례의 교전을 분석해본 결과 배에서도, 그리고 무기에서도 북미왕국이 월등한 만큼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은 북미왕국의 승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오히려 정성국은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다.
특히 자신의 결정으로 인해 전쟁이 발생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정성국은 이번 전쟁으로 인해 사라질 생명의 무게를 떠올리며 안색을 굳혔었지만, 선원들을 통솔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김봉길의 말도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당장 중요한 것은 최소한의 피해로 확실하게 승리를 따내는 것이지 이번 전쟁에서 사라질 생명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훗날 이번 전쟁으로 죽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할지언정 일단 전쟁은 확실하게 이기는 데 집중을 해야지.
해서 정성국은 미소를 지으며 김봉길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좋은 충고로군. 고맙네. 함장.”
정성국이 자신을 여유롭게 바라보며 미소를 짓자 김봉길은 무릎까지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아닙니다. 전하. 주제넘은 조언이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이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면서 김봉길의 어깨를 잡고 그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딱 적당한 조언이었네. 다음에도 부탁하네.”
“전하...”
분명 김봉길은 정성국과 친분이 있긴 했지만, 정성국의 신분은 이제 왕이었다.
그런 만큼 조언을 하면서도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정성국이 조언이 고맙다며 다음에도 부탁한다고 이야기하자 김봉길은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정성국은 자신을 감동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김봉길의 어깨를 팡팡 치면서 말했다.
“자. 슬슬 난 내릴 테니 자네는 물자를 내려놓는 일에 집중하게.”
“알겠습니다. 전하.”
* * *
정성국은 원정 함대에 실은 물자를 임시 보급항에 내려놓는 동안 임시 보급항을 꼼꼼히 살피고 다시 한번 작전 계획을 검토하고 물자를 확인했다.
그리고 모든 물자를 내려 임시 보급항에 옮겨놓았다는 보고에 병사들을 동원해 출정 준비를 했고.
물품을 다 내려놓은 정기선은 바로 새김포로 돌려보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마지막으로 병사들을 쉬게 하면서 이들에게도 곧 전투가 벌어지리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병사들은 이미 분위기를 통해 짐작하고 있었지만, 정성국이 직접 이를 언급하자 전쟁이 다가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다만 예전부터 여러 정훈 교육을 병행했고 이곳에서도 강도 높은 정신 무장을 시켰기 때문인지 동요하는 병사들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동안의 교육을 통해 조선인들에게 에스파냐는 왜국과 비슷한 인상을 주는 나라였고 원주민에게는 잔인한 정복자이자 학살자들의 나라로 인식되었기 때문인지 오히려 제대로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하루빨리 전투가 벌어지기를 기대하는 병사들도 있을 정도였다.
이에 정성국은 나중에 이들과 교역하려면 너무 강한 반감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이번 전쟁만 끝났다면 이러한 적대감을 적당히 완화할 방도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충분히 휴식을 취했다고 생각한 정성국은 이곳을 방어할 경비대원 1천 명을 남겨두고 마침내 원정 함대를 출항시켰다.
원정 함대의 일차 목적지는 바로 아카풀코 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