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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102화 (102/850)

102화

새김포를 나선 원정 함대는 빠른 속도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북미왕국의 서해안을 따라 쭉 남하해 추마시 족의 영역을 지나 통바 족의 영역에 건설한 보급항에 정박했다.

정성국은 자신을 보러 온 추마시 족과 통바 족의 대추장과 추장들을 상대하기 위해 일단 자신을 따라다니는 호위대원들과 함께 이곳에서 내렸다.

원정 함대는 정성국을 내려놓고 통바 족의 영역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비대원 중 1천 명과 보급 물품을 가득 싣고 곧바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원정 함대를 잠시 바라보던 정성국의 뒤편에서 호위대장이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김봉길 함장이 임시 보급항을 잘 건설할 겁니다.”

“아아. 딱히 걱정하지는 않아. 김봉길 함장이 어련히 잘 알아서 할까. 그것보다 어차피 예정대로라면 임시 보급항을 건설하고 에스파냐를 공격하기 전까지 두 번은 왕복하면서 물자를 옮길 테니 그 안에 날 보러 이곳까지 온 추마시 족과 통바 족의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 새나주도 한번 다녀올까 싶은데.”

“새나주를 말입니까?”

“응. 새나주는 한 번도 가본 적 없잖아? 그리고 이곳에선 꽤 가까운 편이고.”

“알겠습니다. 전하. 그럼 미리 말을 준비해두도록 하겠습니다.”

“아아. 그럼 부탁 좀 하지.”

그러면서 정성국은 곧장 자리를 옮겨 자신들을 보러 몰려온 추마시 족과 통바 족의 추장들을 만나며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앞으로 이곳이 어떻게 변할지를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특히 이곳 로스앤젤레스 지역은 북미왕국 남쪽의 중심 항구가 될 가능성이 무척이나 큰 만큼 나중에는 새나주보다 더 큰 도시가 들어설 수 있다고 이야기하자 통바 족의 대추장은 무척이나 좋아했다.

* * *

이번에 북미왕국에 합류한 통바 족의 영역과 새나주간의 직선거리는 약 200km였기에 말을 타고 이동했다.

처음에는 북미의 광활한 대자연의 풍광에 흠뻑 빠진 정성국이었지만 길잡이의 안내로 며칠 동안 말을 달리자 속으로 자신의 선택을 몹시 후회했다.

정성국의 예상과는 달리 통바 족의 영역에서 새나주까지는 산맥들이 가로막고 있어 정성국이 생각한 경로로 가려면 산맥을 넘느라 고생해야 하니 우회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길잡이의 안내대로 북동쪽으로 이동해 산맥을 빙 돌아 이동해야 했고 덕분에 실제 이동 거리는 그 배에 가까웠다.

‘젠장...어차피 나중에 이곳까지 철도가 깔리면 그때 방문할 것을 괜히 근처에 온 김에 방문하겠다고 했다가 이 고통을...’

그렇게 속으로 후회하고 허벅지와 허리의 통증에 끙끙댈 때쯤 정성국의 눈앞에 새나주의 전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새나주는 정성국의 생각하던 풍경과는 매우 달랐다.

정성국이 생각하는 새나주의 풍경은 허허벌판에 조그마한 마을을 생각했었는데 실제로는 생각보다 규모도 컸고 사람들도 북적였다.

이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멀리서 탐사대로 보이는 병사들이 말을 타고 정성국과 호위대원 일행에게 다가왔다.

이에 호위대장이 먼저 나서서 저들의 신분을 확인했다.

“전하. 탐사대원들입니다.”

“그렇겠지. 말에 꽤 익숙해 보이니. 어라?”

정성국은 탐사대원들의 맨 앞에서 정성국의 얼굴을 알아보고 허겁지겁 말에서 내려 정성국에게 고개를 숙이는 원주민이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들어 잠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잠깐 고개를 들어봐라.”

“예?”

정성국의 명령에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조심스럽게 얼굴을 드는 탐사대의 조장을 보고 손뼉을 쳤다.

“아! 역시. 조용한 곰의 아들 맞지? 음...게으른 곰이었던가?”

정성국이 자신을 기억할지 몰랐던 게으른 곰이 눈을 크게 뜨고 정성국을 바라보다가 정성국 뒤에 있는 호위대장의 매서운 눈길에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그...그렇습니다. 전하.”

정성국이 자신을 알아보자 몹시 당황하고 있는 게으른 곰을 보고 정성국은 피식 웃었다.

왜 몰라보겠는가.

자신이 직접 이들을 꼬드겼었는데.

다만 그의 계획과는 달리 하얀 들꽃을 제외하고는 모두 군사청으로 빠지긴 했지만.

거기에 외모는 확실히 조용한 곰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정찰 중이었나?”

“그렇습니다. 전하.”

정성국은 게으른 곰을 보고 함께 그가 끌어들인 다른 대추장의 자식들이 생각났다.

“자네 친구들은 잘 있고?”

“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게으른 곰을 보고 정성국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굳건한 바위와 음흉한 여우 말일세.”

그저 북미왕국이 세워지기 전에 아버지인 대추장을 수행하다 딱 한 번 만났을 뿐인데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 친구들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정성국을 보고 슬쩍 감격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그렇습니다. 전하.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 게으른 곰의 눈길에 피식 웃으면서 정성국은 슬쩍 입을 열었다.

“아. 새나주까지 안내를 부탁해도 괜찮을까?”

“물론입니다. 전하.”

하얀 들꽃이 말하기를 게으른 곰이 대추장의 자식 중에선 제일 게으르고 뺀질거린다고 들었다.

그런 만큼 이곳의 사정도 빠삭하게 알지 않을까 싶어 부탁했고 역시나 정성국과 이야기하면서 긴장이 풀린 게으른 곰은 이곳의 사정을 정성국에게 모조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래? 작년에 급격히 저렇게 커진 거라고?”

“그렇습니다. 전하. 그 전까지는 북미왕국에서 마을을 건설했어도 사람이 많지 않은 꽤 한적한 시골 마을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저렇게 커진 건가?”

정성국의 물음에 게으른 곰은 마을 주변의 강가에 따라 조성된 밭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행정청에서 종자를 나누어주고 재배 방법을 알려준다고 해도 아직 농사에 익숙지 않은 원주민들은 작물을 재배하는 것이 쉬울 수는 없지요.”

“그렇지.”

“다른 지역은 선생들이 농사일을 가르쳐주지만, 이곳 원주민들은 아직 선생도 없었고요.”

북미왕국의 선생들은 언어 외에도 이런저런 지식을 가르친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이라면 모를까 어른들은 굳이 시간을 내서 교육받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아마 작년에는 이곳에 아직 선생도 배치되지 않았을 시기라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헌데 이곳에 상주하고 있는 경비대원들 중의 이주민 출신들이 농사일에 빠삭한지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게으른 곰이 말하는 경비대원들은 주로 조선인 출신으로 농사를 지어본 친구들일 것이라 생각한 정성국이 감탄사를 토해냈다.

“아하.”

‘대민 지원이라니. 이 기특한 친구들을 보았나.’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어 정성국이 흐뭇하게 웃고 있을 때 게으른 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조언대로 농사를 지었더니 이 주변에선 확실히 수확이 많았고요. 덕분에 원주민들이 너도나도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허어...”

“그리고 작년에 이곳 새나주 동쪽에 새로운 광산이 발견되고 광산 마을이 생겨나면서 그곳에서 사용하는 물자를 이곳에서 챙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손이 많이 필요해졌고...뭐 덕분에 새나주가 저렇게 커지게 되었습니다.”

동쪽에 캘리코 은광지대를 거론하는 게으른 곰의 말에 문득 호기심이 든 정성국이 게으른 곰에게 물어보았다.

“그런가? 자네는 그 광산 마을에 가봤나?”

“그럼요. 자주 가봤지요.”

“그래?”

“예. 가끔 통바 족으로 위장하고 푸에블로 족이 사는 지역으로 가려면 그 광산 마을에 들르곤 하거든요.”

“아하. 그곳은 어떤가?”

후대에 캘리코 은광지대는 관광지로 변했기에 한번 방문해볼까 싶어 게으른 곰의 설명을 자세히 듣던 정성국은 이내 방문할 의사를 접었다.

게으른 곰이 말하기를 이곳에서 통바 족의 영역으로 우회하는 거리 만큼은 이동해야 한다는 말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캘리코 은광지대가 관광지로 변한 이유는 서부시대 마을 풍경 때문인데...어차피 지금은 없잖아? 그러니 굳이 가봐야 볼 것도 없을 거야. 암...’

그러면서 정성국은 게으른 곰을 바라보고 주제를 바꾸어 물어보았다.

“광산 마을에 관한 이야기는 충분히 들었고...푸에블로 족이 사는 지역에도 자주 갔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그들의 분위기는 어떠한가?”

정성국의 물음에 게으른 곰은 안색을 흐리며 대답했다.

“아...썩 좋지는 않습니다.”

“그래?”

의아한 표정을 짓는 정성국을 보고 게으른 곰이 자신이 보았던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예. 아무래도 에스파냐 놈들 때문에 말이지요. 또한, 돌아다니다 보면 텅 빈 마을도 종종 보입니다. 알고 보니 에스파냐에 대항했다가 마을 자체가 사라진 경우더군요.”

“허어...”

보고서로는 미처 파악하지 못한 사실이라 살짝 놀란 정성국이 게으른 곰에게 자세히 물어보았고 푸에블로 족을 가까이서 관찰했던 게으른 곰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정성국에게 들려주었다.

게으른 곰의 이야기를 다 들은 정성국은 속으로 조금 놀랐다.

정성국은 그저 1680년에 푸에블로 족이 에스파냐에 일제히 봉기한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소 부족별로 간혹 에스파냐에 대항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실패했고.

“고맙네. 자네 덕분에 몰랐던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었어.”

“아닙니다. 전하. 도움이 되었다니 영광입니다.”

게으른 곰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새나주의 중앙에 위치해 있는 행정청에 도착했다.

이에 정성국은 게으른 곰과의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럼 나중에 보자고.”

그러면서 정성국이 말에서 내려 행정청으로 들어가려 할 때 뒤에서 게으른 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전하.”

이에 정성국은 게으른 곰을 바라보며 물었다.

“음? 할 말이라도 있나?”

“그게...”

그동안 열심히 떠들어댔던 것과는 무색하게 살짝 긴장한 표정의 게으른 곰을 보고 정성국은 웃으면서 재촉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말해보게.”

이에 게으른 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앞서 설명했던 대로 푸에블로 족은 에스파냐에 대한 반감이 무척 큰 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북미왕국의 존재는 푸에블로 족에게 희망이 될 수 있지요.”

“그렇겠지.”

정성국이 자신의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자 게으른 곰은 긴장한 표정이 풀리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문제는 북미왕국의 존재로 인해 푸에블로 족이 성급하게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정성국은 안색을 살짝 굳히면서 말했다.

“으음...우리의 존재를 알게 된 푸에블로 족이 에스파냐에 대항할 수 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전하. 물론 그것이 전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상관없겠지만, 아니라면...”

이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게으른 곰의 말처럼 푸에블로 족이 봉기해서 에스파냐와 싸우다 푸에블로 족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은 정성국이 원하는 바는 아니었으니까.

가뜩이나 인구수가 부족한 북미왕국으로서는 원주민 한명 한명이 무척이나 소중했다.

‘외무청의 보고나 탐사대의 보고에 따르면 내 기억과는 다르게 생각외로 푸에블로 족의 지역에 배치된 스페인의 병사들이 너무 많아.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충돌하면 푸에블로 족의 피해가 너무 클 거야. 미리 말해둬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정성국은 게으른 곰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아. 알겠네. 무슨 뜻인지. 조언해줘서 고맙네.”

“아닙니다. 전하.”

정성국의 칭찬에 얼굴이 붉어진 게으른 곰을 보고 정성국은 웃으면서 생각했다.

‘뺀질거리고 게으른 편이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통찰력이 있네.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부려먹어야겠군.’

정성국의 속마음을 알았다면 게으른 곰은 기겁했을 테지만 다행히 게으른 곰은 몰랐기에 서로 웃으면서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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